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혼맥의 LG가 '허브'
  • 신호철 기자 (eco@sisapress.com)
  • 승인 2005.06.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사저널>이 사회 연결망 이론을 응용해 38대 재벌과 88개 유력 가문, 그리고 88개 가문에 속한 가족 3백61명을 대상으로 '재벌 혼맥'을 분석했다.

 
“두 집안이 서로 20년 지기였다. 그러다보니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고 결혼에 이른 것이다.” 로열 패밀리의 결합. 구자철 (주)한성 회장과 박용만 두산그룹 부회장이 사돈을 맺게 된 이유에 대해 (주)한성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오는 6월 박용만 부회장의 장남 박서원씨와 구자철 회장의 딸 구원희씨가 결혼한다. 신랑 신부 집안의 면면은 화려하다. 박용만 부회장은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의 동생이고, 구자철 회장은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동생이며 범 LG그룹의 재벌 3세에 해당한다.  LS그룹은 최근 LG그룹에서 분리해 이름을 새로 지었지만 여전히 LG 가문과 밀접한 관계이다.

 
신랑 신부가 아직 결혼 날짜를 잡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룹 관계자는 “일가 친척들에게 허락 받는 인사를 드리고 있는 중인데 일가 친척이 너무 많아 시간이 걸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유력 재벌 LS와 두산의 결합은 한국 재벌 혼맥도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동안 한국 재벌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있다는 사실은 언론이 여러 차례 보도했다. 2004년 1월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MBC가 공동으로 한국 재벌 혼맥 관계를 조사해 그림으로 그려낸 적이 있다. 

<시사저널>은 최근 사회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사회연결망(네트워크) 이론을 도입해 재벌 혼맥을 계량적으로 분석했다. 막연하게 ‘복잡하다’고 알려진 한국 재벌들 간의 혼맥을 수치화하기 위해서다. 사회연결망 이론은 집단 구성원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놓고 컴퓨터를 이용해 구조를 분석하는 학문이다. 장덕진 교수(서울대·사회학과)와 정하웅 교수(한국과학기술원·물리학과) 등에게 자문해 조사를 진행했다.

먼저 공정거래위원회가 2005년 발표한 한국 대기업 집단 55개 가운데 공기업 등을 제외한 38개 재벌을 뽑고 이를 중심으로 서로 친척·혼인 관계가 있는 88개 가문 3백61명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다섯 가지 흥미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1. 재벌 혼맥의 중심은 LG다 : 사회연결망 이론은 네트워크의 허브(중심)를 찾아내는 데 유용하다. 분석 결과 한국의 재벌 집단 3백61명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구재서씨(사망)였다. 구재서씨는 LG그룹을 창업한 구인회씨의 아버지다. 정작 본인은 LG그룹 창업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구재서씨가 구인회·구두회·구태회·구철회 등 LG 창업 형제들을 연결하는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LG그룹 관계자는 “우리보다 삼성그룹이 더 혼맥이 복잡할 텐데”라며 분석 결과에 대해 의아해 했다. LG그룹은 어떤 분석 도구를 쓰더라도 혼맥의 중심에 있었다. 88개 유력 가문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에서도 LG의 구씨 가문이 최중심이었다.
한신갑 교수(일리노이 주립대학·사회학과)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한교수 역시 사회연결망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 재벌 혼맥을 분석하고 있다. 한교수는 “어떻게 모집단을 잡든, 어떻게 허브를 정의하든 LG그룹이 혼맥의 허브다”라고 말했다.

한신갑 교수는 “비록 LG가 허브이기는 하지만, LG가 재벌 전체를 움직일 정도의 영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LG 가문이 창업주 이래 자손이 많고, 주로 재계 인사들과 사돈을 맺었다는 뜻이다”라고 해석했다. LG그룹 구씨 가문이 GS그룹 허씨 가문과 겹사돈 관계라는 점도 중요한 요소다. LG그룹은 두산그룹·한진·현대·대림·경방·희성 그룹과도 사돈 관계다.

 
LG그룹 구씨 일가 다음으로 네트워크의 중심에 있는 가문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가문이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동아일보·대상 그룹과 사돈이며, CJ·신세계·새한·한솔 그룹과는 형제·조카 관계이다. 38대 재벌 오너를 기준으로 한 ‘중심 찾기’ 분석에서는 LS그룹 구자홍 회장이 등장했다. LS그룹과 두산그룹의 결혼을 기정 사실화하고 분석한 결과다.

20대 재벌 가운데 가장 혼맥 근친도가 낮은 재벌은 한화그룹이었다. 재계 순위 8위인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일가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제외하면 딱히 다른 기업과 인연이 없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가족이 많지 않은 데다 3세들이 어리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2. 기업의 세와 혼맥은 비례한다 : 공정거래위가 발표한 대기업 집단의 자산 총액과 그 대기업 집단 오너가 맺고 있는 혼맥의 근친도를 분석한 결과 대기업일수록 혼맥이 복잡한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삼성·LG·현대 같은 굴지의 대기업일수록 혼맥이 복잡한 반면, 혼맥이 없는 재벌 기업은 모두 자산 총액 3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장덕진 교수(서울대·사회학과)는 “혼맥이 복잡해서 기업 규모가 커졌다기보다는 기업이 번창하다 보니 주변 재벌과 결혼도 쉽게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3. 가장 혼맥이 좋은 언론사는 중앙일보 : 한국 재벌과 연결된 유력 인사들 중에는 정치인 못지 않게 언론사 오너들도 많았다. 이들은 서로서로 재벌을 연결해 주는 다리 구실도 한다.

가장 화려한 혼맥을 가진 언론 가문은 중앙일보 홍씨 일가다. 중앙일보 최대 주주인 홍석현 주미대사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처남이다. 홍씨 가문은 홍대사의 동생인 홍석조 광주고검장을 통해 태광그룹과 한일그룹과도 연결이 된다. 홍씨 집안은 재벌이 포함된 88대 가문 혼맥 순위에서도 4위를 차지했다. 두 번째로 혼맥이 좋은 언론사는 동아일보로 나타났다. 얼마 전까지 동아일보를 이끌었던 김병관 고려대 이사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사돈이다.

 
4. ‘정치인 사돈’은 없다. : 정치인 가문은 재벌들로부터 점차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한국 재벌 혼맥과 연결되어 있는 전·현직 유력 정치인들의 혼맥 근친도를 조사한 결과 1위부터 13위까지가 모두 전직 정치인들이었다(표 참조). 현직 정치인 가운데 재벌 혼맥과 연결된 사람은 박근혜 한나라당 총재와 이명박 서울시장 두 사람뿐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정치인과 사돈을 맺은 재벌이 없었다. 참여사회연구소 재벌연구팀 김진방 교수(인하대)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재벌들은 여당 정치인· 장관 집안과 사돈을 맺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재벌 가문끼리만 결혼하는 경우가 많아져, 혼맥의 폭이 더 좁아졌다”라고 말했다.

5. 한국 재벌들은 평균 13촌 사이? :  88개 가문에 속한 3백61명은 평균 13단계 만에 친척 관계가 된다. 여기서 ‘단계’란 사회학에서 친족을 연구할 때 쓰는 용어로, 부자 관계·부부 관계를 기본 단위(1단계)로 둔다. 형제 관계는 2단계, 사돈 사이는 3단계가 된다. 13단계라면 직계 촌수로는 13촌이거나 4명의 사돈을 거쳐야 만나는 관계다.
공정거래위 선정 55대 대기업 집단 가운데 재벌 혼맥과 아무런 연결이 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전력공사와 같은 공기업을 빼면 동양·세아그룹·부영·영풍·이랜드·STX·대성· 하이트맥주 정도다.

인하대 김진방 교수는 “최근 재벌 간의 결혼 사례를 보면 부모가 강제로 중매를 서기보다는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6월 중 사돈을 맺는 두산그룹 가문과 LS그룹 가문은 사업적으로도 관계가 깊다. (주)한성은 2003년 네오플렉스 컨소시엄에 인수되었다. 네오플렉스는 두산그룹의 합병·매수 전문 회사이며, 구자철 회장이 세운 세일산업은 네오플렉스 컨소시엄의 지분 74.42%를 가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