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라고 살아야 한다
  • 이문재 취재부장 (moon@sisapress.com)
  • 승인 2005.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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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살은 무엇보다도 치욕적인 패배이자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죽어라고’ 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노작가는 단호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 노작가는 곡기를 끊었다. 그리고 외아들을 불러 유언을 받아적게 했다. ‘사회의 부담을 덜기 위해, 가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더는 연연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선의용군 마지막 분대장으로 널리 알려진 항일투사이며 옌볜의 원로 작가인 김학철씨의 마지막 모습은 결연했다.

김씨는 2001년 위내시경 검사를 받다가 식도가 파열되어 음식을 넘기지 못하게 되자, 병원 진료를 거부하고 20일 동안 단식하며 조선의용군 활동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항일 투쟁을 하던 때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관장을 했다. 노작가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고인이 외아들 김해양씨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부고를 내지 말라. 유체고별식과 추도회를 일절 하지 말라. 일절 부조금을 받지 말라.’ 2001년 9월25일, 김학철옹은 자신의 85년 생애를 저렇게 마감했다.

1분30초마다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하는 나라 한국

<오래된 미래>와 함께 생태·환경론의 한 상징으로 자리 잡은 <조화로운 삶>의 주인공 스콧 니어링의 죽음도 김학철옹과 흡사하다. 1883년 미국에서 태어나 반생을 투철한 ‘비주류’로 살던 그는 50세에 버몬트 주 척박한 땅으로 들어가 이후 50년 동안 근본적 생태주의를 실천했다. 100세가 되던 1983년, 스콧은 아내 헬렌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유언을 전했다. 스콧 역시 의사의 도움을 거부하고 단식을 통해 죽고 싶다고 밝혔다. 스콧은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라며 죽음이 자신을 호출하기 전에, 스스로 죽음 속으로 나아갔다.

옌볜의 노작가와 미국 생태론자의 특별한 죽음은 최근 한국 사회의 급격한 자살 증가 현상을 성찰할 수 있는 하나의 창(窓)을 제공한다. 두 사람의 죽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을 자살 범주에 넣는 시각은 거의 없다. 오히려 경건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 삶의 완성이라는 예찬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특별한 죽음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불교를 비롯한 종교 수행자들의 죽음은, 다비식과 같은 죽음의 형식 그 자체만으로도 세속적 인간으로 하여금 미망에 빠져 있는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한다.

최근 발표된 한국인의 자살 관련 보고서는 충격적이다. <생명 존중 및 자살에 대한 국민태도 조사>에 따르면, 연간 1만8천32명이 자살하고, 35만명이 자살을 시도한다. 48분마다 한 명이 자살하고, 1분30초마다 한 명이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2002년을 기준으로 할 때,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사망률 4위이고, 자살증가율은 1위이다. 위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16.8%(6백7만명)가 ‘지난 1년 중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연구보고서 <우리나라 자살의 경향과 특징>은 무직자의 자살률이 인구 10만명당 약 2백21명에 달해 일반 자살률보다 약 15배나 높고, 특히 25~44세의 자살이 전체 자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는다고 지적했다.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우울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울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사회적 스트레스다. 빈부 격차, 가족 해체, 교실 붕괴, 노령화, 환경 오염 등 사회가 한 개인에게 가하는 압박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양극화의 역기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사회적 스트레스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질병처럼 창궐하는 한국 사회의 자살 문제를 옌볜의 노작가와 미국의 생태론자가 실천한 ‘자발적 죽음’에 견주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 두 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깨달았고, 또 사회적 스트레스에 맞서 싸우며 그것을 성취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삶을 완전 연소시켰다. 그렇다면 자살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살은 무엇보다도 치욕적인 패배이자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치열하게 살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죽어라고’ 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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