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프, 신화는 계속된다
  • 정제원 (중앙일보 기자) ()
  • 승인 2005.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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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화·배경은·제인 박·박인비 등 ‘제2 박세리’ 즐비
 

박세리(28)의 흰 발을 기억하는지.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1998년, 미국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 마지막 날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위기를 탈출했던 그 장면 말이다.
박세리의 우승은 전국민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이뿐인가. 제2, 제3의 박세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골프를 시작한 꿈나무가 적지 않았다. US오픈에서 우승한 김주연(24),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정상에 오른 장 정(25)은 세리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드러내놓고 말한다.
이들뿐만 아니라 제2의 박세리 신화를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간 꿈나무도 많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재미 동포의 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미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주니어 골프대회 때마다 김·최·박·이 씨 성을 가진 2세들이 리더보드 상단을 휩쓰는 것은 다반사다. 

이선화(19)와 배경은(20)은 대표적인 차세대 기대주다. 두 선수 모두 박세리와 같은 CJ 소속이다. 2003년 말 미국으로 건너가 지난해부터 LPGA 2부 투어인 퓨처스 투어에서 나란히 뛰고 있다. 아마추어 시절 8승을 거두며 일찌감치 재목으로 인정받은 이선화는 국내 투어에서 활약할 때부터 ‘최연소’ 기록을 잇달아 갈아치웠다. 우선 역대 최연소(만 14세 2개월)로 프로에 데뷔했다. 2000년 4월이었다. 데뷔 이듬해인 2001년에는 MC스퀘어 골프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해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 3개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최연소 우승 기록도 세웠다. 퓨처스 투어에서 2년째를 맞는 이선화는 현재 2부 투어 상금 랭킹 1위(4만6천2백21 달러)를 달리고 있다. 퓨처스 투어에서 상금 랭킹 5위 안에 들면 1부 투어 전경기 출전권(풀시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내년에는 1부 투어에서 활약할 전망이다. 165㎝의 다부진 체격에 정교한 아이언샷이 강점이다. 드라이브샷 평균 거리는 230야드 내외로 조금 짧은 편이지만 침착한 성격에 기복 없는 플레이가 돋보인다.

배경은 역시 내년 시즌 1부 투어에서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171㎝ 69㎏의 당당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장타가 돋보인다. 드라이브샷 거리가 260야드를 넘나든다. 승부 근성이 뛰어나고 무서운 몰아치기가 강점이다. 어린 나이에도 독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냉정하다.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한 것이 약점으로 꼽히지만, 올해 퓨처스 투어에서는 2승을 거두며 상금 랭킹 3위(4만4천2백70 달러)를 달리고 있다. 이선화와 함께 나란히 1부 투어에 진입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평가다.

재미동포 제인 박(19·미국 캘리포니아 주 랜초 쿠카몽가 고교)은 국내보다는 미국에서 더 알려진 아마추어 선수다. 지난해 8월 US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눈길을 끌었다. 한국 출신으로 이 대회에서 우승한 것은 펄 신·박지은에 이어 세 번째. 키가 165㎝로 크지 않은 편이지만 드라이브샷 거리가 260야드나 된다. “가장 자신 있는 샷은 퍼트다”라고 말한다. UCLA 대학에 골프 장학생으로 입학할 예정이다.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LPA투어 CJ나인브리지 클래식에서는 초청 선수로 출전해 18위를 차지했다.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난 제인 박은 1998년 골프 클럽을 처음 잡았다. 아버지를 따라 골프연습장에 갔다가 골프에 입문했다. “4번 아이언을 처음 잡았는데 150야드를 가볍게 날리더라고요. 눈이 번쩍 뜨였지요.” 아버지 박병옥씨(56)의 말이다. 2000년에는 미국 내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었고, 지난해 6월에는 미셸 위(15·한국 이름 위성미)와 함께 미국 대표에 뽑혀 커티스컵 골프대회(미국-유럽간 여자 아마추어 골프 대항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제인 박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 최고의 실력에 매너도 좋은 소렌스탐을 닮고 싶다고 말했다.

남자 골프에서는 이원준·허인회·강성훈 등 두각

 
박인비(17)도 눈여겨볼 만한 선수다. 국가대표 주니어 상비군 출신으로 2001년 골프 유학을 위해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간 그녀는 이듬해 열린 US여자주니어골프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차세대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한 것은 1999년 송아리(18)에 이어 박인비가 두 번째였다. 키 160㎝에 골프를 일찍 시작한 편이어서 기본기가 탄탄하다. 
올해 같은 대회에서 박인비를 꺾고 우승한 김인경(17·한영외고)도 빼놓을 수 없다. 김인경은 주니어 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지내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걸어온 선수. 올해 초 미국으로 건너가 각종 주니어 대회를 휩쓸었다. 대부분의 골퍼들이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한 것과 달리 김인경은 아버지를 3년 동안 조른 끝에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제2의 박세리를 꿈꾸는 것은 이들만이 아니다. 국내에서 기량을 갈고 닦고 있는 선수도 적지 않다. 국가대표 신지애(17·함평골프고 2)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지난 달 송암배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것을 비롯해, 올해 아마추어 대회에서 4승을 거두었다. 신지애는 특히 2003년 교통 사고로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함께 차를 탔던 여동생과 남동생도 크게 다쳐 1년 동안 병원에서 먹고 자야 했다. 동생들 간호를 도맡아 하면서도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을 정도로 악바리 근성이 돋보인다. 지난해 1월 국가대표로 선발된 뒤 기량이 날로 늘고 있다. 키가 155㎝로 작은 편이지만 270야드(245m)를 넘나드는 드라이브샷이 장기다. 쇼트게임과 퍼트를 보완한다면 프로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는 평가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딸을 뒷바라지하려고 목회 일을 그만둔 탓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편이다.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울수록, 힘이 들수록 골프를 더 잘해야 겠다도 다짐하곤 해요.”

 
남자 골프에서는 올해 19세인 이원준을 주목할 만하다. 골프 유학을 위해 뉴질랜드로 건너간 그는 191㎝, 92㎏의 당당한 체격을 앞세워 올해 뉴질랜드 대표선수에 선발되었다. 커다란 체구에 물 흐르는 듯한 유연한 스윙이 어니 엘스를 연상시킨다. 드라이버를 잡으면 300야드를 넘기는 것은 기본이다. 호주의 유력 일간지인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최근 이원준의 활약을 대서특필했다. ‘정말 대단한 선수다. 그의 샷을 보고 있노라면 환상적(fantastic)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샷을 할 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원준은 8월25일 경기도 가평 베네스트 골프장에서 개막하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투어 삼성베네스트오픈에 초청 선수로 출전할 예정이다. 그가 한국의 프로 대회에 출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 뉴질랜드에서 그와 연습 라운드를 했던 한 기업 대표는 “체구도 그렇고, 스윙도 엘스와 흡사하다. 조만간 제2의 ‘빅 이지’가 탄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국내파로는 국가대표 허인회(서라벌고)·강성훈(제주 남주고)이 돋보인다. 허인회는 송암배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2년 연속 정상에 오르며 ‘제2의 최경주’를 꿈꾸고 있다. 강성훈 역시 지난 달 열린 미국 아마추어 퍼블릭링크스챔피언십에서 16강에 오르며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중앙일보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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