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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함양 양민도 705명 학살

‘거창 학살 사건’으로 축소·은폐…4일간 3개郡 1천4백여 주민‘사냥’

정희상 기자 ㅣ 승인 2006.05.17(Wed) 00:00:00


 

 서부 경남 일대의 자영 부락들에서는 요즘 처연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산천?함양?거창지역 20여 개 자연 부락 주민들이 쏟아내는 깊은 한숨과 탄식은 지난 4월말 새 정부가 발표한 ‘역사 재조명’방침 이후 표면화되었다.  이른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라고 알려진 51년 겨울의 끔찍한 사건은 그 유족들에게 지난 42년 동안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왔다.  그 때문에 “문민시대를 맞아 왜곡되고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정부의 의지 표명이 이곳 유족들에게 때늦은 회한과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51년 2월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국군 제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 주민 7백19명이 쓰러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이 사건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치 당시에 진행된 유일한 양민 학살 사례였던 것처럼 알려지고 있다.

 

산청→함양→거창 순으로 초토화

 그러나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니 거창 양민학살사건에 그 진상의 전모가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거창군 신원면에서 자행된 학살만을 알고 있으나, 실제로 신원면 주민 7백19명 학살 사건은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나흘에 걸쳐 저지른 1천4백여 양민 학살의 맨 마지막 부분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51년 2월8~11일 나흘에 걸친 3대대의 양민학살 작전 경로인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 가운데 앞의 두 지역 7백여 양민 학살 사실은 고스란히 잘려나간 채 이른바‘거창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신원면 학살만이 세상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이 지역에서 3대대 병력이 자행한 만행은 뒤늦기는 했으나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기록하고 재조명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거창군 신원면 학살의 앞부분을 다시 복원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시사저널》취재진은 이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당시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나간 행적을 따라 가며 새로운 증언과 증거 자료들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재구성한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51년 2월8일, 지리산 줄기에 자리잡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관내 10여개 자연 부락들.  며칠 동안 계속되던 추위가 음력 설을 맞아 다소 누그러지고 이따금씩 눈발이 날리던 푸근한 아침이었다.

 초하룻날 제사를 모시고 난 다음 날이라 집집마다 남은 떡국으로 아침상 차릴 준비에 부산할 무렵, 맨 위 부락인 가현 뒷산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침 7시쯤 11사단 9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가현 부락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집집마다 돌며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자 마을 40가구에서는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1중대 병력은 놀라 뛰쳐나온 부락민들을 마을 앞 속칭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가 집중 사격을 가했다.

 당시 열두살 난 소녀로 참극의 현장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최금점씨(55?현재 화계 부락 거주)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며 몸서리쳤다.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끌어내자 나는 무서움에 질려 엄마 치맛자락만 붙들고 오들오들 떨었다.  엄마가 숨막힐 듯이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엎을 듯 한 총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그날 엄마와 언니를 포함해 마을 주민 1백23명이 그렇게 죽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학살을 마친 부대는 서둘러 가현 부락의 소와 돼지들을 몰고 바로 아래 부락인 방곡으로 향했다.  방곡에는 이미 2중대가 내려와 학살을 진행중이었다.  부대는 두 패로 나뉘어, 한 패가 마을 72개 가옥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몰고 나오는 동안 다른 한 패는 마을 사람들을 논두렁에 앉힌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맨 처음 내가 총에 맞았다.  오른팔이 칼로자르는 것처럼 뜨끔해 옆에 있던 엄마를 부르는 순간 엄마가”가만 있거래이, 인자 우리는 다 죽는다’라고 하더니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셨다.  그 뒤 나는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기절했다.  깨어나 보니 마을 사람 2백10명이 그 자리에 죽어 있었고 살아난 사람은 10명도 채 안됐다.”

 당시 여덟살로, 어머니 오빠 동생 등 일가족 7명을 학살 현장에서 잃고 부상당한 채 살아나 지금까지 방곡 부락에 거주하는 정정자씨(50)의 증언이다.

 가현 부락 학살을 마친 3대대 1중대 병력은 2중대가 저지르던 방곡 마을 주민 학살 모습을 구경하며 바로 아래 점촌 부락으로 향했다.  점촌 부락에는 당시 21가구 60명이 살고 있었는데, 역시 3대대 병력에 의해 집은 모두 불타고 60여 명 모두가 부락 앞 논에서 총살당했다.

 가현?방곡?점촌 부락을 차례로 초토화하고 내려온 3대대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고 여겼는지 이후부터는 학살 방식을 바꾸었다.  즉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개 부락 주민을 전원 한 장소로 집합시켜 학살한 것이다  학살 대상 부락은 모두 7개로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의 손곡?지곡,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의 상촌?하촌, 화계리의 화계?화산?주상 등이다.  이 7개 부락 주민들은 오전 9시부터 급습한 군대의 총부리에 떠밀려 유림면 서주리 동천강변에 모였다.

 

중화기 동원 10시간 만에 7백5명 학살

 서주리 집단 학살 현장에서는 젊은 장정 9명이 끌려나와 지기들의 무덤이 될 교실 넓이만한 구덩이를 두 군데 팠다. 오후 4시께 이윽고 3대대 병력은 주민 3백여 명을 두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수류탄을 까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하늘로 치솟은 박격포 포신은 각도에 맞춰 구덩이에 포탄을 명중시켰다.  구덩이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51년 2월8일 불과 10시간 동안 이 일대를 휩쓴 참극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주민 7백5명이 목숨을 잃었다.

 바로 여기까지 상황이 아직껏 은폐되고 있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학살을 마친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은 2월8일 밤 숙영지로 인근 함양군 생초면에 있는 생초국민학교를 택했다.  이곳에서 양민을 학살한 마을들에서 끌어온 소?돼지를 잡아 작전 축하 잔치를 벌였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관련자가 생존해 있어 취재진은 그를 만나보았다.  현재 산청군 금서면 신아리 구아부락에 거주하는 최남철씨(65)는 당시 청년방위대원으로서 3대대 병력의 길 안내를 맡아 가현 부락부터 서주리 집단 학살 현장에 이르기까지 벌어졌던 참상을 낱낱이 목격한 유일한 민간인 신분의 증인이다.

 “나는 당시 산청읍에서 청년방위대 훈련을 받다 설날 가현 뒷산 너머에 있던 수철리 집에 와 있었다.  초하룻날(2월7일) 11사단 9연대 3대대 병력이 우리집에 대대본부를 차리고 주둔했다.  다음날 새벽에 3대대는 세 중대가 가각 가현?방곡?자혜 쪽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나는 1중대 중대장이 자기 짐을 지고 따라 다니지 않으면 총살하겠다고 협박해 중대장 짐꾼으로 따라 나섰다.  가현?방곡?점촌을 차례로 훑어 내려온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차례로 부락 앞에 몰아세운 뒤 노인들에게는 아들의 소재를 물었고, 부녀자들에게는 남편의 소재를 물었다.  대부분 군대 갔다고 대답했지만 더러 산에 갔다고(빨치산이 되었다는 뜻)말한 주민도 있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마을 주민 전원을 총살했다.  가현과 점촌 주민은 내가 짐을 져준 1중대장이 직접 총살했고 방곡 주민은 2중대가 총살했다.  대부분 어린애 노인 부녀자들이었다.  방곡에서는 시체더미 속에서 세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울며 기어다니자 중대장이 정조준해 쏘아버렸다.  그 중대장은 옆에 따라다니는 나더러 ‘기분이 안좋아?’하고 물었지만 나는 죽음이 두려워‘좋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점촌까지 학살을 마쳤을 때 자혜리쪽 언덕에서 대대장(한동석인 듯)이 중대장을 불러올리더니 갑자기 죽도록 팼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중대장을 따라서 주리로 가니까 구덩이 두개가 파여 있었다.  군?경이 끌고 온 주민 수백명 중에서 군인?경찰 가족을 고르고 있었다. 구덩이 준변에는 기관총 2대, 포 2대가 놓여 있었는데, 사격이 시작되자 구덩이에서 옷가지와 살점들이 튀어 올라 근처 나뭇가지에 무수히 걸렸다.  그때가 해질 무렵이었다.  중대장은 그날 밤 부대 숙영지인 생초국민학교로 나를 데려간 뒤 쇠고기국과 주먹밥을 주었다.  그러나 비위가 상해 음식을 넘길 수 없었다.  거기서 3대대장이 어디론지 무전으로 보고했다. ‘가현 70, 방곡 1백 50, 점촌 35, 서주리 2백 공비 소탕 오버’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밤 귀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부대를 빠져나왔다.”

 최남철씨는 당시 중대장이 “나는 제주도 출신인데 가족이 빨갱이들한테 죽어 보복하러 왔다”라고 했던 말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3대대 병력은 2월9일 아침 생초국민학교를 출발해 거창 방면으로 향했다.  산악길 50여리를 행군해 2월9일 밤을 산속에서 숙영한 부대는 2월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부락에 들이닥쳤다.  세상에 잘 알려진 ‘거창양민 학살’의 시발인 청연 부락 학살에서 주민 70여명은 이날 뒷산에 끌려가 한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전원 죽음을 당했다.  이날 오후 부대는 다시 인근 와룡리?대현리 주민을 마을 앞 탄량 골짜기로 끌어내 1백여 명을 학살했다.  탄량골 학살 현장에서는 유일하게 임분임씨(여?85년 사망)가 살아남았다.

 탄량골 학살에 이어 3대대병력은 와룡리?과정리 일대주민 5백여 명을 면소재지에 있는 신원국민학교에 수용했다.  이들은 이튿날 아침 근처 박산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는 5백여 명 가운데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이 3명 있었는데, 신현덕 문홍준 정나달 씨이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신현덕씨(67?울산시 거주)의 증언을 들어본다.

 “군인들은 주민을 개머리판으로 떠밀어 산사태로 움푹 팬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언덕 위에 설치된 기관총이 주민을 향한 가운데 지휘관인 듯한 군인이 나를 포함해 6병을 손가락으로 불러냈다.  우리더러 솔가지를 쳐오라고 하고는 계곡 아래로 기관총을 난사해댔다.  우리는 군인이 시키는 대로 솔가지를 시체에 덮고 불을 질렀다.  그때 갑자기 총구가 우리 쪽을 향하더니 콩 볶듯 쏘았다.  다 죽고 문홍준씨와 나만 살았다.  군인들은 ‘지독하게  명이 질긴 놈들이구만’하면서 부대를 따라다니며 짐을 져 나르라고 명령했다.”

 신현덕씨는 부모형제를 몰살한 바로 그 3대대 병력을 따라다니며 포탄을 져 나르는 등 잡역부 노릇을 하다 도망쳐 나왔다. 

 당시 11사단 9연대 3대대는 대체 어떤 명목으로 이들 지역 주민을 몰살했던 것일까.  소백산맥 끄트머리에 자리한 작전대상 지역 산악은 당시 퇴로를 차단당한 빨치산들이 거점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승만 정부는 ‘공비 토벌’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이 일대에 배치해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양민 학살은 이런 상황에서 저질러진 사건으로 당시 3대대는 공비와 내통하는 ‘통비 분자’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작전을 폈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 행태는 본 목적과 동떨어진 채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했음이 낱낱이 드러난다.  2월8일 작전으로 학살된 산청?함양 주민의 경우 총 7백5명 중 10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6백여 명에 달했다.  7백19명이 학살된 거창군 신원면도 14세 미만 어린이가 3백59명, 60세 이상 노인이 59명으로 희생자의 75%가 어린이?노약자였다.


  당시의 작전과 관련해 11사단 9연대 3대대 9중대 2소대 2분대에 소속됐던 최임준씨(63)는 부대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작전 명령은 무조건적 상명하복이었다. 산청?함양?거창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장병들 의식 속에서 저질러졌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때 총살당한 사람들이 통비 분자였다고는 보지 않는다.  통비 분자는 간혹 쌀에 뉘 섞이듯 있었을 것이다.”

 한편 당시 헌병사령관이었던 최경록씨는 문제의 11사단 작전 지휘 능력에 대해 사단장의 품성과 연결시켜 증언했다.

 “11사단은 전과를 올리기 위해 여자를 겁탈하고 소를 다 잡아벅고 양민을 죽인 뒤 상부에 공비 소탕 숫자로 보고했다.  그때 최덕신의 11사단에는 이등병이 없었다.  전 사병이 1계급 특진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11사단장 최덕신은 이후 월북했으며 얼마 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어떻게 해서 거창만으로 축소된 채 세상에 알려져 온 것일까.  세 지역 학살 현장은 사건 후 한동안 군경의 삼엄한 통제로 외부인 출입이 일절 금지됐기 때문에 유족들의 입을 통해서만 엄청난 주민이 학살됐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던 51년 2월 하순께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당시 거창 출신 야당 국회의원 신중목씨에게 “당신의 지역구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에 한번 가보십시오”라는 내용의 익명 투서가 날아들었다.  신의원은 즉시 거창으로 달려가 거창경찰서 유봉순 사찰주임으로부터 신원면의 학살 사실을 전해듣고 3월29일 열린 제54회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를 폭로했다.  당시 군부는 신의원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돼 있었기 때문에 야당 지도자이던 신익희씨가 폭로를 적극 도왔다.  국회는 곧장 특위를 구성하고 4월6일 조사단을 거창 현지로 보냈다.  그러나 이에 당황한 계엄 민사부장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날 신원면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군 병력을 배치해 총격을 가했고, 결국 의원들은 조사를 포기한 채 되돌아와야 했다.  이때 미국의 <뉴욕 타임스>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여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을 집중 공격했다.

 

학살 주역, 사건 축소?조작자들 사회서‘떵떵’

 이승만 정부는 결국 미국 조야의 압력에 밀려 사건 발생 5개월이 지난 7월27일 야민 학살 사실을 거창군 신원면만으로 축소한 채 지휘관들을 법정에 세웠다.  당시 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열린 재판을 통해 재판부(재판장 강영훈 전 총리)는 거창 학살 최고 책임선으로 오익경 9연대장을, 국회조사단 방해 사건은 김종원 계엄민사부장 선에서 매듭지었다.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징역 10년이 당시 형량이었다.

 그러나 이 재판마저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재판 과정에서 거창 사건만이라도 학살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형량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은 1년후 줄줄이 특사로 풀려나와 다시 군에 복귀했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9연대장 오익경 대령은 출소 후 군에 복귀해 56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는 70년대초 미국으로 이민갔다.

 10년형을 선고받은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역시 군에 다시 들어가 9+사단 고급 부관, 수도사단 군수참모, 27사단 부연대장, 육군 첩보부대 교육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5?16후에는 강릉?원주 시장을 거쳐 보사부 행정서기관으로 영전했다.  현재 공직을 은퇴한 한동석씨는 안양시에 산다.  김종원 역시 자유당 시절에 경찰 총수까지 거치며 권력의 전면에서 활보하는 사망했다.


 결국 지금까지 ‘산청?함양?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미궁에 빠진 채 유족들의 가슴에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어온 것이다.  그날의 참상이 할퀴고 지나간 지 42년이 흐른 요즘 산천?함양?거창의 피해 부락들에서 상처를 묵묵히 쓰다듬으며 살아가는 유족이 많다.  그동안 겪었던 한과 눈물의 세월만큼 유족들은 무표정하다.  그들은 할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말문을 열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건 후 거창 지역 유족들은 그나마 거창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데 힘입어 54년 과정리에 합동 묘를 마련했다.  2월11일 박산골에서 희생된 5백여 명의 뼈를 추슬러 큰 것은 남자, 작은 것은 여자, 아주 작은 것은 어린아이 유골로 3등분해 보통 봉분보다 다섯배 가량 큰 묘 2개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2월10일 희생된 탄량골과 청연부락 뒷산 유해는 그대로 방치됐고 산청?함양 지역 피살자들 시신도 유족이 있는 사람만 경찰 입회 아래 개인 묘를 만드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철옹성 같아만 보이던 이승만 정권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학살당한 유족들의 피맺힌 한은 4?19혁명과 함께 분출되기 시작했다.  거창 지역 유족들은 4?19이후 20일이 지난 60년 5월11일 박영보 면장을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다.  박면장은 학살 사건 당시 시원국민학교에 끌려온 주민을 선별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살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에게 ‘네가 무슨 군경 가족이냐’며 떠밀어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기에 유족의 분노는 극에 달했던 터였다.  박면장이 사과를 거절하고 도망치자 흥분한 유족들은 박면장을 붙잡아 생화장시켜 버렸다.  이생화장 사건은 당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모았고, 그 배경에 양민 학살 사건이 있었음이 드러나자 진상 조사 물결이 국회에까지 번졌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쿠데타는 유족들의 염원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산청?함양 지역의 경우 당시 도의회 의원이던 민치재씨와 지곡부락 최병철씨가 유족대표로 피해상황을 국회에 진정했다 하여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당한 것이다.

 거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군정 당국은 박면장 생매장 사건과 유족회 결성을 문제 삼아 유족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합동 묘는 헌병들에 의해 산산이 파헤쳐졌다.  거창사건 유족들은 이후 피학살 양민을 ‘두번 학살한’군사 정권에 맞서 지난한 투생을 벌여왔다.  유족들은 3?5?6공화국으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 각 부처에 수십회에 걸친 진상 규명?명예 회복 요구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번번이 “이해는 가지만 볼순 세력이 군을 악선전할 소지가 있으므로 양해하기 바란다”는 내용뿐이었다.

 거창 유족들은 여소야대 정국이 전개되던 88년 국회 앞에 모여 연일 진상 규명?명예회복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당시 민주당거창 지역구 의원이던 김동영씨(91년 작고)발의로 평민?민주?공화당이 합의해‘특별입법’을 국회 법사위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역시 3당 합당으로 물거품이 된 후 오늘에 이르렀다.

 

“032는 알끼다.  통비 분자가 아니란 것을”

  산청?함양 유족들도 6공화국 들어 정부각 부처에 진상 규명?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91년 9월 국방부에서는 유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회신을 보냈다.  “11사단 9연대 3대대가 51년 2월7일부터 산청군 금서면 가현리 및 함양군 서주리에서 공비토벌 작전을 전개한 사실은 확인했으나 양민을 학살한 사실은 발견하지 못했다.” 국방부의 이 같은 회신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거창 사건을 저지른 바로 그 부대가 거창 작전 나흘 전에 산청?함양 지역에서부터 작전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학살 부대가 양민 학살 사실을 보고했을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산청?함양?거창양민 학살사건은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자료, 사건 현지 면사무소의 호적부, 생존자와 유족의 증언 등을 토대로 하나의 사건으로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산청?함양 유족들과 거창 유족들은 89년부터 해마다 한차례 합동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그들의 해묵은 요구 사항은 다음 네가지로 모아진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희생자?유족의 명예 회복, 위령재단 설립, 유족 보상.

 거창 피학살자 합동 묘역 앞에는 지금 이런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032는 알끼다.  통비 분자가 아니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