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베를린 취직한 동독인 “속 편하고 소득 높아졌다”
  • 본․金昊均 통신원 ()
  • 승인 1991.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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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4개월째, 독일인은 변화된 생활

“우리는 운이 좋았다.” 구 동베를린의 대표적인 노동자 주거지인 프렌츠라우어베르크에 사는 브라이어 부부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트럭운전사를 하다가 1년 남짓 개인술집을 경영하기도 했고, 85년부터 통일 전까지는 협동조합에서 경영하는 술집에서 일했던 남편 에버하르트 브라이어(52)씨는 지금은 서베를린의 한 술집 종업원으로 취직해 있다. “하루 8시간씩 4교대 근무를 하는데 밤근무를 제외하곤 만족스럽다.”

 월급은 1천5백마르크.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2백마르크가 적지만 7백~8백마르크 정도를 팁으로 받고 있고, 부인 크리스티네(41)씨도 지난 10월부터 서베를린의 한 백화점에 취직, 월 1천마르크를 벌고 있다. 3년 전 침실과 거실에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30㎡의 아담한 아파트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각 층에만 화장실이 있는 집에서 20년 동안 살았단다. “전국에서 모여든 당 간부들이 좋은 집은 다 차지해버려 우리 베를린 사람들에게는 낡은 집밖에 남지 않았었다.” 80년대말까지는 집세가 월 60마르크밖에 안돼 그런대로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는데, 올해 집세 전기요금 난방비가 모두 3배 이상씩 오르면 살림이 빠듯해질 것이라고 걱정스러워했다.

 이들이 들려주는 구 동독노동자의 노동의욕이란 엉망이었다. “4시간 일하고, 4시간은 놀고, 4시간은 잔업으로 기입했다.” 자립생활을 하고 싶어서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시작한 술집은 개인사업을 가능한 한 억제하려는 국가정책 때문에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암시장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기는 ‘브란덴부르크 육류콤비나트’에서 공급받았는데 양이 모자라 허가를 받고 개인업자에게 더 사야만 했다. 고기요리에 필요한 마가린․양파가 없어서 장사를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부가 합쳐서 2천(동독)마르크를 벌었는데 여기에서 전기․석탄․가스사용료를 지불했다. 일이 너무 많아 술집운영을 포기하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취직을 했다. “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속이 편할 분만 아니라 순소득도 오히려 더 높다.”

 정치가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놀라울 정도이다. 통일 후 선거에서 어느 당을 찍었느냐는 질문에 남편이 “정치가들은 다 똑같다. 주머니에 돈 집어넣기 바쁘다”고 답하자 “그들은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고 부인이 맞장구쳤다. “옛날 관제 시가행진에 무관심했듯이 지금은 정당에 무관심하다. 우리가 적극적이라고 해서 무엇이 변하겠는가.”

실업자 속출에 “우린 운이 좋았다” 
 통일 전에는 대부분의 동독인과 마찬가지로 동유럽과 서독밖에 가보지 못했다. 이들이 서독을 방문하게 된 데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서베를린에 사는 브라이어씨 어머니가 커피 열대과일 스타킹 등을 들고 브라이어 부부를 방문하곤 했었다. 어머니가 너무 늙어 거동이 불편해지자 브라이어 부부가 방문신청을 했다. 그러나 처음엔 거절당했다. 공산당중앙위원회에 항의편지를 보내자 그제야 여행허가가 나왔다.

 이들은 다른 동독인과는 달리 통일 후 새로 장만한 살림살이는 없다고 한다. 오히려 딸부부가 월부로 텔레비전을 산 일을 두고 “왜 이자를 물면서 월부로 샀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딸 아디나 브라이어(23)씨에게 전하자 그녀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마리오 그립(23)씨와 동거하면서 세 살된 에시카와 6개월된 클라우디아 두 딸을 둔 그녀는 작년 7월 통화동맹 실시 후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3년 월부로, 비디오는 현찰로 샀다. 1천9백마르크에 산 컬러텔레비전이 구 동독에서는 7천마르크였다고 한다.

 통일 이후 실업자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이 딸부부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전기코일을 생산하는 ‘생산협동조합’에서 소장비서로 일하다가 8월에 아이를 낳은 아디나씨는 동독법에 따라 91년 6월까지 산모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아기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해고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적어도 2년반 동안은 직장이 보장된 셈이다. 3백명이 일하던 이 공장에서 이미 절반은 해고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반나절만 일하는 단축노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남편 그립씨는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동독기업을 그만두고 서베를린에 있는 한 음료수 공장에서 막 새 일자리를 구했다. 그가 일하던 소주공장의 젊은이들은 새 일자리를 찾아 서베를린으로 가고 남아 있는 60여명은 대부분 40세 이상이거나 미혼모나 이혼모로서 서베를린이나 서독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립씨는 90년 10월까지 군에 있었기 때문에 해고당하지 않았다. 공장을 그만둘 때까지 그는 서독기업의 주문을 받아 동독소주에 서독상표를 붙여 시장에 내놓는 일을 했다. 그가 서베를린에서 신문광고를 보고 구한 직장은 “소음이 많고 겨울에는 추울 것 같아 사람들이 피하는 곳.” 우러급은 2천4백마르크로 서독인과 똑같이  받지만 이들과 어울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동․서독인들이 분단상태에서 상대를 거칠게 표현할 때 쓰던 ‘베쓰스’(서쪽사람들이라는 뜻) ‘오씨스’(동쪽사람들)라는 말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공장에서도 오가고 있다. “베씨스는 거만하고 자기들 일자리를 빼앗아갈까봐 우리를 싫어한다.”

“서독인은 일자리 때문에 우릴 싫어한다”
 독일적십자사 발표에 따르면 89년 9월 동독인이 폴란드․체코대사관을 통해 대거 서독으로 탈출한 이래 90년 11월말까지 1만7천명의 남편들이 가족을 버리고 ‘새 출발을 위해’ 서독지역에서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부인들이 적십자사에 와서 남편을 찾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동독인 장벽개방 후 동독상품을 왜 그리 괄시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립씨는 “국경개방 이후 서독회사들이 사탕 초컬릿 커피를 트럭에 싣고와 나눠주자 노인들이 허겁지겁 달려드는 것을 보고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들은 동독의 사회보장제도만은 통일독일이 물려받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지만 지금의 추세로 보아 그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아디나씨는 특히 1백% 보장되던 유치원제도를 크게 아쉬워했다.

통일 후 이들이 겪는 또하나의 불편은 늘어난 쓰레기 문제이다. 아파트 쓰레기통을 옛날엔 하루 한번 비웠는데 지금은 불필요한 포장이 너무 많아 세 번은 비워야 한다. 클라우스 퇴퍼 환경장관이 최근 생산기업에 포장지를 회수할 법적 의무를 지운 것이 이해될 만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낙관적이다. “2~3년 지나면 많은 것이 나아질 것이다. 폭력과 범죄가 늘어나 아이들의 장래가 걱정될 분이다.”

마리오 그립씨와의 인터뷰
․89년 10월 시위에 참가했는가?
애들 때문에 집에 있었다.
․애들이 없었더라면?
그랬더라면 혹시 모르겠다.
․시위의 명분에는 동의했는가?
물론이다.
․불안했는가?
 그렇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가야 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비밀경찰 슈타지가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개방되었을 때 서베를린에 갔는가?
 일하느라고 못갔다. 그대신 11월11일 22번째 생일잔치를 서베를린에서 가졌다.
․모드로 총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너무 늦게 등장했다. 자유선거를 통해 2~3년만 빨리 총리가 되었어도 개혁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슈타지로부터 탄압받은 적이 있는가?
직접적인 탄압은 없었다.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린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홀리갠(난동을 부리는 광적인 축구팬)이나 신나치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에서 해고당한 늙은 사람들 중에는 장벽을 다시, 그것도 옛날보다 2m는 더 높게 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눈 귀 입 다 막고 그냥 지나가자”고 체념한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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