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륙의 악령, 부족주의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3.06.2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탈냉전후 민주주의ㆍ시장경제 도입…부족간 내전으로 대개 실패

지난 6월6일 현충일 아침 묵념시간을 알리는 짤막한 사이렌 소리가 나지막히 울려퍼지던 그 시간, 토요일 자정을 막 넘긴 서부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서는 기막힌 참상이 벌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병사가 수도몬로비아 북동쪽 60km 지점에 있는 난민수용소를 습격하여 순식간에 3백여 명을 살육했다 현장을 목격한 유엔 난민 고등판무관 오거스틴 마히가씨는 “그들은 닥치는 대로 총을 쏘고 난민들의 목을 베었다. 팔과 다리르 부러뜨렸고 머리를 깨고 골을 들어냈으며,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땅바닥에 내던지기도 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이였다”라고 참혹했던 순간을 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89년 이래 3년반을 끌어온 라이베리아부족 전쟁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것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수천년간 되풀이되어 온 죽임과 죽음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소연방 붕괴로 냉전 질서가 무너진 뒤 아프리카 대륙엔ㄴ 한동안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열풍이 불었다. 91년 3월 선거를 실시한 베냉을 선두로 25개 나라가 경쟁 원리에 의한 선거를 실시했거나 실시할 예정이다. 선거나 내전을 통해 89년 이래 20여 명의 독재자가 축출됐다. 또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조언에 따라 23개 나라가 획기적인 경제 자유화 조처를 도입했다.

이같은 움직임을 보면서 이제 아프리카에도 평화와 건설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정치ㆍ경제 실험에서 대개 실패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내전ㆍ기차ㆍ질병이 독버섯처럼 솟아났다. 유엔이 선정한 세계 최빈국 42개 가운데 29개가 사하라 이남의 ‘블랙 아프리카’에 몰려 있다. 세계은행은 ‘아프리카는 95년이 되어도 70년 소득을 회복하기 힘들다’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아프리카에서는 “통치=일당 독재”
전문가들은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가 아프리카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원인으로 해묵은 부족주의(tribalism)와 독재 체제, 그리고 50년대에 사회주의를 도입한 이래 관행이 된 중앙통제 경제를 꼽는다.

부족주의는 아프리카 정치를 특정짓는 가장 중요한 용어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현 국경은 1884년 이른바 ‘베를린 회의’에서 서유럽 식민국가들 간의 정치 흥정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생국들은 모두 유럽식 민족 국가와의 거리가 먼 多부족 국가들이다. 60년대 초반 독립한 아프리카 각국은 국경의 테두리 안에서 부족간 통합을 이루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그 통합은 각 부족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정당 간의 경쟁과 균형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느 한 부족의 정당ㆍ지도자가 배타적ㆍ독점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나이지리아의 한 고위 관리는 “아프리카 말에는 아예 ‘야당 지도자’라는 개념이 없다. 오직 ‘政敵’이라는 말이 있을 뿐이다. 아프리카에서 통치란 본질적으로 행정부가 주도하는 일당 독재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부족주의와 떼놓을 수 없는 것이 뿌리깊은 과두체제의 전통이다. 케냐의 모이 대통령은 서방측이 차관 제공의 전제조건으로 다당제 민주주의를 도입하라고 요구하자 “아프리카의 정당은 각 부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당체를 도입하는 것은 곧 각 부족간의 상쟁에 불을 붙이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라며 거부했다. 이는 케냐에만 국한하는 사정이 아니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다당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는 한군데도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뒤틀린 국경선 아래 깔려 있던 부족주의는 냉전 이후 생겨난 힘의 공백을 틈 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미ㆍ소 냉전 시대에는 두 고래의 세력 확대 경쟁 덕분에 아프리카 새우들이 엄청난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의 원조가 끊긴 지금 기존 지도자들은 종이 호랑이일 뿐이다. 토고 자이르 앙골라 모잠비크 수단에서도 부족들끼리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앙골라에서는 4개 부족이, 라이베리아에서는 17개 부족이 대립하고 있다. 세계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라이베리아 사태는 부족 전쟁의 전형이다.

국경선 긋기 도화선 된 메리트리아 독립
이와 관련해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분명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대부분은 부족간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분리 독립보다는 현정권의 전복과 권력장악을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다. 바로 이 점이 끝없는 아프리카 내전의 진짜 원인일 것이다.

부족주의가 득세하면서 토착 국가의 붕괴현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사실 아프리카에서 국경 문제는 그동안 신성불가침으로 거론 자체가 금기시되어 왔다. 지금의 국경이 엉터리이긴 하지만 그것을 고치려 할 경우 엄청난 혼란과 분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소연방 해체가 한창 진행될 무렵 서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국경 고수를 선언했다 그들은 과거 나이지리아나 콩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최근 유고에서 벌어지는 분리와 통합을 둘러싼 전쟁을 보며 분리 독립이 얼마나 참혹한 희생을 요구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금기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에리트리아가 지난 4월23일 실시한 선거를 통해 독립을 선포한 것은 아프리카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에리트리아는 아프리카에서 탈식민지시대 이후 처음으로 ‘분리’라는 방식으로 독립한 나라가 됐다.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각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제2, 제3의 에리트리아가 나탈 경우 초래될 혼란이다. 아직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만 외국의 아프리카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아프리카는 앞으로 10년 동안 새로운 국경선을 긋기 위해 몸살을 앓아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치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경제 문제이다. 탈냉전 후부터 서방측은 원조와 민주화를 연동시키기 시작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90년에 열린 佛ㆍ阿 정상회담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개혁 의지가 없는 나라에는 더 이상 지원할 생각이 없다”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에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무장관은 “억압 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나라는 우리의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프리카가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한 직접 계기도 사실은 차관을 미끼로 한 서방측의 이같은 압력이다.

계속 늘어만 가는 대외채무
그러나 서방측의 조언 아래 진행된 경제자유화는 성과보다 부작용만을 키워왔다 그동안 일당 지배 아래서 주앙통제 경제를 유지해온 아프리카 경제는 부패와 비효율이 극에 달했다. 70년대말 이래 지속적으로 하락해 온 1차산품 가격 때문에 농작물이나 광물을 주로 수출해 온 아프리카의 무역수지도 점점 악회되어 왔다 폭발적 인구증가와 한발로 앙골라와 모잠비크의 경우 1인당 곡물 소비량이 15년 사이에 절반으로 줄었다.

이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각국은 세계은행으로 대표되는 서방측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각국은 90년대 들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내놓은 방안에 따라 ‘구조 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획기적 경제 자유화 조처들-수출입 규제 완화, 통화 평가절하, 보조금 중단, 가격 자유화, 국영기업 민영화-등을 단행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국제통화기금의 보증을 받아 빚을 낼 수 있었다. 짐바브웨 같은 사회주의 국가도 세계은행의 대출을 얻기 위해 자유시장경제로 ‘개종’했다.

그러나 구조 조정은 결코 순조롭지 못했다. 나이지리아와 짐바르웨에서의 통화 절하는 높은 인플레를 초래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자 이 두 기구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이 감정은 점차 적대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다. 올해 케냐의 대니얼 모이 대통령은 바로 자신이 도입했던 경제 자유화 정책을 폐지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을 ‘독재적’ 그 정책을 ‘자살 행위’라고 혹평했다.

세계은행은 최근 <왜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구조 조정이 실패했나)라는 보고서 초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곧 회수됐고 더 온건한 제목으로 수정됐다. 세계은행의 경제학자들은 실패한 원인에 대해 ‘취지는 좋았지만 실천이 잘 안됐다’는 이유를 내걸고 있다. 일부에는 구조 조정이 선진국의 새로운 식민 지배의 시작이라고 보는 비판론도 있다. 그러나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세계은행의 주문을 거부할 재간이 없다. 어떻게든 서방측에 잘 보이면 얼마간의 채무를 면제받을 수 있을리라는 기대도 없지 않다.

엄청난 대외채무에서 원인을 찾는 견해도 있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 의장인 바반기다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91년 유엔 총회에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요인은 대외채무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비산유국이 많은 사하라 이남 ‘블랙 아프리카’ 나라들의 채무는 심각한 상태이다. 유엔 아프리카 경제위원회(ECA)는 91년도 아프리카 채무액을 2천8백억달러로 추정했다. 그 가운데 3분의 2가 사하라 이남에 집중되어 있고 그 액수는 80년 이후 세곱으로 늘어났다. 각국이 돈을 더 빌린 탓도 있지만 지난 10년간 이자를 거의 갚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이지라아 코트디브와르 잠비아 케냐 짐바브웨 등 그런대로 살 만한 몇몇 나라들이 1년에 갚은 빚은 아프리카 전체가 깊은 빚의 3분의 2에 달한다. 내전에서 막 벗어나고 있는 모잠비크의 경우 이자의 12%밖에 갚지 못하고 있다. 브룬디는 예산의 30%를 빚 갚는 데 쓰고 있다. 기껏 벌어들인 외화를 이렇게 쓰고 나면 도로 포장, 깨끗한 식수, 예방 접종 등에 쓸 돈이 없다. 아프리카가 이자 갚는데 쓰는 돈은 보건을 이해 쓰는 돈의 네배에 달한다.

자연 재해까지 가세
모든 원인이 정치ㆍ경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짐바르웨와 잠비아에서는 시장경제를 도입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작년에 금세기 최악의 한발이 들어 그렇잖아도 중앙통제와 부패로 엉망이 된 나라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장 시급한 것은 아프리카인들이 최저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 권력의 권위가 무너지고 온 나나라가 모래알처럼 부서져가는 현실에서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것은 아무 데도 없다.

혼란이 이어지면서 국제 사회의 개입이 재개됐다. 92년 12월 미군이 소말리아에 대규모로 상륙한 것은 60년대 벨기에령 콩고 내전에 개입한 이래 30년 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사회의 군사개입은 점차 확대되는 추세이다. 소말리아에 이어 모잠비크에도 22개국으로 구성된 평화유지군 6천명이 파견됐다.

91년이 아프리카에 민주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해로 기록되었다면 92년은 민주화가 진로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그럼 93년은 어떤가. 불행히도 형편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진ㄴ 6월5일 소말리아에서 발생한 유엔군과 토착군벌의 총격전은 아프리카에서의 평화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작년 12월 미군이 소말리아에 진주할 무렵 수단의 한 정치인은 “만약 미군이 적당한 선에서 개입을 중단하고 돌아가 버린다면 아프리카는 세계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또다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군 공병대 2백50명이 곧 소말리아에 파견될 예정이다. 아프리카의 평화는 더 이상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韓宗鎬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