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깊은상처’
  • 부다페스트·김성진 통신원 ()
  • 승인 199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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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난민수용서

‘비치케’ 현장취재 / 死線 넘은 유고인 등 ‘불안한 나날’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비밀경찰 ‘세큐리타테’가 마지막 발호를 하고 있던 89년 12월. 이들에 쫓기던 한 루마니아인 부부가 걸음마를 갓 시작한 연년생 두 아이를 데리고 국경을 넘고 있었다. 그들은 국경선으로 접근하면서 가지고 있던 짐을 모두 버리고 배낭 하나씩만을 메었다. 그 배낭 속에는 아이들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아이 크기만한 곰인형이 하나씩 들어 있었다. 그들은 인형 속에 든 솜을 급히 제거했다. 두 아이에게 준비한 수면제를 먹인 뒤 잠이 든 아이들을 인형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인형의 터진 부분을 봉합했다. 실낱 같은 소리 하나도 목숨을 앗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살을 에는 추위와 비밀경찰의 추적 속에서 그 ‘인형배낭’을 메고 10여시간의 사투 끝에 헝가리로 넘어 오는 데 성공했다.

 

비밀경찰과 민족분규와 굶주림에 쫓겨

 헝가리에서 가장 큰 비치케 난민수용소는 최근 개소 3주년을 기념해 사무실 옆 방 2개를 터서 ‘난민박물관’을 만들었다. 박물관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진흙이 아직도 묻어 있는 두 개의 ‘인형배낭’이 걸려 있다. 비치케수용소 안내를 맡은 난민담당관 이스트만 페렌츠씨는 이 배낭에 얽힌 사연을 그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1년간 이곳에 머무른 뒤 독일로 떠나 그곳에 정착했다. 그 아래 책상 위에는 물에 젖었거나 반쯤은 찢어진 각국의 주민증이 널려있다. 바로 옆 전시대 위에는 난민들이 지니고 있던 비상식량 따위의 생필품이 놓여 있다.

 비치케는 부다페스트시에서 약 50km. 철책으로 둘러쳐진 울타리 안에 단층 건물 20동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것이 군 진지를 연상케 한다. 이곳에 수용된 1백50명의 난민은 제각기 탈출할 때의 극적인 사연을 하나씩 간직한 채 하루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수용소 입구에는 가드레일이 내려져 있으며 항상 경찰이 엄중한 경비를 펴고 있다. 입구 왼편으로는 사무실 식당 의료센터 등 부속건물이 자리잡고 오른편으로는 난민 수용시설 20개동이 줄지어 서 있다. 건물 사이사이로 국적이 다른 어린이들이 서로 말은 다르지만 함께 어울려 뛰놀고 있다.

 난민 수용시설 1개동에는 모두 6개의 방이 있고 한켠에 공동 취사장과 목욕탕 화장실이 있다. 입구에는 러시아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등 각국어로 된 공지사항이 게시되어 있다.

 유고내전이 발발한 지난해에는 특히 크로아티아 공화국에서 수천명이 헝가리로 넘어와 이곳에서도 1백40명이 천막을 치고 노숙했다. 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과 함께 모두 귀국했다.

 일단 이곳에 수용된 난민들은 유엔 고등판무관실과 헝가리 내무부의 공동 심사로 난민자격이 부여되어 헝가리 거주허가를 기다리거나 제3국으로 갈 예정인 사람들이다. 현재 헝가리 내무부 산하 난민국 집계에 따르면 헝가리 내의 난민은 모두 7만5천명 정도. 그나마 4만명 정도만 당국에 신고한 상태며, 나머지는 대부분 밀입국해서 여권 만료일을 넘기며 불법거주하고 있는 상태다.

 일단 난민자격이 부여되면 비치케 등 3개 난민수용소에 분산 수용된다. 전국에 있는 5개 임시수용소의 심사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본국에 송환된다.

 비치케 5호동에는 유고내전의 피해자들이 수용되어 있다. 토트 도라씨(32)는 6살난 딸과 함께 지난해 가을 이곳으로 왔다. 헝가리계인 그는 세르비아계인 남편과 함께 그동안 크로아티아 공화국에서 행복한 생활을 해왔으나, 전쟁이 하루아침에 그의 가정을 파괴했다. 남편은 전쟁의 와중에서 세르비아로 도피해버렸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견디다 못한 그는 천신만고 끝에 딸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는 곧 국민학교에 일자리를 얻게 되어 다소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바로 옆방에는 유고의 보이보디나주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던 렌젤 라슬로씨가 들어 있다. 헝가리계인 그 역시 세르비아인 주민과의 감정 악화로 세르비아 경찰의 추적을 받다 이곳으로 왔다. 그는 “부모와 동생이 그곳에 살고 있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면서 잠을 잘 때에도 그곳에 다시 붙들려가는 꿈만 꾼다고 하소연했다.

 바로 옆 동에는 루마니아에서 지난 90년 이곳으로 온 이보야 치리야씨가 살고 있다. 수용소 고참인 그는 6명의 식구와 한방에 기거하고 있다. 전기 수리공인 남편이 노조운동 때문에 루마니아 경찰의 미움을 사 견디다 못해 이곳으로 넘어왔다. 두 딸 카탈린(15)과 모니카(14)는 현재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며 큰아들 산도르(10)는 국민학교에, 막내 이스트반(4)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치리야씨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된 이후에도 루마니아 상황은 나아진 게 없다”고 단언했다. 동행한 난민담당관 페렌츠씨는 이 가족이 내년쯤 헝가리 국적을 취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헝가리 국적을 취득하는 데는 대략 2년 정도 걸린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대식당에 가보니 30여명의 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난민들은 하루 식권3장을 지급받아 이곳에서 식사한다. 간단한 수프와 빵, 그리고 샐러드를 곁들인 음식이 나온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온 한 중년부인은 “그래도 여기에는 먹을 것은 충분하지 않느냐”며 구소련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 수 있을 지, 혹시 다시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가야 될지도 모른다며 울먹였다.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헝가리 경제상황도 이들에게 심각한 심리적 압박이 되고 있다. 비치케의 한 인쇄소에 일자리를 마련했다는 루마니아인은 “정부의 배려로 일자리를 얻긴 했지만 다른 인쇄소들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을 때마다 아찔해진다”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제3국行·헝가리 국적 취득 요원

 이곳에 수용된 난민 대부분의 걱정은 불안한 미래이다. 제3국으로 가는 길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헝가리 국적 취득도 요원하다. 각국의 입장이 서로 상반되어 ‘뜨거운 감자’를 받아든 양 문제 해결에 성의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 주재 독일 영사관은 난민 가운데 독일계일 경우 거의 입국비자를 발급해주다가 통일 이후에는 비자발급을 사실상 중단하고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난민국의 한 관리는 “헝가리는 그동안 서방으로 가는 난민의 중간 기착지였으나 서방의 입장 변화로 종착역이 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 관리는 “난민의 약 80%가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구소련의 민족분규와 경제난으로 그곳으로부터 대규모의 난민이 유입돼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헝가리가 무작정 난민을 수용해 이들을 먹여 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난민담당관 페렌츠씨는 개인적으로 난민박물관의 전시물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이런 추세대로라면 내년엔 더 큰 전시실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고 걱정했다. 2차대전 이후 이곳 동유럽을 유린한 공산통치는 마침내 무너졌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난민수용소는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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