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포기 대가로 미 원전 기술 요구
  • 남문희 기자 (bulgot@sisapress.com)
  • 승인 199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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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 북 회담서 극비 제안…《시사저널》집중취재로 확인

뉴욕에서 열린 미 . 북한 고위급회담석상에서 북한의 강석주 외교부부부장이 미국의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차관보에게 영변 핵재처리 시설의 존폐와 관련해 획기적 제안을 하였음이 《시사저널》의 집중취재 결과 밝혀졌다.

 국내외 소식통에 따르면 강석주 대표는 갈루치 미국 대표에게"만약 미국이 경수용원자로 기술을 북한에 제공할 경우 북한은 영변의 핵재처리 시설을 녹여 없애겠다(melt down)"는 내용의 제안을 했다고 한다. 북한 대표의 이같은 제안에 대해 미국 대표는"명백하게 답변하지는 않았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그러나 대다수 국내외 전문가들은 앞으로 미 . 북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미국측이 이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경우 북한의 핵을 둘러싼 한반도 핵 정세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경수용원자로 기술과 연변의 핵재처리 시설을 맞바꾸겠다는 취지의 발언은 이미 지난해 초부터 북한 당국자에 의해 간간히 언급된 바 있다. 그러나 북한 대표가 미국 대표를 맞대면해 직접 제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지난해에는 북한 핵을 둘러싼 내외정세가 상당히 이완된 상황이었던 데 비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북한핵에 대한 긴장감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상황에서 북한 대표가 핵재처리 시설을 녹여 없애겠다는 강력한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북한 대표로부터 이런 제안이 나왔다는 소식은 그동안 극소수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 소문으로만 은밀하게 떠돌았다. 최근 정부 내의 신뢰할 만한 한 소식통으로부터 이런 정보를 입수한《시사저널》은 미 . 북한 회담 주무 부서인 외무부 관계자와 미국 정부 소식에 밝은 서방측 소식통을 통해 이런 제안이 실제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외무부 담당 실무자는"미 . 북한 회담 내용은 현재로서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확인해줄 수 없다. 그러나 취재 내용은 정확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이같은 내용이 사실임을 간접 시인했다.

6월10일 비공개 토론서 밝힌 듯
 북한 대표가 이런 제안을 할 당시의 분위기와 미국측의 반응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서방 소식통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북한 대표의 제안이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비공개 토론 형식(off the record discussion of what each other wants)'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네차례 열린 뉴욕 회담에서 양측 대표가 비로소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를 시작한 것은 6월10일 3차 회담 당시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 주변의 유엔 플라자 호텔에서 있었던 양측 대표의 단독 오찬회동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북한 대표의 제안도 바로 이 자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북한 대표는 이 문제를 제기는 했으나 강력히 요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아직 회담 진척 단계가 이 문제를 본격 거론할 상황이 아니라는'현명한 고려'에 의한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다. 북한측에서 이 문제를 요구 조건으로 제기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미국측도 이에 대해 명백한 답변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식통은"만약 핵사찰 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현안 논의에 진전이 이루어지고, 북한이 이를 남북한핵통제위원회나 경제교류위원회 내의 과학기술 교류협정 등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요구해 올 경우 미국은 도움을 줄 용의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미 . 북한 회담에서 나온 북한측대표의 이러한 제안은 현재 우리 정부 내에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문제가 미국이나 북한 양국 대표 사이에 본격 거론되기에 시기상조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입장이다. 특히 주무 부서인 외무부는 이 문제를 본격 거론할 경우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접근 시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직은 논의 자체를 우려하는 입장이다.

 외무부 담당 실무자는"북한 대표의 발언은 북한이 진정으로 발전용 원자로를 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영변의 핵재처리 시설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회피하기 위한 연막용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단계로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대단히 비현실적인 제안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통일원이나 다수의 핵공학자들은 앞으로 미 . 북한 회담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경우 결국에는 경수로원자로 기술 이전 문제가 실질적인 논의의 핵심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정부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잠시 서울을 방문한 미국 이스턴켄터키 대학 곽태환 교수(국제정치학)는"미 . 북한 회담이 진전될수록 북한의 핵 카드는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막바지에 북한은 핵 카드를 포기하는 대신 전력난을 극복하기 위해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경수용원자로 기술 이전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통일원의 한 관계자도"북한 대표가 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북한이 이번 회담에서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해졌다. 북한 핵 카드의 궁극적 목표는 경수용원자로이다"라고 지적했다.

 심각한 전력난에 빠져 있는 북한은 난국을 타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소련의 지원 아래 추진되던 신포 원자력발전소 건설 계획이 지난 89년 소련의 지원중단으로 무산되면서 북한의 원전 건설 계획은 심각한 차질을 빚어왔다. 당시 북한의 계획으로는 함경북도 신포 해변가에 440MW급 경수용원자로 4기를 지어 북한 전체 전력 공급의 약 15% 정도를 담당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후 소련이 내부 사정을 이유로 들어 기술지원을 중단함에 따라 이같은 계획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 소식통은 평화의 댐 건설의 빌미가 되었던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계획이 갑자기 강행된 것도 신포 원전 계획이 무산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원자로 개발했으나 안전성 문제 심각
 원자력발전소는 한번 지어 놓으면 운영 비용이 싸게 먹힌다는 이점이 있으나, 초기 투자 비용이 1기당 약 10억달러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북한이 자력으로 짓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의 엄청난 비용을 한꺼번에 투자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밖에 없는 실정이다. 핵금조약 탈퇴 문제로 상황이 악화되기 이전인 지난해 북한은 특히 미국을 겨냥해 경수용원자로 기술을 제공하면 재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는 발언을 수차례 해왔고, 이에 대해 한국 . 미국 . 일본 등 관계국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몇몇 국내 전문가들은, 지난해와 달리 미국과 북한만으로 협상의 테이블이 좁혀진 상황에서 남한을 배제한 채 양국 사이에 이런 거래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며 우려를 표시하고 있기도 하다. 미 . 북한 간의 대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미국으로서도 북한의 제의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경수용원자로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쉬운 중수용원자로와는 달리 발전용으로만 사용되는 상업용원자로이다. 따라서 냉전시대에도 동서 양측은 몇몇 핵심 기술을 제외하고는 상대방진영에 이 원자로를 판매하는 데 대해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았었다. 따라서 현재 원자력 산업이 사양산업화하다시피 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이 이런 제안을 구체적으로 제기할 경우 끝까지 마다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미 . 북한 대화에서 경수용원자로에 대한 협상이 진행될 것에 대비해 현재 정부 일각에서는 아직은 구상 단계이나 대비책을 강구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즉 앞날을 대비해 한발 걸쳐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 주변에서는"한국 기업들이 토목기술을 제공하고 일본이 발전용 설비를, 그리고 미국이 자금을 지원하는 국제적인 컨소시엄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원전기술 지원 문제를 한국정부가 주도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단기적인 실리 추구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다. 원전기술 지원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개발 의도를 포기하게 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고, 궁극적으로는 남북간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발판을 구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북한이 소유하고 있는 몇 기의 연구용 원자로들은 우선 안전성 측면에서 커다란 위험 요인을 갖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의 구식 원자로와 체르노빌 사태를 불러온 소련형 원자로를 자체 개발한 기술로 조금씩 개조하는 과정에서 안전성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핵공학자 사이에서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북한 원자로의 안전성을 보완하기 위한 기술 제공이다. 이처럼 기술 교류가 이루어지면 북한의 핵 관련 기술 수준이 거의 파악돼 핵의 투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구태여 핵사찰을 따로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주장이다.

 또 남북간 핵에너지의 평화적 교류는 분단 상황에서 왜곡된 남북한의 에너지 수급 구조를 보완하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지적되고 있다. 북한에 비해 석탄이나 수력이 부족한 남한은 에너지의 대부분을 석유와 원자력 발전에 의존함으로써 극심한 대외의존형 에너지 수급 구조를 보이고 있다. 자력갱생 원칙 아래 수력과 화력에 의존하고 있는 북한은 공업화의 진전으로 에너지 공급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이러한 양측의 기형적인 에너지 구조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동안 핵공학자들 사이에서는 비무장지대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해 남북한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방안, 또는 여름에는 수량이 풍부해 전력이 남는 북한에서 전력을 빌려오고 겨울에는 다시 되갚는 방안 등이 제시되기도 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의 이은철 교수는"남북한간 에너지 구조를 상호보완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에 원자력발전소 기술을 제공하는 것을 필요한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경수용원자로에 관한 서방측 기술을 도입하는 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신포 원자력발전소 건설계획이 무산된 이후 중국 정부의 강력한 권유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중국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서방측의 원전기술 지원을 주선하겠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같은 소식은 미국의 세계적 원전 회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알려졌고, 국내 모 재벌 총수를 통해 우리 정부에도 알려졌다.

 91년 말에서 92년 초에 걸친 이 시기는 남북한 핵문제에 있어 중대한 국면 전환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91년 9월 부시 대통령의 남한 핵무기 철거 선언, 91년 12월31일 남북비핵화공동선언, 92년 2월25일 비핵화공동선언 발효 등 획기적인 조처들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기되기도 했다. 6공화국 당시 정부의 통일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던 북한 전직 고위 관료는"91년말까지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해왔으나 이 때를 지나면서 핵무기 개발 의지를 포기한 것으로 당시 분석했다"라고 말했다.

정부, 한때 기술제공 긍정검토
 92년 들어 북한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대대적인 핵 평화 공세를 펼쳤다. 92년 4월 북한은 그동안 질질 끌어오던 핵금조약 가입을 선언했고 뒤이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을 받아들이는 등 그동안 의혹의 대상이 됐던 핵시설을 서방측에 공개하기 시작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 서방측이 북한에 경수용원자로 기술을 제공하면 영변의 핵재처리 시설을 포기하겠다는 북한 당국자의 발언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지난해 4월 김일성 주석은 <워싱턴 타임스>와의 회견에서"미국이 경수용원자로 기술을 제공하면 북한은 미국의 핵 의혹을 말끔히 씻어주겠다"라고 발언했고, 같은 달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이끄는 세계평화정상회의 대표단과 만난 자리에서는 신포 원자력발전소를 백지화했다고 설명하면서"앞으로 신포 원전을 포함한 5~7개의 원전을 서방의 기술 지원을 얻어 건설하겠다"라고 밝혔다.

 김주석의 발언을 필두로 5월에는 북한을 공식 방문한 한스 블릭스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에게 북한 당국자가 이 문제를 다시 공식 제의했고, 6월10일 리 철 제네바 국제기구 대사의 발언, 7월에 남한을 방문한 김달현 정무원 부총리의 비공식적인 제안 등 비슷한 제안이 쏟아졌다.

 당시 북한의 일관된 제안에 대해 한국 정부나 미국 정부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한 흔적이 엿보인다. 92년 6월11일 공로명 핵통제위원회 위원장이 주재하고 외무 . 국방 . 통일원 관계자가 참석한 정부대책회의에서는"북한의 핵재처리 시설 포기 의사가 명백하다면 우리측이 원자력 기술을 제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화답하기도 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리처드 솔로몬 미 국무부 동아시아 . 태평양담당차관보는"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대한 서방측의 우려를 해소하기위해 원자력 발전 연료를 플루토늄에서 우라늄으로 대체해도 좋다고 시사했다. 미국은 북한의 이런 전향적인 자세에 만족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경수용원자로 기술을 둘러싼 남 . 북한, 미 . 북한 간의 교감은 국제원자력기구의 특별사찰 강행과 북한의 핵금조약 탈퇴라는 초강수 맞대응으로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되살아나고 있다.
南文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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