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구타는형사처벌 대상”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5.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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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가정폭력 방지법’ 제정 추진…치부 드러내는 것이 문제 해결 ‘첫발’

그날도 술에 절어 집에 돌아온 남편은 집안을 발각 뒤집어 놓았다. 미친 사람처럼 벌거벗고 아내 김명숙씨(가명 ․ 35)에게 덤벼 들었다. 김씨는 어떻게 맞았는지 숨이 턱턱 막히고 허리가 꺾였다. 남편은 김씨를 계단이 있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마치 죽일 듯한 기세였다.
 그때 근처에 사는 김씨의 친구가 달려왔다. 갑자기 남편의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는 김씨의 친구에게 ‘아내가 시어머니에게 잘못한다’ ‘일이 너무 힘들다’는 등의 불평을 늘어 놓으며 눈물을 흘렸다. 가정은 완전히 쑥대밭처럼 만들어 놓고, 남들 앞에서는 모범 가장처럼 행세하는 이중성에 김씨는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남편이 친구와 이야기하는 틈을 타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날 밤 그는 허름한 여관방으로 들어가 혼자 누웠다.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시골 여관방이었지만,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눈치만 살피면서 보낸 7년간의 결혼생활은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위험하고 힘이 들었다. 학장 시절엔 학생회장까지 지냈던 그였지만, 점점 황폐하고 무기력해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혼을 생각지 못했다. 어떻게든 참고 살아보려고 했다. 이제는 끝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에는 미안하지만, 이제는 더 버틸힘이 ,없다.
 그는 한살 터울로 남매를 두었다. 딸은 이번에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가출한’ 엄마는 딸의 입학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더 가슴 아픈 것은 아이들이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딸은 하루에도 20차례 가까이 소변을 봐야 한다. 그리고 이같은 증상은 아버지 돌아오는 저녁 시간이면 더욱 심하다. 딸은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지금 딸은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있다.

상습 폭력에 자녀들도 정신병 얻어
 올해 여섯살인 아들 역시 심한 정서 불안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의사는 원인이 아버지에게 있으므로 함께 와서 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얘기했지만, 남편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집안이 발칸 뒤집힐 때마다 아이들은 방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바들바들 떨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아이들은 병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금 김씨는 ‘한국 여성의 전화’가 운영하는 ‘쉼터’에 머물고 있다. 쉼터는 말 그대로 가정내 폭력을 피해 도망쳐 나온 여성들을 위한 긴급 피난처이다. 87년 3월에 여성의 전화 사무실 한켠에 임시 거처를 만들면서 시작한 것인데, 지금은 34평 규모의 빌라를 구입해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살피고 있다. 수용 인원은 9~12명 , 이용 기간 은 30일이 기본이지만, 상황에 따라 연장될 수 있다. 피난한 여성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쉼터의 가장 중요 기능은 가정 폭력으로부터 여성을 격리시켜 보호하는 것이다.  피해 여 성은 담당 상담원과 수시상담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한다. 李文子 쉼터 관장(50)은 “매맞는 아내 뒤에 지원세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폭력을 억제하는 효과도 었다’고 덧붙였다.
 현행법 하에서도 가정내 폭력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있다. 아내 구타 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법은 없지만, 형법의 폭행죄와 상해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배우자’ 또는 그 직계 존속으로부터 심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이혼’을 구할 수 있도록 한 민법 840조 등이다, 그러나 이런 법률은 이혼으로 갈 정도가 아니면 여간히 적용되지 않는다. 공권력은 가정내 사건에 개입하지 않는 소극적 자세를 보인다. 여기에는 가정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가정내 폭력을 방치하는 결과도 초래한다. 이 때문에 여성계는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올해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양대 부속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김광일 교수는 의사의 입장에서 이 법의 제정을 적극 지지한다. 그는 ‘아내를 패는 버릇은 고칠 수도 없고, 그런 사람은 치료 대상이 아니라 형사 처벌 대상이다’라고 강조한다.

“가정 폭력 ‘대물림’도 문제’
 김교수는 또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몇가지 사항을 지적한다. 우서 모든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는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흔히 ‘맞아 가면서 무엇하러 사느냐’는 말은하는데, 반복되는 폭력을 당하면 인간은 노예의 정신 상태를 갖게 된다고 설명하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공포감을 갖게 되고,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또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사람은 절대 이혼해주지 않으며, 도망갈 여지도 남겨 놓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아내를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서 툭하면 트집을 잡아서 때린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으니 때리겠지’라는 일반인들의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더 커다란 문제는 폭력이 대물림 된다는 것이다. 폭력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폭력의 최대 피해자이자이지만, 결국은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매맞는 아내들의 얘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하지만 남보기 부끄러워 좀처럼 이를 공론화하지 않는다.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지알고 내알고 하늘이 알고’, 그리고 그만인 것이다. 문제를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한 폭력에 멍들어가는 가정은 줄지 않는다. 인권의 사각지대는 바로 가정이며, 이를 고치는 첫 걸음은 가정의 치부를 드러내는 공론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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