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의 역사 담긴 '욕망의 유적'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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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근대화 성지로 개발…한때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영화 누려

 
한국 최초로 주상 복합 고층 아파트 단지를 세운 곳, 한국 최초 슈퍼마켓이 생긴 곳, 한국 최초의 도심 재개발 사업이 이루어진 곳. 이곳은 어디일까? 바로 세운상가다. 지금이야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세운상가의 시작은 거창했다. ‘하와이 알라모어를 능가하는 세계 제1의 쇼핑센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많은 10만의 수용 인구’와 같은 찬사가 건축 당시 세운상가에 쏟아졌었다.

세운상가를 포함한 4개의 건물, 8개의 상가군을 세운 것은 당시로서는 기적에 가까웠다. 국민소득 1백14달러, 전국의 자동차 수가 2만 대 남짓이었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개발 독재’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 세운상가 재개발을 위해 박정희 정부는 ‘종삼’이라 불리던 사창가를 비롯해 판자촌을 일거에 철거하고 그곳에 근대 도시의 성채를 구축했다.

평범한 주거 지역이던 이곳이 사창가와 판자촌 지역이 된 연원은 태평양전쟁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싸우는 도시, 완성의 진군보’라는 구호를 내걸고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던 일본은 이곳을 도심 폭격에 대비한 ‘소개 공지대’로 조성했다. 폭격에 의한 화재를 막기 위해 공터로 조성한 것이다. 안창모 교수(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는 이곳 역사에 대해 “세운상가의 역사에는 굴곡진 우리 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태평양전쟁의 사생아로 세운상가는 출발했다”라고 말했다.

무위로 끝난 건축가 김수근씨의 '친환경 설계'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곳은 사창가와 판자촌이 우거진 도심의 슬럼이 되었고 그런 이곳에 관심을 기울인 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로 시작하는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가 처음 불리기 시작한 1966년, 세운상가는 원조 불도저 시장 격인 김현옥 시장에 의해 개발되었다. 박정희 정부의 조국 근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사업의 의미를 기리기 위해 김시장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의미로  세운상가로 명명했다. 

 
조국 근대화의 성지를 조성하려는 김현옥 시장의 구상을 나름대로 순화시켰던 인물은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수근씨였다. 완벽한 주상 복합 단지를 구상했던 그는 초등학교와 동사무소까지 유치하려 했다. 근대 건축의 주요 개념을 설계에 도입한 김수근씨가 크게 역점을 둔 것 중 하나는 생태적인 고려였다. 그는 3층에 보행자 데크를 만들어 연결된 4개 상가를 보행자가 차량의 방해를 받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5층에 옥상정원을 만들어 친환경적인 생활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앞선 구상은 개발 업자들의 현실 논리에 밀려 대부분 실행되지 못했다.

건축된 뒤 한동안 세운상가는 영화를 누렸다. 특히 주상 복합 아파트가 인기였다. 기업가와 연예인을 비롯해 당시 상류층이 대거 입주했다. 일부 시설물은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완공되기 전까지 의원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명동에 백화점이 속속 들어서고 용산전자상가가 생기면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운상가는 1990년대까지 나름대로 한국의 실리콘밸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전 네띠앙 사장 전하진씨를 비롯해 많은 벤처 기업가들이 사업을 시작한 곳이 바로 세운상가였다.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 이찬진씨가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을 처음 팔던 곳 역시 이곳이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세영씨는 세운상가에 대해 “도시의 콘크리트 유적으로 사회적 무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라고 평했다. 

이제 녹지화 사업을 통해 세운상가는 또 한번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안창모 교수는 “도심 녹지 축 조성이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결국 고밀도 개발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녹지 축 조성은 신개발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명박 시장은 세운상가의 역사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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