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가 상당수 일본군가가 원곡”
  •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 승인 2005.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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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찬 교수 연구 논문에서 주장

 
‘이천만 동포야 일어나거라/일어나서 총을 메고 칼을 잡아라/잃었던 내 조국과 너의 자유를/원수의 손에서 피로 찾아라.’ 독립군가 <봉기가>의 1절 가사다. 나라를 빼앗긴 겨레에게 총궐기하라고 부르짖는 이 노래는 1910년대 만주와 러시아령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 즐겨 불렀다. 1980년대 대학가에 널리 퍼져 아직까지 친숙한 노래이기도 하다.

이 노래가 사실은 일본군가 <아무르(흑룡) 강에 흐르는 피(アム-ル川の流血や)>의 선율을 차용한 곡이라고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가 최근 밝혔다. 그는 지난 2월15일 한양대에서 열린 ‘일본의 발명과 근대’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논문 <일본 근대국민국가의 형성과 근대음악>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아무르 강에 흐르는 피>는 1901년 구리바야시 우이치가 작곡한 일본 군가다. 당시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남진을 꾀하던 러시아 사이에서 한반도의 명운이 흔들리던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한반도 침탈을 앞둔 일본군들이 러시아를 향한 적의를 불태우며 불렀던 노래가 독립군에 의해 이른바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형식으로 차용되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북한에서 지금까지 널리 불리고 있
 
는 혁명 가요 <메데가>(메이데이 노래)도 이 노래에서 선율을 딴 곡이다.

1910년대 젊은 독립군들이 불렀던 <소년군가>도 일본군가 <일본 해군>에서 멜로디를 땄다. 북한 사회과학원이 편찬한 <문학예술사전>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영광스러운 항일혁명투쟁 시기에 친히 지으신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조선인민혁명군> 역시 <일본 해군>의 선율 그대로다. 1904년 고야마 사쿠노스케가 작곡한 <일본 해군>은 일본 민요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곡인데, 당시 일본인들은 이 노래에 맞추어 군함의 이름을 외웠다고 전해진다.

일본군가에서 가락을 빌려온 독립군가(광복군가, 항일 군가, 북한의 혁명가요 포함)는 이밖에도 수십 곡에 달한다. 김좌진 장군이 작사해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독립군들이 널리 불렀던 <승리 행진곡>은 일본 군가 <군함 행진곡>에서 가사만 바꾼 노래다. <군함 행진곡>은 현재도 일본의 극우 세력이 집회에서 자주 부른다. 이 노래는 일본 파친코의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이고 있다.

중국 조선족에게 전해지는 항일 군가 <조국 생각>과 1920년대 임시정부 산하 북로군정서 소속 독립군이 불렀던 노래 <독립군은 거름>의 원곡은 일본군가 <전우>다. 일본군가 <적은 얼마나((敵は幾万)>와 <일본 해군>의 가락을 뒤섞어 독립군가 <소년행진가>와 <항일전선가>를 만든 경우도 있었다.

일본 노래를 차용한 사례는 독립군가 외에도 다양하다.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벽상의 괴종을 들어보시오’로 시작하는 창가 <학도가>는 국내 대중 가요나 동요의 효시로 알려지고 있지만, 실은 일본 창가 <철도찬가>의 멜로디에 가사만 새로 붙인 노래다. <철도찬가>는 찬송가 <성경목록가>의 원곡이기도 하다. 일제 시대에 널리 불린 창가 <권학가>와 현재까지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 <베드로와 안드레> <허사가> 역시 일본군가 <용감한 수병(勇敢なる水兵)>에서 선율을 따왔다.

“작곡 개념 없던 시기…표절로 보기 어렵다”


 
20세기 초반 조선인들에 의해 차용된 일본군가는 <일본 해군> <군함 행진곡> <아무르 강에 흐르는 피> <적은 얼마나> <전우> 등 10여 곡에 집중되어 있다. 대부분 청일전쟁과 노일전쟁 전후에 작곡된 당대의 ‘히트곡’들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자주 불리는 곡들이다. 이 노래들이 어떻게 국내에 전파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당시 한반도에 진주해 있던 일본 군악대가 집중적으로 연주하면
 
서 조선인들의 귀에 익숙해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당시는 만주 일대에 독립군 부대가 서서히 결집하던 시기여서 항일과 독립 메시지를 담은 군가풍 노래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면 당시 독립군은 왜 하필 일본군가를 차용해 독립군가를 만들었을까. 일본군가는 서양 국가의 군가에 비해 음역이 좁고 리듬이 반복되어 초보자라도 쉽게 익힐 수 있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다. 부르기 쉽게 ‘파’와 ‘시’를 뺀 오음계로 만들어진 곡이 대부분이었다. 민경찬 교수는 “이런 식으로 동양인의 눈높이에 맞게 1차 ‘번역’이 이루어진 일본군가의 선율이 서양 곡에 비해 가사 붙이기가 쉬웠다는 점도 일본군가가 집중적으로 차용된 이유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독립군가가 일본군가를 표절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민교수의 지적이다. 당시는 아직 서양 음악이나 작곡에 대한 관념이 없던 시기였고, 또 기존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은 동서고금에 흔히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독립군가가 일본군가를 차용했다고 독립군가의 정신까지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고 민교수는 강조했다.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차원에서 과거의 역사를 그대로 복원할 필요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북한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남한의 경우 대부분의 독립군가가 흔적만 남아 있지만, 북한에서는 여전히 ‘혁명가요’로 불리고 있다. 이 중 <조선인민혁명군> <모두 다 나서자> <모두 다 반일전으로> <반일가> <소년군가> <조국해방가> 등 여섯 곡은 ‘김일성 작곡’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여섯 곡 모두 일본군가 <일본 해군>의 선율을 조금씩 변형한 곡이라고 민교수는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는 항일 혁명가요를 민요와 함께 우리 민족 음악의 뿌리로까지 격상해 해석하고 있다. 이런 잘못은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민경찬 교수는 말했다.

독립군들은 일본군가보다 서양의 찬송가를 더 많이 독립군가로 차용해 불렀다. 그 다음이 일본군가였고, 이어 서양의 명곡들이 세 번째로 많이 차용되었다. 자기 이름을 밝히고 활동하기 힘들었던 시대적 환경 때문에 작가 미상의 곡이 많은 점도 독립군가의 또 다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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