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감독들의 ‘페르소나’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6.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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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키워드] 닮음꼴/<극장전>의 홍상수 감독과 배우 김상경씨

 
이전의 영화와 마찬가지로 홍상수 감독의 신작 <극장전>의 코드 역시 모방이다. ‘1부, 영화 속 이야기’와 ‘2부, 영화 밖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극장전>은 ‘현실을 모방한 영화’와 ‘영화를 모방한 현실’이 순환된다. 1부의 주인공이 한 행동을 2부의 주인공이 모방하는데, 1부 영화는 2부 주인공을 소재로 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순환적 구조를 갖게 된다.

<극장전>에서 홍감독은 현실의 사랑이 갖는 유치함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줌이라는 다소 유치한 촬영 기법을 활용했다. 쉴새없이 주인공 남녀의 모습을 줌 인으로 끌어당기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얼치기 영화학도의 졸업 작품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어수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경박한 줌인이 영화 전체에 유치한 정서를 증폭시켰다.

자기 복제를 통한 순환 구조는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 자주 이용하는 코드다. 보통 촬영에 들어가기 전 홍감독은 배우들과 술자리를 갖는다. 질펀한 술자리를 통해 배우의 내면을 세밀히 관찰한 뒤에 홍감독은 다음날 촬영장에서  실제 배우의 이미지를 재현한다. 결국 배우는 자기 자신을 모사한 주인공을 다시 모방해 연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과 김상경의 환상 결합

 
<극장전>이 갖는 모방의 알레고리가 더욱 재미있는 것은 김상경이라는 배우 때문이다. <생활의 발견>에 이어 두 번째로 홍감독과 호흡을 맞춘 김상경은 마치 홍감독이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헐렁한 옷매무새부터 듬성듬성한 수염까지 외모와 행동거지가 섬뜩할 정도로 홍감독을 닮았다. 칸 영화제에서 김상경을 인터뷰한 <카이에 뒤 시네마> 기자는 그를 홍상수의 페르소나라고 말하며 트뤼포 감독과 배우 장 피에르 레오에 비유하기도 했다.

무력한 인텔리이면서 이기적이고 불만에 가득찬 김상경의 캐릭터는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모두 응축한 것이었다. 백락을 만난 천리마처럼 자신의 진가를 알아본 홍감독 덕분에 김상경은 브라운관을 방황하던 조연급 탤런트에서 스크린을 주름 잡는 주연급 배우로 거듭났다.

스크린에서 배우가 영화적 화자가 되어 감독의 세계관을 드러내주는 다른 경우로는 김기덕 감독과 조재현을 들 수 있다. 조재현은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수취인 불명><섬><야생동물 보호구역><악어> 등에서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했다. 이들 영화에서 그는 모성이 결핍한 황량한 내면 세계를 가진 인물로 구원의 여신상을 거리의 창녀로 짓밟는 역을 수행했다. 

강우석 감독이 발견한 천리마는 설경구였다. 설경구를 만남으로써 마초 흥행 코드를 발견한 강감독은 <공공의 적><실미도><공공의 적2>에서 초절정 마초 내공을 보여주며 흥행 신화를 쌓았다. 이 영화들이 여성 캐릭터를 엑스트라 수준으로 전락시키고도 흥행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은 강감독이 설경구를 통해서 지배 권력에 대한 거친 불만을 쏟아내고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향해 냉소적인 수다를 쏟아내는 장 진 감독의 페르소나는 정재영과 신하균이었다. 정재영은 <아는 여자><킬러들의 수다><간첩 리철진><기막힌 사내들>에서, 신하균은 <박수칠 때 떠나라><킬러들의 수다><간첩 리철진><기막힌 사내들>에서 장감독과 작업했는데, 정재영은 냉소를, 신하균은 수다를 맡았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주먹이 운다>로 국제비평가협회상 류승완 감독은 친동생인 류승범이 아바타 역할을 해주고 있다. 둘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아라한 장풍대작전>에 이어 <주먹이 운다>에서도 함께 했다. 류감독이 보여주려 한 뒷골목 양아치의 피폐한 정신세계와 무력한 일상을 류승완은 완벽하게 구현해 주었다.  

영화적 화자로 여성을 선호하는 감독도 있어

임상수 감독은 특이하게 영화적 화자를 여성으로 두는 감독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는 각기 다른 성관념을 가진 노처녀를, <눈물>에서는 가출 여고생을,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절대 권력자와 딸의 매춘을 주선한 어머니를 영화적 화자로 내세움으로써 가부장적 사회를 질타했다. 

이재용 감독 역시 여성을 페르소나로 활용하는 감독이다. 이 감독의 페르소나는 이미숙이었다. <정사>와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 이미숙은 이감독의 도발적인 성의식과 탐미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분출구가 되어 주었다. 박흥식 감독과 전도현의 궁합도 이재용 감독과 이미숙의 궁합에 버금간다. 둘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와 <인어공주>에서 사랑에 빠진 여성의 심리를 세밀하게 그려냈다. 

여성 감독과 여배우의 경우는 천리마 배우와 백락 감독이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킨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여성 감독들의 장편 영화가 많지 않기 때문인데,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임순례 감독과 오지혜,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과 배두나, <질투는 나의 힘>의 박찬옥 감독과 배종옥 정도를 꼽을 수 있는 정도다. 

드라마에서는 여성 작가와 여성 연기자의 닮음꼴 선명해

오히려 드라마에서 여성 창작자와 여성 출연자의 닮음꼴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대부분의 드라마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김수현 작가와 김희애다. 주로 며느리의 애환을 중심으로 결혼과 이혼에 얽힌 가족 이야기를 풀어가는 김수현 작가는 <완전한 사랑>에 이어 <부모님전상서>에서 김희애와 호흡을 맞추며 시청자로 하여금 채널을 고정시키게 했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의 노희경 작가와 배종옥의 만남 역시 창작자가 배우와 찰떡 궁합을 빚어낸 대표적인 사례다.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배종옥은 무책임한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어머니의 불운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네 멋대로 해라><아일랜드>에서 연거푸 호흡을 맞춘 인정옥 작가와 이나영도 연기자가 창작자의 아바타가 된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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