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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손보기 교수

“동몽골에서 발굴된 유적·유물들은 고구려 영토가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베이얼호 근처의 광대한 초원지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이번 유물들은 오는 10월께 연대가 밝혀지고, 그때쯤 사

成宇濟 기자 ㅣ 승인 1995.08.10(Thu) 00:00:00

동몽골에서 고구려 고분 벽화 고분이 발견되었다. 92년부터 10년 계획으로 해마다 진행해온 한·몽학술조사연구협회(총단장 손보기)의 동몽골 유적 발굴 작업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고분·벽화·기와·전돌 등 고구려의 다양한 유적·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동남쪽으로 7백여km 떨어진 수흐바타르 아이 막(도) 다리강가 솜(군)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조사 작업을 통해 지난해에는 성의 지반을 다진 흔적과 주춧돌, 적색 벽돌·기와, 적심석 등 10여 점의 유물·유적을 발굴한 바 있다. 지난 6월30일부터 시작된 올해 발굴 작업에서 발견한 벽화 조각의 적외선 촬영을 위해 잠시 귀국한 손보기 교수(단국대 한국민족학연구소 소장)는 “여러 유물 가운데 벽화가 가장 획기적”이라며 그 의미와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대륙연구소(회장 장덕진)의 재정 지원으로 진행되는 95년 발굴 작업에는 주채혁(강원대·몽골중세학) 김광수(서울대·고구려사) 한창균(단국대·고고학) 교수 등 한국 학자 18명과 몽골과학원 학자 18명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올해 발굴 조사는 8월4일에 일단락될 예정이다.

올해 발굴된 고분 벽화 고분은 어떤 것입니까?

발굴 지역의 남쪽 성터에서 발굴한 것입니다. 사방 각 9.5m와 그 중간의 통로 벽에 그려진 그림인데, 수없이 부서진 작은 조각들로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은 사방 각 32cm 크기의 네모 전돌로 천정을 덮고 있으며, 바닥에는 여섯모꼴 전돌이 깔려 있습니다. 발굴 부분은 여러 번 유구를 덧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 유적에서는 고구려척과 같은 치수의 천정돌·전돌이 나타납니다. 그림은 불에 타 모두 부서졌습니다. 이번에 찾은 것은 그 일부분입니다. 그림 조각은 13점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을 3~4개에서 7개까지 붙여 5~6개의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벽화는 고구려의 전형적 양식인 회칠 벽화 기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식 회칠벽 벽그림이 있는 무덤방과 층계를 이루는 회칠벽이 세워졌고, 고구려척에 맞는 전돌들이 여려 켜로 덮여 있어 이곳은 고구려와 깊은 관계를 갖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벽화를 그릴 때 뼈를 쪼아 석회를 만들던 주먹 크기의 물감판도 여러 개 찾았습니다.

올해 새로 발굴한 무덤들도 고구려 영토가 몽골에까지 펼쳐져 있었다는 데 확신을 주는 것이었습니까?

고구려 돌칸흙무덤 2기를 발굴했습니다. 1호 무덤은 돌과 흙으로 다진 벽으로 쌓은 무덤이고, 2호 무덤은 켜바위(세일암) 판잣돌을 쌓아올려 2m30cm 사방의 무덤방을 만들고 붉은 흙을 1m 깊이로 덮은 것이었습니다. 고구려 무덤의 특성은 무덤 둘레에 돌을 쌓고, 계단처럼 단을 쌓아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발굴된 무덤은 모두 고구려식이었습니다. 몽골 학자들도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몽골과학연구원 오치르 역사연구소장과 바이에르 교수는 `‘몽골에서는 유례가 없는 발견이다. 몽골의 고고학사와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라며 매우 기뻐했습니다.

벽화의 색깔과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색깔은 붉은색·흙색·검은색·연두색 등 다양합니다. 옷을 입은 사람의 모습과 손가락·발가락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그림도 있습니다. 옷은 고구려 고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번에 적외선 촬영을 하고 네 배로 확대해본 결과 손가락과 발가락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부처의 가부좌상 중에서 발 위에 놓인 손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번에 발굴한 고분과 벽화가 만들어진 연대는 언제쯤이라고 보십니까?

고구려의 어느 시기라고 추정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숯 등 측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여럿 있습니다. 함께 발굴된 기와로 보아서 고구려의 뒷 시기인 5~6세기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해 보아야지요.

새로 발굴된 무덤들은 평양이나 집안(集安)의 고구려 무덤들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집안에는 왕릉이 많고, 일반 무덤은 집안과 평양 일대의 대단히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습니다. 기둥을 2개 세워 무덤임을 표시하는 고구려의 일반 무덤 양식은 집안과 평양 주변은 물론 그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발굴한 무덤은 고구려의 전형적 양식인 돌각담무덤(돌칸흙무덤)으로 평양과 집안에 널리 분포해 있는 일반 무덤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왕릉은 아니고, 고구려의 장군과 연관된 무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덤에서 나온 유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호 무덤에서는 산화된 무쇠 유물들이 발굴되었습니다. 혁대 장식이나 칼자루로 보이는 것들인데, 모두 뒤엉켜 있어서 특수 처리를 해야 무엇인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2호 무덤의 겉에서는 청동 불상 한 점이 발굴되었는데, 이것 역시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또 이 지역 지질 조사를 통해 고구려 무덤의 언저리 돌로 사용된 석영암(차돌)이 하나 발굴되었습니다. 벽화가 발견된 남쪽 성터에서는 회벽·전돌·기와·물감판과 회벽을 만들기 위해 석회로 빻아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짐승 뼈, 부러진 목탁봉, 뼈로 만든 염주, 갓끈 장식, 청동불상, 원·명·청대의 기와들이 나왔습니다. 전돌은 앞뒤 돋을무늬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몇 종 있습니다. `‘숫막새 기와’의 무늬에는 고구려 귀면와 무늬(도깨비 얼굴)와 똑같은 것이 여러 점 나옵니다.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5~6세기 유물과 같은 것이지요. `‘암막새 기와’의 무늬에도 고구려 유적에서 나오는 것과 닮은 게 많습니다. 불상은 특수 처리를 하면 연대 측정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고구려 뒤의 것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 곳에서 원·명·청대의 유물이 함께 나오고 있는데, 그럴 만한 이 지역의 특수한 사정 같은 게 있습니까?

한때는 이곳이 절터였다고 합니다. 몽골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그 전에는 이곳에서 강성한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쌓고 농사도 지으며 문화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이곳은 몽골 초원과 만주, 중국 중원을 연결하는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습니다. 칭기즈칸이 이곳에 목장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면, 천만군도 다 훈련할 수 있다고 한 곳입니다. 명나라 황제가 각 부족에서 말 안 듣는 사람, 거센 사람들을 모아놓고 감시하던 목장이었고, 청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목장을 가지면 천하를 장악할 수 있다는 중요한 자리였지요.

그렇다면 고구려와 관련해 전해지는 몽골의 전설이 사실로 입증되는 것입니까?

처음 이 작업은 이 지역 사람들의 증언과 몽골의 고고·역사 학자인 페를레의 기록을 토대로 시작되었습니다. 페를레는 <몽골 고중세 성읍지 약사>(1961)라는 저서에서 다리강가 지역에 성터와 성벽이 있는데 고구려 성으로 추정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또 이 지역 노인들도 이곳에 고구려 무덤들과 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몽골 사람들은 우리를 사돈(친척)의 나라, 한 핏줄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설화도 우리 것과 비슷한 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전설과 기록, 몽골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우호적인 감정들이 속속 발굴되는 유적·유물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지요.

올해 발굴 작업이 끝나면 발굴 현장을 어떻게 할 예정입니까?

일단 파던 것을 덮고 와야지요. 그냥 놓아두면 무너질 수도 있고,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에는 얼어버릴 수도 있고, 지나가던 짐승이나 사람이 빠져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원래대로 복원해서 묻고 내년에 조사해야지요. 서울에 오는 대로 정리 작업에 들어갑니다. 10월께면 유물의 연대 같은 것들이 뚜렷해질 것이고 사진으로도 공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몽골에서 고구려 유적이 속속 발굴되고 있는데, 그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보십니까?

동몽골에서 발굴되는 유적·유물 들은 고구려 영토가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을 넘어 베이얼 호 근처의 광대한 초원지대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일찍이 단재 선생 같은 우리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영토가 그만큼 넓었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나 일제의 영향으로 왜식 사관이 들어온 다음 그 사관이 우리의 고정 관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과서도 그렇게 쓰이고. 실증이 나오지 않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실증이 나오면 거부할 수 없는 것이지요. 몽골 학자들도 다 인정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