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써라!”
  • 정진홍 (중앙일보 논설위원) ()
  • 승인 2005.10.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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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43년 전인 1962년 10월 이즈음, 당시 서독에는 훗날 ‘슈피겔 사건’이라 불리게 된 무자비한 언론 탄압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마침내 26일 밤, 수십명의 서독경찰과 검찰이 시사 주간지 <슈피겔>을 덮쳤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믿기지 않겠지만, 그들은 4주간이나 <슈피겔> 편집국을 뒤지고 각종 문서를 압수했다. 그뿐만 아니라 <슈피겔> 발행인이자 편집인이던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을 비롯해 8명이 체포·구금되었고, 아우크슈타인은 1백3일 간이나 미결감에 수감되어야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슈피겔>은 사건이 있기 전, 10일자에서 서독군 방위태세를 문제 삼아 기사를 냈다. 이에 화가 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국방장관이 국가기밀 누설 등을 이유로 <슈피겔>을 난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결말은 정반대 결과를 가져왔다. ‘슈피겔 사건’으로 국내외의 반발에 부닥친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가 임기를 2년이나 앞당겨 사임해야 했고, 사건의 장본인 슈트라우스 국방장관 역시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아우크슈타인을 비롯한 <슈피겔> 기자들은 4년 뒤인 1966년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슈피겔>은 1947년 1월4일 첫 호를 발간한 이래 지금껏 명성을 날리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다. 발간 첫 해 <슈피겔>은 1만5천부 남짓을 발행했으나 지금은 1백12만3천부를 발행하고 있다. 하지만 발행 부수가 문제가 아니다. <슈피겔>을 창간해 55년 동안 이끌다가 2002년 타계한 <슈피겔>의 발행인이자 편집인 아우크슈타인은 독일 현대사와 궤적을 같이한 이 저널을 가리켜 ‘민주주의를 지키는 대포’라고 불렀다. 그리고 <슈피겔>은 정말로 그렇게 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대포’가 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기절제가 필요하다. 아우크슈타인이 “저널리스트에게 최악의 적은 정치인과 호형호제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는 정치인과 영원한 우정을 나눌 수 없다”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그래서 ‘<슈피겔>이 뜨면 정치인과 관리들이 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슈피겔>은 정치권 부패를 파헤치고 성역 없는 보도로 일관했다. 앞서 언급한 ‘슈피겔 사건’은 그에 따른 피할 수 없는 업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 사건을 통해 서독의 민주주의는 새로 시작되었다. 
   
언론은 민주주의 지키는 대포가 돼야 한다

<슈피겔>은 아우크슈타인이고 아우크슈타인은 곧 <슈피겔>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우크슈타인은 <슈피겔>의 역사요 산 증인이었다. 바로 그 아우크슈타인이 1953년 4월 13일 뒤셀도르프 라인루어클럽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슈피겔>의 가장 큰 위험은 “흥미를 위해 사실을 무시할 때”라고 말했다. 그의 육성을 좀더 자세히 옮겨보자.
  
“<슈피겔>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일까요? 최대한의 ‘흥미’를 추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무시할 때입니다. ‘현실’ 자체가 아니라 ‘재미있는 현실’을 반영할 때 가장 위험합니다. (중략) <슈피겔>이 어느 정도나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에 따라 저는 이 저널의 성공을 측정할 겁니다.”
  
언론의 힘은 사실 전달에서 나오지 흥미 전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사실 전달은 그 자체가 이미 변화의 힘, 변화의 기운을 담고 있다. 언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는다면 그것은 사실을 흥미롭게 덧칠해서가 아니라 사실을 그 자체로 전할 때 가능한 것이다.
  
‘슈피겔’은 ‘거울’이란 뜻이다. 시사 주간지 <슈피겔>은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냈다. 그것은 ‘흥미’가 아니라 철저히 ‘사실’에 입각했기 때문이다. <슈피겔>은 사실 보도에 목숨을 걸었기에 <슈피겔>이었다. 결국 언론의 생명은 ‘사실과의 투쟁’에서 담보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써라!” 이것은 본래 루돌프 아우크슈타인이 옌스 다니엘이라는 가명으로 쓴 시사 평론의 제목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그 자체로 아우크슈타인과 <슈피겔>의 움직일 수 없는 정신이었고, 이제는 이 시대의 모든 언론과 언론인들에게 던져진 흔들 수 없는 정언 명령이 되어있다. 특히 이 혼돈의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한 정치적 시사 주간지로 살아 남아 있는 <시사저널>이 견지해야 할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자세다.
 
 <시사저널> 창간 16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다시금 목청껏 말한다. “흥미를 위해 사실을 무시하지 마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 써라!” 그래서 “이 혼돈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대포가 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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