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행보에 모든 가능성 열려 있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6.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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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창당설로 이목 끈 고 건 전 총리 인터뷰

 
‘원융회통(圓融會通).’ 인터뷰를 약속한 고 건 전 총리에게 미리 숙제를 던졌다. 2006년 자신의 바람을 사자성어로 담아 달라는 것이었다. 고 전 총리는, ‘원융회통’이 2006년 삶의 화두라고 답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설파한 ‘원융회통’은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여 막힘이 없이 하나로 모여 통한다는 의미다. ‘곧은 직선’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다.

하지만 새해 벽두부터 그의 정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주변에서는 ‘3월 창당’, ‘싱크탱크 모임 창립’ 등이 불거지며,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스스로도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와 달리, 그의 정치 행보는 ‘부드러운 직선’에 가까워 보인다. 지난 1월19일 고 전 총리를 그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 서울 연지동 여전도회관에서 만났다. 주로 정치적인 현안에 대해 물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강연을 계속 할 계획인가?
그동안 밀린 곳이 많이 있어 일정을 조정하고 있다. 특히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개학하면 몇 군데 더 할 것이다. 당장 2월8일 인천에서 새얼문화재단 초청으로 강연을 한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정당 입당이나 창당을 판단한다고 했다. 신당 창당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그렇다. 신당 창당을 배제하지 않는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내가 해야 할 정치적 역할에 대한 결단이 서면,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해서 정당 문제를 정리할 것이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

1월20일 창립하는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이 고 건 외곽 조직이라며 3월 창당 입장을 밝혔다.
그 모임은 자연 발생적인 모임이다. 조직 과정에서 내게 문의는 있었다. 나는 일절 관련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자연 발생적인 자원 모임인데, 외곽 조직을 자칭하고 있다. 단체에서 3월 신당설 운운하는 것은 내 의사와 무관하다. 전혀 교감이 안 된 것이다.

창립대회에 참석하는가?
창립대회에 가지 않는다.

한미준에는 서울시장 후보 시절 캠프 조직인 동숭동 팀 사무국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도 관련이 없는가?
관련이 없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안 된다.

1월23일 ‘미래와 경제 포럼’이 출범한다. 여기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비정치적인 모임이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문화계 인사들이 주로 참여한다. 정치인은 배제했다. 그리고 순수 연구 단체이다. 어려운 나라 상황을 걱정하면서, 미래를 고민하는 모임으로 정책 토론 마당이라고 보면 된다. 많은 발기인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이세중 변호사,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등 가까운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가깝기는 하지만 비정치적인 분들이다. 모임에는 주로 40대가 포진하고 있다. 벤처 기업가·대학 교수 등이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분들도 있다.

이 모임에서 직책을 맡는가?
직책을 맡을 생각은 없다. 발기인·연구위원 가운에 한 사람일 뿐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민주당 신중식 의원은 이 모임을 ‘고 건 싱크탱크’라고 했다.
신의원은 이 모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런 발언도 사실이 아니다.

가까운 분들이 모이고, 이름을 밝히기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은 신당 창당을 위한 전진 기지라는 뜻이 아닌가?
비약하지 말아 달라. 모임을 통해 한국의 미래 전략에 대해 고민하려고 한다.

한미준이나 미래와 경제 포럼이 결국에는 모두 고 건 신당으로 규합되는 것 아닌가?

 
신당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직 구체적인 입장이 없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각자 입장에서 희망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된다.

무위의 정치를 끝낸 것인가?
공직에서 물러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해 왔다. 자제했던 사회적 활동을 재개했다고 보면 정확하다. 정상화한 것이다.

대권 출마를 언제쯤 선언할 작정인가?
(웃음) 우리가 해야 할 시대적 과제가 있는데, 지금의 정치 리더십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짊어질 역할에 대해 확신이 서면 그때 결단을 내릴 것이다.

얼마 전에 부인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출마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웃음) 집 사람에게 마음을 들킨 모양이다. 아직 대권과 관련한 구체적인 상의는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느꼈나(웃음). 대통령 임기가 2년 이상 남은 시점에서 출마 선언은 적절치 않다.

대통령 임기가 1년 반이나 1년 정도 남은 시점에는 출마 선언을 하는 것이 적절한가?
역으로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가?(웃음)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상의하고 있다.

5월 지방선거 이후에 대권 출마 선언을 할 것으로 보아도 되는가?
주변의 의견이 다양하다. 더 말씀 드릴 사항이 없다.

지방선거 때 직접 뛰지 못하더라도 가까운 분들을 측면 지원할 용의는 있는가?
아직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못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기존 정당에 입당할 생각은 없나?
정치적 결단을 하게 되면 정당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겠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고 건 전 총리는 다된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려 한다고 비판했다.
나는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면서 국민을 위해 열심히 밥상을 차려왔다. 정치적 결단을 하게 되면, 그때도 국민을 위한 밥상을 차리는 데 앞장서겠다. 그때는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쌀도 씻고, 설거지도 하겠다.

최근 열린우리당 당의장 후보로 나선 김근태 의원이 고 건 전 총리를 지목하며 범민주 세력이 통합해야 한다고 했다.
나누기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그만하고 통합의 정치로 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긍정적이라고 본다. 김근태 의원이나 임종석 의원이 말한 개혁 세력 통합론은 원론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본다.

원론적인 입장이 같다면, 열린우리당에서 제의가 오면 입당할 용의가 있는가?
원론적인 언급이다. 정치적 결단이 서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어떠한 지향성을 가지고 통합을 위해 노력해 나간다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자신을 개혁적이라고 보는가?
공직 생활을 하면서 실용적인 개혁주의자를 자처해왔고 개혁을 추구해 왔다. 일례로 복마전이라는 서울 시정 전반을 오픈 시스템으로 바꾸어 투명화시켰다. 시장 때 공룡 조직이라는 서울시도 구조 개혁을 단행했고, 세계 100대 도시를 상대로 한 e거버넌스 평가에서 1위를 받았다. 이것은 모두 실용적인 개혁이다.

‘위원회만 만든다’ ‘추진력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전혀 사실과 다르다. 관선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2기 지하철을 5호선부터 9호선까지 동시에 착공했다. 강변북로를 포함한 내부순환도로도 내가 만들었다.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난지도를 생태 공원으로 만들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도 만들었다. 이런 것은 결단과 추진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재의 정당 구도가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갈 것 같나?
정치는 생물이다. 더군다나 우리 정치 상황은 늘 변화 가능성이 많다. 합당론·합종연횡론에 대한 언론 보도를 보면 구도 변화가 점쳐진다.

하반기 정국의 화두가 개헌이 될 것 같다. 개헌에 대한 입장은?
총선·대선·지방선거까지 매년 선거를 치르면 국력이 낭비된다. 그런데 2008년에 20년 만에 대선과 총선이 근접하게 맞물린다. 임기를 조정하기에 좋은 기회다. 4년 중임제는 임기 문제이니까, 개헌 논의에 포함시켜 논의해야 한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 등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한 논의는 다음 정권에서 하자는 것인가?
권력 구조 문제는 서둘러서 할 일이 아니다.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야 할 문제다.

 
개헌과 맞물리는 것이 선거구제 문제다. 지역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대 선거구제 도입이나 독일식 비례 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있다.

선거구제 문제에 접근하는 내 원칙은 국민의 의사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득표 수와 의석 수가 가까울수록 좋은 선거 제도이다. 그런데 중대 선거구제는 이미 일본에서도 실패한 제도다. 비례 대표 의석 수를 늘리고, 권역별 비례 대표제를 결합하는 것이 좋은 제도라고 본다.

1월18일 대통령 신년 연설을 보았는가?
새해 시정 연설을 민생에 초점을 맞추고, 경제를 강조하고, 사회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다만 고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경제가 성장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투자를 해야 하는데, 기업 투자를 유인하고 촉발하는 적극적인 대책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아쉬웠다.

양극화 해소를 위한 증세 방안에 대해서는?
우선 재정 지출 구조를 아주 면밀히 분석해 재검토해야 한다. 대형 국책 사업들에 대해 타당성과 우선 순위, 완급을 가리는 등 재검토하다 보면, 공공 부문의 경상 지출을 감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재원이 부족하다면, 사회 각 분야가 토론하고 협의하는 것이 순서다.

유시민 의원 입각을 포함해 1월2일 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총리로 있었을 때 국무위원 인사 시스템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보건복지부장관을 내정할 때는 최적임자 3인 정도를 후보자로 인선해서 비교 심사하게 했다. 그런데 이번 인사에서는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 같다.

지난 3년 동안 참여정부의 공과를 평가한다면?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지방 분권화를 지향한 것은 평가받아야 한다. 부족한 점은 국민과 의사 소통을 하고 협력을 얻어 내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또 장기 발전 전략을 제시하고 국민의 에너지를 모아가려는 노력도 미흡했다. 외환위기 부작용을 치유하는 데 매달려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이루지 못한 것 같다.

한나라당 일각이나 보수층에서는 참여정부를 좌파 정부라고 비판한다.
참여정부 초대 총리를 하고 있을 때 헤리티지 재단 이사장이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때 내가 참여정부의 좌표를 굳이 따지면, 영국의 블레어 정부보다는 오른쪽에 있다고 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다만, 참여정부에 참여한 인사들의 이념적인 스펙트럼이 넓다 보니, 좌파 정부라는 지적이 나올 법도 하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두고 한나라당은 이념적으로 접근한다.
이념의 문제로 착색될 수 있지만, 본질은 사학 운영의 자율성과 투명성의 문제다.

사학법 개정안 가운데 사학재단이나 한나라당이 문제 삼는 개방형 이사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개방형 이사제는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좋은 제도이다. 다만 이것도 일종의 직접 규제이기 때문에 인센티브 시스템을 함께 도입했다면 이런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하는 사학에 대해서 국고 보조를 획기적으로 지원하는 식이다.

이날 인터뷰 동안 고 건 전 총리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좌우간’이다. 미묘한 정치적인 질문을 던지면, 그는 ‘좌우간’이라는 토씨를 붙였다. 이에 대해 고 전 총리는 “좌와 우의 가운데라는 의미니까, 그것이 바로 내 실용주의다”라고 받아 넘겼다. 지난해와 비교해 보면 그의 화법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유머도 넘쳤고, 자신감도 넘쳤다.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비교해, 자신은 홍보가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춤한 지지율에 느긋했다. 정치를 주식시장으로 치면, 상장을 하지 않은 장외주에 자신을 비유했다. 이 말에는 상장하는 순간, 블루칩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원융회통을 화두로 삼은 고 건 전 총리가, 행정의 달인에서 정치의 달인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올 한 해 그의 정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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