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들이 먹는 라면
  • 성석제(소설가) ()
  • 승인 2005.07.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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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음식 정담] 김치를 누가 가져다 주느냐에 따라 라면의 격이 달라진다

 
나이 드신 분들 중에 라면을 좋아하는 분은 별로 본 적이 없다. 내게 나이 드신 분들은 내 아버지(1932년생)를 가운데 두고 전후 십년 사이의 분들을 말한다. 그보다 더 나이드신 분들은 라면과 나이를 연관시킬 이유가 별로 없고 십년 아래부터는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쉽게 말해 1922년 생부터 1942년 생까지의 사람들은 라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라면이 ‘뽀시락뽀시락’인지 ‘빠글뽀글’인지 모르지만 첫 울음을 울어제낀 때가 1963년이니 1922년생 분들은 장년의 나이에 라면이라는 걸 보았을 것이고 1942년생 분들은 스무 살이 넘어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무렵 라면과 마주쳤을 것이다. 어떻든 라면은 제대로 된 음식은 아니라는 게 이 분들의 공통된 의식인 것 같다.  

3년 전, 바로 이런 분들 중 세 분을 모시고 지리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1920년대 생 한 분, 1930년대 생 두 분, 그리고 1960년 생으로 첫 번째 국산 라면보다 세 살밖에 많지 않은 내가 지리산에서 마지막으로 들렀던 곳은 하동군 악양면이라는, 지리산 남쪽의 강가 마을이었다. 워낙 잠이 없는 분들이다 보니, 아니 전날 워낙 일찍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인지 새벽 다섯 시 반에 두 분이 숙소 바로 위에 있는 쌍계사를 다녀왔고 일곱 시가 되기도 전 출발해서 아무리 천천히 달렸다고 해도 악양면을 지나갈 무렵 시각은 여덟 시가 되지 않았다. 아침을 먹지 못한 것은 그 시각에 문을 연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전기사가 “바로 여기가 박경리 선생의 소설 <토지>의 무대”라고 말하자마자 어르신들이 “보고 가자”고 외쳤다. 기사는 급히 운전대를 틀어 왼쪽의 길을 따라 올라갔고 표지판을 보고 왼편 산 쪽으로 꺾어서 언덕받이에 있는 마을로 올라갔다. 마을 맨 위쪽에 웅장한 축대가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거대한 ‘최참판 댁’이 재현되어 있었는데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문이 잠겨 있었다. 담을 따라 돌아보았지만 개구멍 하나 없어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미련 없이 사람 사는 마을이 훨씬 더 예쁠 것 같다고 어르신들은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세 분 중 두 분은 머리카락이 희었고 얼굴은 대추처럼 붉어서 옛날이라면 막 지리산에서 아침 먹으려고 내려온 신선이라고 우겨도 될 분위기였다. 기사가 신선들의 승용수단인 호랑이처럼 생기지 않았고 호랑이 띠도 아니었으며 또 한 분의 여신선은 핸드백을 들고 계셨지만. 어느 개집 앞에서 잘 생긴 개를 보고 입맛을 다시던 기사는 신선들이 줄을 지어 마을 가운데 있는 가게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황급히 뒤를 따랐다.

그 가게는 보기보다는 달리 현대화되어 있었고 물건들도 도시의 슈퍼마켓처럼 말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거기다 햇빛 가리개나 등긁개, 수건 따위의 관광지 상품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신선들의 눈을 반짝이게 한 것은 동녘에 떠오른 해가 보이는 창가의 취사시설이었다.

 
“여기서 음식도 합니까?”
신선들을 대신해서 운전기사가 묻자 40대 후반쯤 돼보이는 주인 여자가 음식까지는 아니고 간단한 술안주로 묵이나 전 같은 걸 팔긴 하는데 지금은 준비가 안 된다고 대답했다. 신선들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감돌았다.
“집에서 드시는 걸 그냥 먹을 수는 없을까요?”
미국에서 온 두 신선은 전날 묵은 민박집이 구미의 여행지에 흔한 B&B(Bed & Breakfast; 아침을 제공하는 작은 호텔)인 줄 알았다가 아니란 게 밝혀지면서 몹시 실망했더랬는데 기사는 이 두 분을 의식해서 그런 질문을 한 것이었다. 주인 여자는 당연히 안 된다고 대답하면서 다른 제안을 했다.
“컵라면이라도 드실랍니꺼?”

기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십여 분 떨어진 하동으로 가서 일찍 문을 연 재첩국 음식점을 찾아야겠다고 기사는 생각했다. 그런데 신선 중 한 분이 컵라면은 몰라도 끓인 라면은 괜찮을 것 같다고, 미국에서 온 두 신선의 생각을 물었다. 두 신선은 집에서는 일요일에 가끔 라면을 먹는다면서 흔쾌히 동의했다. 라면으로 아침이 결정되자 기사는 설거지통에 쌓인 그릇이며 파리가 신선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가리면서 밖으로 나가 가게 위쪽에 있는 야외탁자로 안내했다.

기사가 물을 가지러 가게로 다시 돌아갔다. 설거지를 하지 않은 탓에 컵을 하나하나 씻어야 했다. 젓가락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기사는 나무젓가락을 말도 하지 않고 챙겨들었다. 그리고 라면 그릇은 플라스틱 말고 가능하면 사기그릇으로, 좀 깨끗하게 씻어서 뻘건 고춧가루 같은 게 묻어 있지 않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주인 여자는 꼭두새벽부터 시골 동네 가게에 와서 웬 깔끔을 떠느냐는 식으로 눈에 힘을 주긴 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사는 믿을 수가 없어서 직접 쟁반을 확인했고 행주를 가져가서 탁자도 닦았다. 이윽고 라면이 날라져 왔다.

5월에 막 접어들었지만 아침 날씨는 쌀쌀했다. 공기는 신선했고 해는 개운한 빛을 사방에 뿌렸다. 삽상한 바람이 불어와 두 신선들의 학발이 마구 흩날렸다. 라면 그릇에서 나오는 김도 풀풀 날렸다. 라면은 약간 덜 익은 듯했다. 그래도 지리산 밑에서 신선들과 먹는 라면 맛은 기가 막혔다. 한 젓가락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한 젓가락 먹고 지리산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젓가락 먹고 최참판 댁 쳐다보고 하는데 아래편 가게에서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두셋 쯤 되었을까. 분홍빛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오는 음전한 자태의 처녀는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뭔가 배달하고 오라고 내려 보낸 선녀 같았다. 실상은 올라오고 있으니 선녀의 어머니가 가라고 한 것이거나 선녀가 자발적으로 온 것이겠지만. 곱게 화장한 선녀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건 얌전하게 썬 깍두기 김치, 그리고 종이컵에 담긴 커피였다. 처녀는 하동 읍내로 출근하러 가는 길인 듯, 쟁반을 건네주고서 버스가 오는 길로 내려갔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온 동네에 울리며.

신선이고 사람이고 기사고 간에 남정네들은 모두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처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긴 한숨을 내쉰 한 신선이 말했다.
어떤 음식이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천상의 음식이 될 수 있다. 어떤 음식은 먹는 사람에 따라 맛과 격이 결정된다. 라면도 예외는 아니라고.

기사는 라면은 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맛이 확 달라진다, 그 김치를 누가 가져다 주느냐에 따라서 격이 결정된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아직 못했다.
“아무 버스나 타고 가다가 종점에서 내리지. 그 종점 주변을 슬슬 걸어다니다 보면 배가 고파질 때가 있어. 종점 근처 구멍가게에 가서 라면을 끓여달래서 먹어보믄, 그게 배가 출출할 때에는 어느 궁궐의 진수성찬 부럽지 않어. 그것 때문에 라면을 가끔 먹지.”
한 신선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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