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배지에 고시3관왕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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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학생운동가


주역들의 ‘삶의 궤적’…언론·정계 등 진출
  이번 14대 총선 결과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로 재야운동권의 다수 원내진출이 꼽히고 있다. 민주당 입당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모두 16명의 당선자를 냈다. 그 가운데서도 서울 성북을구 당선자 신계륜씨와 영등포을구에서 2백59표차로 민자당 나웅배 후보에게 석패한 김민석씨는 80년대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점에서 특히 관심을 끈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이들에게 예상외로 표를 몰아준 것을 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한 심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들의 학생운동 경력이 유권자들이 갈구했던‘참신성’의 기준에 부합됐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이번 선거에 출마했던 사람들 외에도 80년대 학생운동 주역들 중 정당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많다. 또 재야운동단체 언론계 학계와 교육·출판·문화·종교계 등 사회 각 방면에도 광범위하게 진출해 있다. 한때 당국으로부터 ‘좌경용공’의 굴레를 쓰고 체제파괴세력으로 취급당했던 그들은 변화된 상황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을까. 그동안 크고 작은 사건으로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80년대 주요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인생유전과 현주소를 추적해보았다.

기자·국회의원된 80년의 두 주역
  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이하면서 전국의 대학가는 민주화 열기로 온통 술렁거렸다. 그 열기의 진원지였던 각 대학 총학생회의 움직임은 따라서 일거수일투족이 주목의 대상이었다. 특히 당시 학생운동의 실질적이며 공식적인 구심점이었던 서울대 총학생회는 말 그대로 태풍의 눈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씨(36·영어교육과 77학번)는 역사의 분수령으로 볼만한 주요한 결정을 내렸다. ‘5·15 서울역 퇴각결정’이 그것이다. 80년 5월15일 서울역 앞 광장에는 10만여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운집하여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연죄시위를 벌였다. 이날 서울시내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집결한 10만명의 학생대중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를 놓고 입장이 갈라졌다. 고려대 신계륜씨와 숭전대 윤여현씨만이 “계속 시위를 벌여 군부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심재철씨를 중심으로 한 나머지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이 정도면 우리 의사를 충분히 표시했고, 병력이동 첩보가 계속 들어오는 상황에서 밤이 깊으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할지 모르니 일단 퇴각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이틀이 지나 전국적인 비상계엄 확대와 함께 신군부세력이 전면에 나섰고 그 처절했던 9일간의 광주항쟁이 시작됨으로써 한국의 역사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갔다. 그뒤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포고령 위반’ ‘내란죄’등 굵직한 죄명을 쓰고 속속 체포되었다.

  심재철씨는 현재 문화방송 사회부 기자로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심씨의 입장은 이렇다. “역사의 분수령이 된 싸움에서 쉽게 물러난 데 대해 운동사적으로 ‘패배’ ‘오류’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그것을 겸허히 수용한다.” 심씨는 앞으로 방송을 통해 사회지도층·고위층의 ‘대국민사기술’을 집중적으로 조명할 계획을 갖고 있다.

  역시 80년에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서울역 시위를 주도했던 신계륜씨는 이번 총선에서 성북을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80년대 학생운동 출신으로 최초로 금배지를 달았다. 82년 봄 출소한 그는 구로 인천 안산 등지에서 5년여에 걸쳐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지난해 ‘통추회의’를 중심으로 한 야권통합운동 때 노동계 대표로 참여했다가 민주당에 입당, 제도정치권에 첫발을 내디뎠다. “80년대 학생운동 세대로서 의정활동을 과학적으로 벌여 유권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당선 후 그의 포부이다.

  80년 ‘서울의 봄’ 주역들인 당시 각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요즘도 두달에 한번 꼴로 모인다. 주로 80년 당시 자신들의 결정에 대한 잘잘못을 따져보고, 앞으로 유익한 일들을 해보자고 뜻을 다지는 자리가 되고 있다.

  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수사결과 발표 때 신문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한 이름이 있었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씨가 바로 그다. 광주문제를 ‘김대중 내란음모’로 조작했던 시군부는 그 사전 모의과정에 정동년씨를 끌어넣었다. 이로 인해 정씨는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82년말에 사면, 석방됐다. 현재 정씨는 광주에서 ‘국민연합광주전남연합’ 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직원 10명을 데리고 건축설비를 하는 ‘세창설비’ 사장이기도 하다.

  이번 총선에서 정씨는 민주당도 문제점이 많다고 여겨 광주동구에 출마한 시민후보 이문옥씨를 적극 밀기도 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민주당이 이번 일로 자극을 받지 못한다면 앞으로 본거지에서조차 더 큰 외면을 받을 것”이라고 정씨는 강조한다.

  5·17 이후 83년말까지의 기간은 학생운동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학생운동의 이념논쟁이 싹튼 때이기도 하다. ‘무림·학림논쟁’으로 불리는 것이 이념논쟁의 시초인데, 이 논쟁은 광주항쟁을 겪으면서 던져진 사회변혁의 방법을 둘러싸고 80년 12월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무림진영은 “극도의 탄압국면에서 시위만 벌이는 것은 학생운동 역량을 보존, 민중운동에 집단적·체계적으로 수렴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 무림측의 대표주자는 김명인씨(36·서울대 국문과 77학번)였다. 이에 반해 학림진영은 “80년 5월의 좌절은 전위조직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직을 건설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투쟁을 벌여 군부독재정권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진영의 구성원은 주로 이태복씨(현 <주간노동자신문> 대표)의 영향을 받은 서울대 흥사단 아카데미서클의 77학번들이었다.

  그러나 80년말 무림측 김명인씨가 서울대에 뿌린 유인물을 입수한 공안당국은 “내용이나 술어가 학생운동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며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벌였다. 이로써 81년에 이르까지 무림·학림에 연루된 수많은 학생들이 구속·강제징집·수배되어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치명타를 입었다.

“전문성 발휘해 민중에게 봉사하겠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씨는 83년 8월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후 풀빛출판사 편집장으로 들어갔다. 그 뒤 문학평론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새로운 민족문학은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 민족문학 창작주체를 둘러싼 80년대 평단 최대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 그는 “최근 국내외 정세 변화로 민중문학의 입지가 많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방법론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앞으로도 계속 견지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한다.

  83년 12월6일 5공화국 정부는 그동안의 강경노선에서 후퇴, 해직교수 복직과 제적생 복교조처 등으로 대표되는 유화조처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84년이 되자 5·17로 중단됐던 총학생회의 부활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이때 부각된 인물이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이정우씨(공법학과 81학번)였다. “압제를 불살라라”로 시작되는 이씨의 대중연설은 학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이씨는 특히 84년 9월에 발생한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사건’에 연루돼 당선 4일 만에 제적되고 경찰의 수배를 받는 몸이었으나 기막힌 변장술을 사용, 각 대학의 주요 집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수완을 보였다. 그는 이 해 11월3일 학생의 날을 기해 연세대에서 ‘전국 대학생 대표기구회의’(전대의) 구성을 주도해 이듬해 발족한 ‘전학련’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 뒤 붙잡혀 구속된 그가 국민들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90년 4월17일. 총무처가 발표한 제24회 외무고시 최종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끼여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는 외시 합격소감을 “통일에 대한 관심”으로 밝혔다. 그러나 그는 바로 외교관 연수에 들어가지 않고 지난해 10월에는 사법고시에, 11월에는 행정고시에 합격함으로써 ‘고시 3관왕’이 되었다. 현재 사법연수를 받고 있는 이씨는 “변호사인 부친의 권유로 고시 3과를 다 보았다”면서 “최종 진로는 아직 확정하지 않았으나 전문성을 발휘해 민중에게 봉사할 수 있는 분야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85년 들어 학생운동권은 적극적인 투쟁방식의 하나로 민정당사 미문화원 노동부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등 각종 기관·건물에 대한 점거농성을 부쩍 많이 벌였다. 당시 이들 점거농성을 비롯한 모든 학생운동은 ‘전학련’이라는 전국 규모의 대학생 대중조직과 ‘삼민투’라는 공개적 투쟁기구가 주도했다. 따라서 전학련 의장이었던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민석씨(27·사회학과 82학번)와 삼민투위 원장이던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허인희씨(28·정외과 82학번)는 당국으로부터는 물론이고 국민들로부터도 그 해 가장 주목받는 인물들이었다.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이 터지자 공안당국은 그 배후로 즉각 김민석씨를 지목, 전국에 수배했다. 그 해 6월7일 서울대에서 열린 국민대토론회장에서 빠져나오다 체포, 구속된 김씨는 88년 2월에 석방된 후 청년운동에 주력해왔다. 그는 지난해 야권 통합과정에서 85년 성균관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오수진씨,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오수진씨,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정태근씨와 함께 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끄는 ‘민주연합’으로 들어가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번 14대 총선 때 영등포을구에 출마, 부총리를 지낸 민자당 거물급 나웅배씨와 맞붙어 2백59표라는 근소한 차로 패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현재 구부재자 투표에 대한 진상규명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김씨는 “국민들은 내용면에서 내가 나씨에 승리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번 선거결과에 대해 젊은 나이이므로 반성하고 나아가라는 유권자의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85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겸 전국대학삼민투위원장이었던 허인희씨는 그해 9월5일 체포된 뒤 역시 88년 2월 석방돼 그동안 ‘나라사랑청년회’(나사청) 회장을 맡아왔다. 현재 ‘나사청’은 정회원 5백명에 등록회원 2천명을 가진 직장인 중심의 청년운동조직이다. 허씨는 89년 10월 나사청 회원 교육자료로 연세대 교지 내용 일부를 복사해 돌렸다가 국가 보안법 위반혐의로 다시 구속돼 1년간 감옥을 살고 나오기도 했다.
  “당시 교지 편집자나 필자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으나 그것을 복사한 나만 구속됐다”고 말하는 그는 “이제는 수배나 징역 안받으려고 신경쓰지만 당국이 내 옛 이름값을 쳐 주는 것 같다”며 씁쓰레한 웃음을 머금는다. 이번 총선에서 재야단체의 전국연합이 선정한 ‘민주후보’ 중 고려대 선배인 민주당 성북을구 지구당 출마자 신계륜씨를 나사청 조직원들과 함께 지원한 그는 이번 경험을 살려 대통령선거에서도 “민주후보 승리에 앞장서겠다”는 계획을 잡고 있다.

  수척한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끼고 서울미문화원 창문에 붙어서서 구호를 외치던 한 대학생의 얼굴은 내외신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혀 이제는 역사의 앨범에 들어갔다. 그가 바로 서울대 삼민투공동위원장이던 함운경씨(28·물리학과 82학번)이다. 88년 2월 출소한 함씨는 그동안 ‘김세진·이재호 추모사업회’(회장 문익환) 운영위원으로 일해왔다. 그 역시 공안당국으로부터 상징적인 ‘용공인사’로 낙인찍혀 지난 89년말에는 강연내용이 문제돼 구속됐다가 90년에 출소했다. 최근에는 김민석씨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다.

  86년 7월 온 국민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주인공 권인숙씨(28·서울대 의류학과 82학번). 온갖 시련을 딛고 현재 서울 가리봉동에 40평 크기의 ‘노도인권회관’을 개설해 노동자 인권옹호에 앞장서고 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과 관련해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노동인권회관건립에 쏟아부었다. 지난 89년에는 82년 서울대 학생장을 지낸 김상준씨와 결혼해 과천에 보금자리를 꾸몄다. 이번 선거에서 민중당이 참패해 우리 정치풍토에 크게 실망했다는 권씨는 앞으로 여성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동안 노동인권회관을 운영하며 느낀 노동자 실태, 여성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등을 묶어 수필집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80년대 학생운동 주역들은 80년대 초·중반 무렵 총학생회장을 지냈거나 굵직한 사건에 연루돼 일반인에게 비교적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이다. 이같은 공개적 대중운동과는 달리 시기마다 학생운동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 속에 두각을 나타낸 지도부도 없지 않았다.

사회·민족에 대한 열정 변함없어
  80년대초 무림·학림논쟁에 뒤이어 나타난 85년의 ‘깃발·반깃발 논쟁’, 그리고 86년초부터 등장한 ‘자민투·민민투 논쟁’이 그것들이다. 깃발그룹은 학생운동이 정치투쟁과 민중지원 투쟁 등 사회민주화 투쟁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깃발>이라는 팸플릿에 담아 편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84년 12월 민정당사 점거투쟁도 여기에서 나왔다. 대표주자는 문용식씨(서울대 국사학과 79학번)였는데, 그는 85년 ‘민추위’를 결성해 NDR노선(민족민주혁명론)을 내세운 장본인이다. 85년 10월 민추위사건으로 검거된 문씨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에 못 이겨 배후인물로 김근태씨를 지목했고, 김근태씨는 이렇게 해서 남영동에서 엄청난 고문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문씨는 푸른산출판사 대표이사로 있으면서 서울대 외교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늦공부에 열중하게 된 문씨의 변은 이러하다. “80년대는 이데올로기 과잉시대였고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구조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는 첨예한 투쟁의 장에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싸웠느냐만으로 지식인들의 완결적 생활 여부가 가름됐다. 그러나 지금은 올바른 비전과 전망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전문영역을 공부함으로써 정책비전을 제시해 민중에게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희마이다.”

  80년대는 국내 정국의 파행적 전개 속에서 학생운동의 폭발과 대량구속의 악순환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이 시기에 배출된 수많은 학생운동 주체들은 90년대를 거치면서 크게 두가지 형태로 분화되고 있다. 한 쪽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 운동에 투신하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한 부류는 변화된 국내외 정세 속에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다양한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나 양쪽 다 당시 우리 사회와 민족에 대해 지녔던 열정과 뜻은 스스로 존중하고 있다. 한 시대를 움직인 엘리트라고도 볼 수 있는 80년대 학생운동 출신들이 앞으로 우리 사회 발전에 어떤 몫을 할지는 여전히 주목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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