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스크린에 뜬 ‘조선의 별’들
  • 안해룡 아시아프레스인터네셔널 ()
  • 승인 2005.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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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마가타 다큐 영화제에서 재일동포 영화인들 행적 최초 발굴

 
눈이 많은 일본 동북부의 야마가타 현. 야마가타 농민들은 겨울이 되면 눈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눈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면서 생활의 터전을 일구어가고 있는 야마가타 현 신조의 농민들을 3년에 걸쳐서 기록한 영화 <설국>.

지난 10월7일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2005 개막작으로 상영된 이 <설국>은 이시모토 도키치 감독이 1939년에 제작한 작품.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이 있었다. 하시모토 다쓰오·류진 다카마사 등과 함께 카메라맨으로 참여한 이노우에 칸. 한국 이름 이병우다.

 
1912년 전주에서 출생한 이병우는 서울의 중동중학교를 중퇴한 뒤 소비에트 영화에 감동을 받고 일본에서 영화운동에 참여했다. 프롤레타리아 영화운동의 기치를 내건 일본의 프로키노 운동에 참여하면서 촬영과 영화를 공부했다. 감독 기무라 소토지, 카메라맨 다치바나 미키야 등에게서 영화를 공부한 이병우는 <로지마>(1959년) <거울 속의 소녀>(1960년) <비행 소년>(1964년) 등의 일본 영화를 촬영했다. 또한 그는 <굿바이 도쿄>(1973년) <대괴수 용가리>(1967년) <성웅 이순신>(1971년) 등 한국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올해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는 ‘일본에서 산다는 것-경계에서의 시선’이라는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재일(在日)’이라는 주제로 재일 동포 감독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재일에 관한 주제로 일본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등을 아우르는 특집 프로그램이었다. 이 특집 프로그램은 영화인과 영화 연구자들의 관심은 물론 ‘재일’ 문제 연구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또한 딱딱하고 낡은 다큐멘터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1회 상영하는 귀중한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관객이 몰려 특집 프로그램의 주 상영장인 포름4의 객석 98개는 만원 사례를 이루었다.

 
이병우의 작품은 <설국> 이외에 <하늘의 소년병>(1941년)이 함께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일본 해군성이 후원한 선전 영화. 이병우는 촬영과 편집을 담당했다. 이 영화는 목숨을 걸고 공중 촬영을 감행해 당시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 단순한 선전 영화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이병우의 영화적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전 감독이자 일본 다큐멘터리계의 거장인 가메이 후미오는 <하늘의 소년병>을 ‘과거의 교육에 대한 항의’라고 격찬했다. 그는 “과거의 교육은 머리만으로 해왔기 때문에 실행력 있는 인간을 만들지 못했다. <하늘의 소년병>은 소년병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의 교육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극영화를 넘어서는 박진감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영화는 <기관차 C-57>과 함께 일본문화영화협회에 의해 일본 문화 영화의 최고봉으로 선정되었다.

야마가타 영화제 재일 특집에는 이병우 이외에도 식민지 시절 일본의 영화계에서 활약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한국·북한·인도네시아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초기 영화인들의 삶과 그들의 영화를 발굴해 소개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 이름을 썼기 때문에 그동안 묻혀 있었다. 히나쓰 에이타로(허 영·상자 기사 참조), 간나이 세이치(김학성), 우베 다카시(김순명)가 그들이다. 이들 중 허 영은 인도네시아에서, 김학성은 한국에서, 김순명은 북한에서 각각 삶을 마감했다.

현대 인도네시아 영화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허 영의 인도네시아 이름은 ‘닥터 후융’. 그는 허 영·히나쓰 에이타로·후융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 조선과 일본·인도네시아에서 영화를 만들었다. 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불행한 시대의 영화인 허 영의 자취를 기록한 사람 또한 ‘재일’이다. 김재범 감독이 그 주인공으로, 허 영의 삶을 기록한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영화인>도 <닛폰 프레젠츠(Nippon Presents)>와 함께 상영되었다.

<닛폰 프레젠츠>는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수용소에 있는 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의 생활을 선전하기 위해 허 영이 감독한 선전 영화 <호주에 외치는 소리>를 기초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 학대를 고발하는 영화다.

<오발탄> 등의 작품을 촬영해 한국 영화계에 발자취를 남긴 촬영 감독 김학성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두 이름을 가진 남자-카메라맨 김학성·간나이 세이치의 족적>. 다나카 후미히토 감독의 데뷔 작인 이 작품은 그의 스승인 일본인 촬영 감독 오카자키 고조와 교류기를 통해 식민지, 해방, 남북 분단, 전쟁 등 격변의 현대사를 살아온 촬영 감독 김학성의 삶을 조망했다. 식민지 시절 김학성이 촬영한 최인규 감독의 <집 없는 천사>도 함께 상영되었다.

이 영화가 상영된다는 소식을 접한 각본가 니시키 모토사타의 부인이 딸과 함께 야마가타에서 이 영화를 중국에서 발굴한 한국영상자료원 이효인 원장과 만났다. 니시키의 부인은 일본어와 조선어로 함께 쓰인 <집없는 천사>의 원본 시나리오를 직접 가져와 이효인 원장에게 보이기도 했다.

 
일본의 미군기지 주변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기록한 <기지의 아이들>이라는 작품은 재일 영화제작자인 김순명이 제작했다. 우베 다카시라는 일본 이름으로 설립한 도쿄키노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이 영화는 일본의 거장 다큐멘터리 감독인 가메이 후미오가 편집에 참여했고, 이병우는 촬영에 참여했다. 일본 전국에 7백 개 이상 있었던 미군 기지촌 현실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김순명은 원래 광복 후 북한에서 영화 제작에 필요한 기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왔다. 재일 사업가의 지원을 얻어 영화용 카메라 등 장비를 마련한 김순명은 이 기자재를 가지고 북한으로 밀항하려다 일본 세관에 검거되었다. 그가 마련한 장비는 당시 재일 조선인 조직인 재일본조선인연맹에서 훔친 것으로 되어 반환되었지만 그는 수감되었다.

이후 그는 일본에 거주하면서 프로덕션을 세우고 제작자로 영화 제작에 전념했다. <기지의 아이들>을 시작으로 민족 교육과 재일교포의 생활 현실을 다룬 아라이 히데오와 교고쿠 다카히데 감독의 <조선의 아이>(1954년) 등을 제작했다. <조선의 아이>는 현재 도쿄도와 토지 문제로 분쟁을 벌이고 있는 도쿄 에다카와를 무대로 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민족 학교를 지키려는 재일 조선인들의 노력을 묘사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1970년대 한국 하이틴 영화 감독으로 유명했던 문여송 감독 등이 제작 스태프로 참여했다. 또한 이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안승민은 일본 영화계에서 카메라맨으로 활약했다.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조선의 아이>는 본격적인 개봉을 하지 못했다. 이 영화를 제작한 김순명은 몇년간 영화 제작으로 생긴 부채를 혼자서 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야마가타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재일’ 특집은 오덕수 감독의 <지문 날인 거부>(1984년), <전후 재일 50년사>(1997년), 신기수 감독의 <해방의 날까지-재일 조선인의 족적>(1980년) 박수남 감독의 <또 하나의 히로시마 - 아리랑의 노래>(1987년) <아리랑의 노래-오키나와에서의 증언>(1991년) 김덕철 감독의 <건너는 강>(1994년) 등 재일 감독의 영화를 비롯해 뉴스 필름 등 56 편이 상영되었다.
야마가타·안해룡(아시아프레스 인터내셔널)

 
허 영은 1908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1925년 영화를 배우기 위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당시 일본 영화계의 거두였던 마키노의 마키노 영화사에 들어가 영화 수업을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히나쓰 에이타로였다. 그는 1931년 시대극 <처녀 점장이>의 각색자로 처음 일본 영화계에 이름을 내놓았다. 마키노 영화사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자 그는 쇼치쿠 영화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시대극의 메카였던 쇼치쿠 영화사에서 정통 시대극인 <쓰지키리 장게>의 각색자로 참여했다. 또한 당대 최고의 감독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조감독으로 일하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불태웠다. 하지만 <오사카 여름의 전투>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폭발물 취급 부주의로 일본의 국보인 히메지 성 일부를 훼손해 체포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형을 살고 난 뒤 그는 신코 키네마 교토 촬영소 소장이던 나가타 마사이치의 도움으로 현재 도에이 영화사의 전신인 신코 키네마에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영화 기획에 참여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허 영은 조선인 지원병 최초의 전사자인 이인석 상병의 죽음에 착안해 영화 제작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손을 맞잡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내용의 선전 영화 <그대와 나>이다.

조선군 보도부가 제작한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던 미나미 지로는 지대한 관심을 보여, 직접 출연까지 했다.

미나미 지로 총독은 당시 독일에서 만들어진 여성 감독 레니 리펜슈탈의 선전 영화 <미의 제전>을 보고 나서 자극을 받았다. 그는 영화를 통해 조선을 ‘교육’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내선 일체를 내용으로 한 허 영의 <그대와 나> 제작을 전폭 지원했다. 영화 제작자 전원이 조선군에 입대해서 제작한 이 영화는 실패했다.

이 영화가 실패한 뒤 허 영은 군속이 되어 인도네시아 전선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일본군에 포로가 된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수용소 생활이 얼마나 자유스러운지를 보여주는 선전 영화 <호주에 외치는 소리>(1943년)를 제작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그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영화를 무기로 인도네시아인들의 독립 투쟁 과정을 담은 <자바 뉴스> 등 뉴스 영화를 만들었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을 때 허영은 인도네시아인 ‘후융’이 되어 있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후 허 영은 ‘인도네시아 영화의 아버지’로 통하는 우스마르 이스마일과 함께 시네마테크 인도네시아를 조직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영화 세 편을 제작했다. 인도네시아 영화의 초창기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하늘과 땅 사이>(1950년)는 프리에다라는 혼혈 여성을 통해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을 그렸다. 이 작품은 당시 50만 루피아라는 파격적인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이다. 이 영화는 흥행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인도네시아 영화에서 최초의 키스신이 담긴 이 영화가 성공함으로써 허 영은 인도네시아 최고의 영화 감독으로 거듭났다.

허 영은 1952년 자카르타에서 눈을 감았다. 허 영, 히나쓰 에이타로, 그리고 후융이라는 세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불행한 시대의 영화인 허 영은 우리에게는 단순하게 ‘친일 부역 영화’ <그대와 나>를 연출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격동의 시대를 몸으로 살아야 했던 한 영화인의 삶을 조망하는 조각 맞추기는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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