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파업 웨스트팩 ‘지점 폐쇄’ 으름장
  • 김선엽 기자 ()
  • 승인 1991.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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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협약 효력상실” 노동부 유권해석이 사태 악화시켜
  호주계 웨스트팩은행의 노사분규는 극단적 결말로 치닫고 있다. 회사측은 지난 7일 서울지점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화이트칼라 노조로는 유례없는 장기파업을 기록하여 금융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온 웨스트팩은행 분규는, 인사권에 대한 어느 한쪽의 극적인 양보가 없는 한 파국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직원 39명(현재 노조 조합원 18명)에 불과한 웨스트팩은행 서울지점에 분란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89년  9월26일 단체협약 갱신체결을 위한 교섭이 개시되면서부터였다. 총 77개 조항 중 25개 조항에 대해 노사간 의견이 대립됐으며 노조는 은행측이 특히 노조활동 및 인사에 관한 19개 조항 중 14개 조항을 개악하려 한다면 반발했다. 그후 1년여에 걸쳐 31차례의 교섭을 벌였지만 노사간 견해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노조는 이 과정에서 은행측이 노조에 대해 흑색선전을 하고, 인맥을 통해 탈퇴와 사직을 강요하고 회유하여 조합원 28명 중 8명을 탈퇴시키거나 퇴직케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과거 2년 동안 비노조원의 임금인상률을 노조원보다 평균 30% 높게 책정하고 노조원보다 경력이 적은 비노조원에게 많은 임금을 지급하는 등 임금 및 인사 차별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3월29일 회사에 통보된 노동부의 ‘기존협약의 효력여부’대한 해석내용은 사태를 악화시켰다. 노동부는 은행측의 질의에 대한 회신에서 “노조법 제35조 3항에 의거, 기존협약은 만료일로부터 3개월이 지나면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했는데, 이같은 답변이 노사간 또다른 논쟁거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은행측은 4월17일 노동부의 답변에 근거, 유효기간이 88년11월1일부터 89년10월31일까지인 기존 협약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며 조합비의 일괄공제를 거부하는 등 조합활동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노조는 기존협약 중 71조의 “본 협약이 만료되었어도 갱신체결이 완료되지 않았을 경우 본 협약의 효력은 계속된다”는 문항을 들어 은행측에 맞섰다.

은행측의 입장 번복으로 ‘원점회귀’
 그후 별다른 진전이 없어 9월4일 노조는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은행측은 파업이 시작되자 모든 관리자와 비노조원 및 임시직원을 동원해 업무를 수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는 이같은 은행측의 처사가 “사용자는 쟁의기간 중 쟁의에 관계업는 자를 채용 또는 대체할 수 없다”는 노동쟁의조정법 제15조에 반한다고 보고 9월10일 崔東洙 지점장을 노동쟁의조정법 위반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감정싸움으로 비화된 노사대립은 9월25일 은행측의 대체업무에 항의하던 노조원과 농성장에 설치된 확성기 코드를 뽑으려던 관리자들간에 몸싸움이 벌어지면서 한층 격화됐다.

 노조는 9월28일, 이 사건으로 金善顯 위원장 등 조합원 3명이 상해를 입었다며 崔지점장과 피터 매머릭(웨스트팩은행 서울지점 공동대표․지배인)씨 등 관리자 4명을 근로기준법 제7조 폭행금지 위반혐의로 다시 고소했다. 은행측은 은행측대로 조합원들이 간부들에게 오히려 상해를 입힌 것은 물론 음악 등을 틀어 업무를 방해했다며 감금 폭행 상해 업무방해죄로 노조간부 4명을 같은 날 맞고소했다.

 은행측은 또 형사소송과는 별도로 10월11일 조합원의 직장점거농성행위에 맞서 ‘업무방해금지 등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내기도 했다. 노조측은 이에 대해 ‘쟁의발생신고, 냉각기간 경과 후 파업’이라는 적법한 절차를 거쳤음을 밝히며 업무방해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11월28일 재판부는 은행측의 신청을 일부 받아들여 “노조는 점거중인 회의실을 하루 1시간씩 1주일에 세차례 이내에 한해 사용하고 앰프 스피커 등을 호ㅚ의실에 들여와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

 이같은 판결 이전에 노조원 전원은 11월10일 이미 은행측에 의해 업무방해죄로 다시 형사고소당했다. 노조는 서울지점 간부들과의 대화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호주 시드니에 있는 본사 간부들과 담판짓기로 결정, 구랍 3일 김선현 위원장이 단신출국했다. 호주에 간 김위원장이 17~23일 웨스트팩은행 본사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이는 동안 국내에서는 노사간 교섭을 통해 은행측이 기존협약 무효화선언을 철회하고 27일 다시 회의를 갖기로 해 해를 넘기기 전에 분규는 타결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은행측이 단체협약 무효선언을 철회햇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호주와 서울에서 동시에 진행됐던 단식투쟁도 풀렸다.

 하지만 27일 최종결정을 위한 협상에서 은행측은 입장을 다시 번복,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은행측은 8명으로 구성되는 인사위원회에 노조원 4명이 참여하되 의결시 가부동수가 될 경우에는 지점장이 결정권을 갖는다는 기존 회사안을 고수하는 대신 파업중 임금 70%를 지급하겠다고 제시했다. 최동수지점장은 이때 “이것이 은행측에서 양보할 수 있는 최종안이며 이 제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지점 철수를 위한 절차를 밟겠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조측이 노조원 보호를 위한 마지노선이라며 사수해온 인사위원회 문제를 받아들이리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김위원장은 연말까지 지점장과의 접촉을 시도하며 인사위원회의 의결정족수를 참석인원의 3분의 2 이상으로 해한다고 요구했다.

“위장철수이므로 계속 투쟁하겠다”
 마침내 지난 2일 웨스트팩은행 아시아지역 최고책임자인 다쉬 포드 이사가 내한했다. 그는 서울지점 은행감독원 노조측에 최종타협안을 제시하고 끝내 합의가 안될 경우 조만간 폐쇄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포드 이사가 제시한 최종타협안은 인사위원회에 대한 회사입장을 견지하면서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노조원들에게는 조기정년퇴직제를 적용해 평균 27개월간의 임금을 위로금으로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노조도 4일 인사위원회 위원장을 은행측이 맡도록 하며 해고와 징계의 경우 의결정족수를 3분의 2 이상에서 과반수로 양보하되 가부동수일 경우 부결된 것으로 처리하자는 최종대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분을 밝히길 거부한 한 은행 관계자는 “회사가 철수를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최종안을 제시한 이상 앞으로 노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철수는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노사동수로 이루어지는 인사위원회의 위원장직을 회사에 주었다고 해서 노조가 무슨 큰 양보나 한 것처럼 떠드는데 가부동수일 경우 결정권이 없는 위원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흥분했다. 한편 지난 연말 귀국한 김선현 위원장은 구랍 11일부터 장소를 금융노련 사무실(중구 다동 동아빌딩 9층)로 옮겨 철야농성인 동료조합원들에게 뒤늦게 합류했다. 그는 지친 표정으로 이렇게 항변했다. “지금까지 협상과정에서 회사가 양보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건 모두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인사권 문제는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보루입니다. 다국적기업의 횡포 앞에서 생존권마저 포기해야 합니까.”

 은행측은 노조가 회사측으이 최종안을 거부함에 따라 철수절차를 밟겠다고 공표했으나 노조는 이를 위장철수로 단정,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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