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예술 작은 걸음마
  • 송준 기자 ()
  • 승인 1993.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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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연극 영화 춤 등 다양 “평론 자리잡아야 수준 향상”

 “아무리 봐도 주위에 나쁜 남자는 없었다. 그러나 억압받는 여성은 어디에나 존재했고, 그 집행자는 언제나 남성이었다”라고 홍진숙씨(‘사량’연구원)는《남성연구》를 공동집필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이 책은 한국 남성의 뒷모습을 조목조목 진단하고 있다. 일곱 가지 콤플렉스(가장·허세·카사노바·온달·엄마·크기·능력 콤플렉스)와 남성의 함정, 그리고 남자의 일생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하나의 남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 책은 보여준다(그밖의 단행본은 81쪽 표 참조).

 소설《꿈꾸는 인큐베이터》는 아이를 지운 여인의 내부 갈등을 진지한 아픔으로 치환하고 있다.《나는 실천한다. 내가 책에서 읽은 것을》(김 융·서지원 펴냄)은 양귀자의 소설《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희화한 것으로, 안성기를 모델로 한 ‘백승하’대신 마광수로 상징되는 ‘성기환’교수를 납치한다.《나는 실천한다…》에서 작가는,《나는 소망한다…》의 강민주가 모친(암달러상)이 남긴 막대한 유산으로 호사 생활을 하면서 남자 노예를 부리는 데 대해 “여성 문제에도 계급 갈등에도 철부지인 또 하나의 사회악”이라고 질타한다.

 문학 평론가 박혜경씨는《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공지영 지음)에 깔린 공격성을 경계한다. “페미니즘 소실이라고 해서, 적대감정을 가진 남녀 주인공을 중심으로 단순한 대립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갈등을 극복하는 심리의 가닥을 잡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문학 평론가 김경수씨는 또한“여성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고도, 일상속에서 여성의 고통과 갈등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이 생명력을 지닌다. 요는 작품의 밀도이다”라고 말했다.

 김성례 교수(강원대·문화인류학)는 방송에 반영된 여성주의에 관해 “시청률을 의식해 여성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지 못한다. 남성에 대한 기대와 환상, 그리고 분노가 뒤엉켜 나타나기도 한다. 억눌린 욕구와 스트레스를 대리 해소해줄 뿐이다”라고 분석했다.

 한편 지난해 11월1일부터 올해 6월13일까지 장기공연한 연극 <자기만의 방>은 ‘관객의 의식화를 목적으로 무대에서 하는 여성학 강의’임을 강조한다. 마손톱(마광수) 김동양(김용옥) 김생명(김지하)을 등장 인물로 삼아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을 논박하고, 춘향·심청·황진이·신사임당 등을 여성주의의 시각에서 재해석하는 내용을 주조로 한다.

 <탑걸스> <클라우드 나인> 등은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번역극이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이혜경 대표는 “여성주의 연극은 여성학적 지식과 작품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다”라고 말했다.

 영화쪽은 작품이 가장 빈약했던 데 비해 논의는 가장 떠들썩했던 장르였다. 올해초 ‘페미니즘 영화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영화 <그대 안의 블루>의 경우 이현승 감독 스스로 “본격적인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최근 ‘기획시대’와 ‘영화세상’이 공동제작에 들어간 영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원작이 페미니즘 소설로 부적격한 탓에 밀도 있는 페미니즘 영화로 탄생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떠들썩한 공개 논쟁 필요하다”
 다만 지난 7월초 열린 ‘페미니즘 영화제’<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서,  <딸이 되는 절차> <침묵에 대한 의문> <릴리스라는 표시> <그녀 이름은 베트남> 등 ‘이것이 페미니즘 영화’라고 내놓을 만한 작품이 몇편 나왔다. 이어서 열린 여성 영화 심포지엄에서는 페미니즘 비평에 대한 여러 주장이 난무했으나 이렇다 할 학설이 제기되지는 못했다. 이를 놓고 영화 평론가 김소영씨는 “이제 겨우 모니터를 시작한, 페미니즘 영화 비평의 원초적 수준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활동중인 영상 운동가 박혜정씨는 동두천·송탄 등 기지촌 여성 문제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한국에 와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한국 여성의 전화’는 성폭력 실태 교육비디오 <성폭력, 그 사슬을 끊고>를 제작해 배포중이다.

 무용가 박명숙씨는 지난 6월25일~26일 공연 <혼자 눈 뜨는 아침>에서 결혼과 함께 여성의 꿈이 좌절되는 내용을 춤으로 표현했다. 또 비디오 예술가 오경화씨는 ‘성’을 상징하는 물체를 듬뿍 사용해 여성성을 이미지화한 작품 <고백>을 올해초 발표했다.

 정현백 교수(성균관대·사학과)는 “평론의 구실이 중요하다. 페미니즘 예술의 수준은 평론이 어떻게 자리를 잡느냐에 달려 있다. 단단한 연구와 떠들썩한 공개 논쟁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최근의 예술적 시도는 일단 환영을 받는다. 연극 <자기만의 방> 각본을 쓴 류숙렬씨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가짜가 많았다. 가짜가 양적 팽창을 가져오는 동안 진짜가 질적 상승을 이루면 되지 않는가”라고 낙관한다.
宋 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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