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 세월이 흘러가도 스러지지 않는 ‘발라드 황제’
  • 강헌(음악 평론가) ()
  • 승인 1995.03.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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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이영훈과 ‘10년 知?’ 큰 도움 감상주의 넘어 서사적 음악 모색

95년 이 시점에서 이문세의 존재는 각별하다. 이 감흥은 단순히 새해 벽두에 그가 발표한 아홉 번째 앨범의 진득한 완성도와 꾸준히 유지되는 시장의 호응도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 음악가 이문세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성숙해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성숙이 80년대 중반에 환호로 물결쳤던 10대 소녀들과 그보다 훨씬 영악해진 90년대 후예들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 여기에다 30대 이상의 수용자들도 그의 음악이 분만하는 동심원 속으로 자연스럽게 포섭된다는 사실은 ‘조용한 경악’ 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의 맹장들, 예를 들어 조용필이나 전인권 ․ 김현식 ․ 조동진 그리고 여걸로서는 이선희에 이르는 빼어난 깃발들이 90년대라는 총구앞에 퇴조할 기미를 보이거나 혹은 침묵할 수밖에 없을 때(물론 김현식은 영원한 침묵의 세계로 날아가 버렸지만). 80년대 중반, 정확히는 85년의 세 번째 앨범과 87년의 네 번째 앨범을 통해 발라드 장르를 한국 대중 음악의 주류로 쐐기 박은 이문세. 그가 새로운 단위의 연대기에 접어들면서도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는 사실을 라디오와 브라운관을 포괄하는 방송 진행자로서 그가 지닌 능력과 인기 덕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의 세 번째 앨범에서부터 <1995 STAGE WITH COMPOSER LEE YOUNGHUN> 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올해의 아홉 번째 앨범에 이르는 일곱 장의 성과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조목 조목 대고 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 이문세의 음악적 출발점이 7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의 음악적 정서를 자양분으로 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때만 해도 그는 통기타를 메고 나와 재치있는 말솜씨를 구사하는 엔터테이너에 불과했으며, 당시 천하를 통일하고 있던 조용필이 드리운 커다란 그늘에서 올망졸망 모이를 쪼는 ‘참새’였다.

조용필 왕국의 한 부분 점령
  그러나 그와 필생의 음악적 동반자가 되는 작곡가 이영훈과 만나면서 그는 적어도 조용필이 꾸려 놓은 제국의 한 부분을 점령하여 제후로 등극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80년대 초반 이 용이 작곡가 이범희의 도움 아래 <잊혀진 계절>로 포문을 열었으나 음악 외적인 추문으로 추락하고 난 뒤 잠시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던 발라드라는 영지였다.
  30년대 박시춘 ․ 남인수로 묶여진 짝 이래 남성 이인삼각 경주로서는 아마도 최고의 편성일 이 콤비는, 85년 세 번째 앨범의 발라드 <난 아직 모르잖아요>로 서서히 한국 대중 음악의 주도권을 확보해 가고 있던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어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러브 발라드의 고전으로 읊어지는 <사랑이 지나가면>과, 중간 템포의 클라이맥스를 지닌 <그 女의 웃음 소리뿐>이 수미쌍관(首尾雙關)을 이루고 있는 그의 최대 성공적인 네 번째 앨범으로 주류 언어로서 발라드를 이 땅에 일으켜 세웠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의 작사 ․ 작곡을 담당한 이영훈은 역시 전곡의 편곡을 맡은 김명고S(70년대 ‘사랑과 평화’의 키보드 주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구미 대중 음악의 세례를 받은 어린 수용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핵심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구애와 이별 사이를 가로지르는 뜨거움과 허전함을 형상화하는 보편적이고 감상적인 선율을, 하나의 노래 안에서나 앨범 전체를 통해서나 밀도 있게 조직하는 것이다. 어느 노래에서나 이영훈의 주제 선율은 인상적인 여운을 아로새긴다. 여기에 결코 매끈하다고 볼 수 없는, 텁텁함 가운데 허탈한 앙금을 남기는 이문세의 보컬이 안성맞춤으로 결합한다.
  이들의 송공은 <시를 위한 시>를 간판으로 하는 다섯 번째 앨범에 이르러서도 놀라운 것이었고, 이 세 앨범은 88년 발라드의 주류화에 쐐기를 박는 변진섭의 첫 앨범과 두 번째 앨범의 음악사적 전제가 된다. 하광훈 ․ 지근식 ․ 윤 상 ․ 노영심 같은 ‘스타’ 작곡가를 파트너로 삼은 변진섭이 <홀로 된다는 것> <희망사항>을 연이어 성공시키고, 이 성공의 달콤함에 넋을 잃은 젊은 대중 음악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모습을 드러낼 때, 이들보다 한 세대 위인 이문세의 역할은 이제 소임을 다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을 석권했던 발라드가 춤과 패션, 그리고 숨돌릴 틈 없이 잘게 나누어진 화면의 편집 같은 시각적 요소로 무장한 댄스뮤직 앞에 속절없이 자신의 권좌를 내주며 발라드의 젊은 영웅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질 때(유일한 예외는 신승훈이다), 이문세와 그의 노련한 작곡가는 90년대를 막 넘어선 91년에 의심할 나위 없는 이들의 최대 걸작이자 나이를 먹어 가는 자신의 세대에 걸맞는 성인 취향의 일곱 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재즈와 포크의 ‘살내음’으로 한 단계 상승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현악 합주와 피아노, 그리고 알맞게 배치된 관악기의 후원을 받으며 전개되는 첫째 면의 머리 곡 <가을이 가도>와, ‘사랑이라는 게 지겨울 때가 있지…’ 하며 허허롭게 20대 열정의 비망록을 넘겨 버리는 다음 면의 머리 곡 <옛사랑>은, 빅밴드 시대 스탠더드 재즈의 들끊음이 우아하게 개입하는 <저 햇살 속의 먼 여행>과 바리톤 박정하와 듀엣을 이루는 가곡 스타일의 <겨울의 미소>, 그리고 요즘 떠오르고 있는 여성 보컬리스트 장혜진과 듀오를 이루어 통기타의 정서로 돌아간 <회전목마> 들과 어울려 그야말로 AC(Adult Contemporary)의 정찬을 일구어 낸다. 이문세와 이영훈이 발라드의 감상주의를 넘어 도달한 것은 바로 재즈와 포크의 ‘살내음’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8집의 <종원에게>) 어느덧 이번 9집에 이르러 현단계 한국 대중 음악에서 참으로 성공하기 힘든 AC의 중추적인 주재자가 되었다. 다시 이영훈과 재결합한 이번의 신작에서 런던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의욕을 보인 <영원한 사랑> 같은 발라드처럼 현재의 10대를 배려하는 노래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 앨범의 주조는 조동익(베이스) ․ 함춘호(기타) ․ 김영석(드럼) 같은 불퇴전의 용사들과 벌이는 ‘90년대의 이문세’적인 노래들이다. 이 아름다움은 <서로가> 같은 노래에서 발현하듯이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것들이며 <나의 사랑이란 것은>에서처럼 ‘말하고 나면 뭔가 허전할 것 같은’ 그런 빛나는 절제감이다.
  20세기 세계 대중 음악을 규정한, 구애와 실연을 재료로 하는 발라드의 먼 어원 가운데 하나가 ‘서사적인 이야기 구조(narrative)를 담은 노래 형식’ 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이 아닌 세계의 풍경과 주체 사이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호흡이 트로되는 그런 발라드의 세계로 이문세와 그의 음악적 후견인이 이행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이번 신작 중 <퇴근길>이 보여 주는 레게 리듬의 전복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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