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공동 창작’에 ‘꾼’들이 뭉쳤다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5.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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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아시아 크리에이터스 미팅에서, 각국 예술가들 의기투합…‘아시아니제이션’ 불 지펴
 
불과 얼마 전까지 아시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소중화주의’였다. 중국 문화를 절대 기준으로 보고 비중화권 문화에 대해서는 오랑캐 문화로 매도하는 중화주의의 도그마에 우리는 수 세기 동안 갇혀있었다. 우리에게 아시아는 곧 중국이었다. 그 이외의 것은 가치가 없었다.

다른 하나는 ‘탈아론’이었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을 본받아 산업화에 성공한 우리 역시 서양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를 ‘명예 백인’으로 규정하고 ‘일본은 아시아에 속하지만 아시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했던 일본처럼 우리 역시 아시아를 벗어나려 애썼다. 아시아는 우리의 어두운 과거로 이해될 뿐이었다.  

한류를 통해 아시아 대중 문화의 주도권을 확보한 요즘 새롭게 대두하는 문화 담론은 바로 아시아니제이션이다. 이 개념은 한때 일본 대중 문화가 아시아에서 전성기를 구가할 때 이와부치 고이치 등 일본의 문화연구가들이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를 일종의 ‘확장된 일본’으로 보았던 이 개념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시아니제이션을 새로운 화두로 삼고 있는 곳은 한류 두뇌집단인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이사장 신현택)이다. 아시아문화산업교류재단은 한류를 바탕으로 형성된 아시아 문화 블록의 방향을 아시아니제이션, 즉 아시아인이 서로 소통하는 문화 실크로드를 구축하는 것으로 삼고 있다. 이 실크로드에서 한국이 문화 허브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달에서 소통으로’ 한류와 한 맥락

 

많은 대중예술가들이 아시아를 자신의 예술적 원천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재일동포 음악가 양방언, 가수 강산에·이상은 등은 아시아의 다양한 민속 음악을 자신의 음악적 원천으로 삼고 있다. 특히 강산에는 2003년 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음악 여행을 하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그는 100여일간 여행하면서 만난 아시아의 음악 친구를 초청해 콘서트를 여는 것으로 자신의 음악 여행을 마무리했다. 

‘우리’라는 개념을 아시아로 확장하고 있는 것은 대중예술가들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로 유명한 MBC 라디오의 최상일 PD 역시 이제 아시아로 시야를 넓혀 ‘아시아의 소리를 찾아서’ 아시아 곳곳을 누비며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있다. 최PD는 최근 아시아 민속 사진을 주로 촬영하는 사진가 김수남씨와 함께 ‘빛과 소리의 아시아’전을 열기도 했다. 

아시아 예술가 가운데 아시아니제이션에 가장 열심인 사람은 중국계 첼리스트 요요마다. 컬럼비아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한 그는 ‘실크로드 앙상블’을 꾸려 아시아 민속 음악을 집대성하고 있다. 최근 그는 일본 NHK ‘신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실크로드 음악을 재정리했다.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인디 예술가들도 아시아니제이션이라는 화두에 화답하고 있다. 인디 예술가들이 아시아와 소통하기 시작한 것은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2002년 아시아 인디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부터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주관한 서울프린지네트워크는 아시아 인디 예술가들을 불러 국내 인디 예술가들과 만남을 주선했다. 

서울프린지네트워크는 한편으로 홍콩프린지페스티벌 등 아시아의 다른 인디 예술제와 교류하며 국내 인디 예술가들이 아시아 인디 예술가들과 공동 작업을 벌일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극단 은빛창고) 홍콩(극단 PIF) 일본(극단 AN)이 함께 제작한 연극 <세 자매>의 제작 프로젝트였다. 서울프린지네트워크, 홍콩프린지클럽, 일본 아고라시어터가 함께 한 이 작품은 공연 예술 교류의 새로운 모형을 제시했다.   

2003년 서울프린지네트워크는 아시아 각국의 인디 예술단체와 5년에 걸친 문화 교류 대장정을 시작했다. 바로 ‘리틀아시아 크리에이터스 미팅’(리틀아시아)이다. 2003년 홍콩프린지페스티벌에서 처음 시동을 건 리틀아시아는 아시아 인디 예술가들의 공동 창작 프로젝트로, 2007년 완성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리틀아시아의 모태가 되었던 것은 1997년 홍콩아트센터와 타이완 댄스포럼, 일본 타이니 앨리스가 함께 조직한 리틀아시아네트워크이다. 각국의 연극과 무용 교류를 목적으로 조직된 이 네트워크에는 2000년 호주가 참가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문화 창구 구실을 했다. 리틀아시아네트워크의 발전적 대안으로 재구성된 것이 바로 리틀아시아 크리에이터스 미팅이다.

2004년 타이베이 아티스트 빌리지에서 2차 워크숍을 가졌던 리틀아시아는 올해 공동 창작을 위해 한국에 둥지를 틀었다. 올해 작품을 구체화해서 내년에 싱가포르에서 창작을 마치고 2007년에 타이완 무대를 시작으로 아시아 투어 공연을 올린다는 것이 리틀아시아의 구상이다.    

기획자·배우·애니매이션 작가 등 총출동

<동방의 햄릿>으로 아비뇽페스티벌 등 여러 해외 공연 예술제에서 호평을 받았던 극단 노뜰이 작품 제작의 키를 잡았다. 리틀아시아는 원활한 작품 제작을 위해서는 제작을 총괄하는 하우스 프로덕션이 필요하다고 보고 다양한 해외 공연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감각을 키운 극단 노뜰을 선정했다. 노뜰 단원 5명이 해외 공연자들과 함께 공동 워크숍에 참여했다.  

 
원주에서 발원한 극단 노뜰은 강원도 원주시 인근의 폐교를 개조한 후용공연예술센터에 둥지를 틀고 있다. 지난 7월31일 이들의 둥지에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 각국의 예술가와 호주의 예술가가 찾아들었다. 이들은 10박11일 동안 합숙하며 창작 워크숍을 진행한 후 서울에서 5박6일 동안 아시아 각국의 공동기획자를 만나 공동 워크숍을 갖는다. 아시아의 문화적 소통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2박3일 동안 이들의 창작 워크숍에 동참했다. 

참가자들 중에서는 호주의 토니 얍이 특히 눈에 띄었다. 말레이시아 출신인 그는 호주 아시아링크 재단의 지원으로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호주는 백호주의를 포기한 이후 아시아에 적극 구애를 펴고 있다. 아시아 아티스트와의 교류에도 적극 나서고 있는데, 아시아링크는 그런 교류 활동을 돕는 기관이다. 참가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토니 얍은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예술가들을 이끌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싱가포르인인 자이 쿠닝은 공동 창작을 위한 밑그림을 그려 왔다. 그는 빈탄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미아가 된 원주민 오랑라우족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어왔다. 수상 가옥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오랑라우족은 삶의 터전을 잃었고, 그들의 건강한 삶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자이는 원래 인도네시아 샤먼의 후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부드러운 음악으로 귀신을 달래 멀리 보내는 마을의 무당이었다. 그는 오랑라우족의 쪼그려 앉은 자세를 따라 해보며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자세가 지겨워질 무렵 가장 편안한 자세를 취하라고 주문했다.

홍콩 출신인 앤디 엔지는 자이의 자세를 풀고 격렬한 움직임으로 오랑라우족의 격정을 형상화했다. 앤디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드라마 작가였던 그는 평론가로 시작해 공연 연출가로 변신하고, 다시 연출가에서 배우로 거듭났다. 마흔 나이에 학교에 다시 들어가 중국 전통극을 공부하기도 했다.

 
캐리 오·위 후안 푸·투 웨이·첸 춘 밍 등의 타이완 아티스트들은 음악 등을 통해 창작을 도왔다. 비디오아트·설치미술·퍼포먼스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작품 창작을 돕는 것과 별개로 같은 주제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들은 매번 연습에 함께 동참하며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인디애니메이션 작가인 홍콩의 스텔라 소는 프로젝트 성사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예정이다. 스텔라는 그동안 사라져가는 홍콩의 변두리를 애니메이션 화면에 옮겨왔다. 그녀는 “이곳은 ‘겪어 보지 않은 고향’ 같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를 그린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와 나의 작업은 연속성을 갖는다”라고 말했다.

첫날 새벽 마을의 닭이 울 때까지 함께 술잔을 기울였던 이들은 다음 날 밤에는 서로의 작품을 담은 영상물을 감상하느라 또 밤을 지새웠다. 국제 행사에 무시로 초청되는 아티스트들이어서 그런지 작품 수준이 모두 수준급이었다. 합숙 나흘째는 여름 천렵을 위해 모인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서구 아티스트와 공동 작업을 많이 진행했던 자이 쿠닝은 이번 작업이 특히 애착이 간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서양 아티스트들과의 공동작업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들의 논리와 나의 감성은 영원한 평행선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접점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노뜰 단원인 김대건씨는 “여기 아티스트들은 이성의 논리에 기대지 않는다. 직관에 의지한다. 그래서 통한다”라고 말했다.

이들이 소통하는 언어는 몸의 언어였다. 앤디 엔지는 “몸은 또 하나의 언어다. 머리로 이해하는 세상은 다를 수 있지만 몸으로 이해하는 세상은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노뜰 단원인 이재은씨는 “아시아적인 감수성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오랑라우족은 우리와 멀지만 그들의 몸짓을 따라 함으로써 공감할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우리를 바라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연륜이 풍부한 아시아의 예술가들과 함께한 공동 창작 작업은 특히 한국의 참가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연출가 홍은지씨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한 아티스트가 나보고 왜 연출만 하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 그들을 보고 내 길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워크숍을 주관한 극단 노뜰의 대표는 한국 공연예술계에 이런 공동 워크숍 기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아쉬워했다. “아시아에 나가면 한국은 ‘왕따’다. 화교문화권과 말레이문화권을 중심으로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자본력을 바탕으로 이들과 교류하고 있다. 한국도 이런 기회를 더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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