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픈 의사 노릇 제 팔뚝에 히로뽕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1.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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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가까이에 마약류 즐비 … 스트레스 많아‘유혹’ 못 떨쳐

 환자에게 술·담배를 즐기라고 충고 할 의사가 있을까. 마약을 복용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처방할 의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 자신들의 음주·흡연율은 다른 직업인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약류로 분류되는 의약품을 남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문제가 된 한 의사의 히로뽕 상습복용 사건은 약물의 종류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히로뽕이어서 그렇지 약물남용 사실 자체는 놀랄 만한 것이 못된다.

 지난 4월23일 경찰에 구속된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유명 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신영우(44)씨의 사례는 의사들의 약물남용 실태와 원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좋은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신씨는 경찰에서 “처남(경우레저 대표 민경호씨·36·수배중)의 권유로 86년 7월부터 히로뽕에 손대기 시작해 도중에 1년반 가량 중단했으나 다시 투약해왔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신씨는 히로뽕을 통해 향략에 탐닉하지는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압박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부유층·재벌 2세의 행각’이란 말에서 연상되는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히로뽕을 가까이 하게 됐을까. 신씨는 경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복잡하게 얽힌 사회구조 속에서 비롯된 개인의 행동을 한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지속적인 압박감에 시달려왔으며 그런 심리상태에서 종종 해방되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다. 골프를 친 뒤 약물을 투약하고, 그래서 잠들어버리면 편안해지는 생활에 의존하게 됐다. 이것이 중독이라면 중독인데…히로뽕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잘못은 인정하지만 히로뽕 사용은 나의 필요와 판단에 따른 것이다.”

 중추신경흥분제로 분류되며 육체적 의존성(중독성)은 없으나 정신적 의존성(습관성)이 있는 히로뽕(‘필로폰’이란 일본제품 이름에서 나온 말로, 본래 약물이름은 메스암페타민)이 신씨에게 ‘필요’하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 많은 의사들은 히로뽕까지야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의사들 사이의 일반적인 약물중독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한 신경외과 전문의는 “과도한 스트레스와 약물접근의 용이성이 의사들을 쉽게 남용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한다. 현대사회의 직업 치고 스트레스가 없는 직업이 흔치 않지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야말로 만성적인 초조·불안감과 수면부족으로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돈 잘버는 직업으로만 인식돼 있는 의사의 일이 얼마나 ‘미칠 것 같은’것인지 일반인은 잘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수술 도중 환자의 핏줄 하나가 터져 비상이 걸렸을 때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환자의 혈압은 시시각각 떨어지고 터진 핏줄의 위치가 어딘지 도대체 알 수가 없어, 이제 더 이상 수술을 계속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때의 수술자 심정은 어떤 것이겠는가. 그대로 수술실을 뛰쳐나가고 싶다. 심지어 죽고 싶을 때도 있다."

 같은 병명이라도 환자의 증상은 대개 천차만별이어서 '공식대로'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사례란 거의 없고 새로운 환자를 대할 때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다가도 응급환자가 들어오면 치료하러 나가야 한다. 게다가 환자와 보호자의 태도는 갈수록 전과 달라지고 있다. "걸핏하면 따지려 들고 각종 매체를 통해 얻어 들은 일반적인 의학상식으로 '이런 게 아니냐'며 의사를 가르치기 일쑤"라는 것이다.

 환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날로 '살인자 아무개' 운운하는 빨간 스프레이 글씨가 병원 벽에 새겨지는 일도 있다. 의료사고에 대한 공포는 예나 지금이나 의사들의 가장 큰 스트레스이지만 환자가 사망할 경우 요즘은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정도라는 것이다.교수를 존경하지 않는 세태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는 더 이상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다. 보호자들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시비조로 상담하는가 하면 욕설도 예사로 내뱉고, 심하면 음주상태에서 "살려내라"며 칼을 들이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하는데 전국민의료보험제 실시로 의사의 수입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이다. 80년대초 종합병원 정형외과 과장의 월급은 4백만원 가량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월급이 훨씬 적으면서도 과중한 업무부담에 허덕이는 수련의들의 스트레스는 과장들과 비교가 안된다.

 의사사회의 도제적 풍토에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분초를 다투는 직무의 특성 때문에 의사들에겐 다급하고 날카로운 지시와 간섭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요즘 수련의들은 응급환자가 없고 의료사고 위험도 비교적 적으면서 돈을 많이 버는 성형외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안과 비뇨기과 등 전문의를 우선적으로 지망한다. 긴장과 피로가 일상화된 일반외과 등의 '비인기과' 의사들은 대부분 "술 담배 오락 등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어버리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루 담배 두갑은 보통이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는 경우도 흔하다"는것이다.

의료용 마약류 불법유출이 큰 문제
 요즘 의사들의 이러한 근무조건과 생활은 사회학에서 말하는 마약수용문화 형성의 충분한 배경이 되고 있다. 여기에 약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접근의 용이성이 더해져 의사들이 마약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구속된 신씨도 처음 주사하기 시작한 약물을 히로뽕이 아니라 의료용 신경안정제인 디아제팜(상품명은 '바리움')이었다.

 히로뽕은 중추신경흥분제(각성제)이지만 디아제팜 등 병원에서 쓰는 향정신성 의약품은 중추신경억제제(진통제)이다. 신씨와 다른 구속자들은 히로뽕을 구하기 어려울 때 마약에 의한 금단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한 '대체마약'으로도 바리움을 주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마약류로 분류되고 있는 의료용 향정신성 의약품은 이밖에 모르핀 코데인 펜타조신 페시딘 데메롤 등이 있는데 모두 신경안정제 진통제 진해거담제로 병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것들이다.

 지난 89년 불구가 된 다리의 통증과 업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못이겨 진통제 주사약인 페시딘을 상습투약하다 검찰에 구속된 건국대 민중병원 신경외과 과장 박기용씨의 경우도 같은 사례로 볼 수 있다. 당시 검찰은 박씨 외에도 약물을 남용하는 의사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했으나 그 이상은 밝혀내지 못했다.

 대검찰청 마약과, 보사부 마약관리과 등 당국에서는 의료인들의 약물남용이 극히 일부에 국한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신씨 사건에서 보듯이 의료용 마약류가 불법 유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유통관리 소홀이 주원인인데, 올해처럼 히로뽕을 지속적으로 단속해 1회 투약분(0.03g) 가격이 20만원까지 폭등할 경우 의료용 마약류는 '대체마약'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청소년의 마약입문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불법유출이 가져오는 폐해 중 하나 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사회지도층부유층의 타락'으로 비치고 있는 신씨 사건은 의료용 향정신성 의약품의 유통관리에 소홀한 당국과 의료인 자신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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