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연해주에 한인 '민족구역' 인정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3.10.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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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강제 이주 전 10년 자치 행정 단위 공식 운영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인해 연해주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하기 직전까지 이들은 독자적인 민족행정 단위들을 운영했었다는 사실이 한국을 방문중인 러시아의 한인 역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 8월20일부터 4개월간 국제교류재단(이사장 손주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중인 러시아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연구원인 남 스베틀라나 박사(역사학)는 최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37년 이전 극동 연해주에는 한인 민족구역 두군데와 한인 농촌소비에트 1백52개가 운영돼, 이미 한인자치주의 초기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민족구역 두군데란 두만강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포시에트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북부의 수찬 지역이다. 포시에트 지역은 28~37년 10년간, 수찬 지역은 35~37년간 민족구역이 존재했다고 한다.

한인 자치주 재건 운동에 역사적?법적 근거
 남박사가 지적하는 한인 민족구역이란 20년대 소비에트체제가 정착하는 초기 과정에서 형성된 일종의 소수민족 자치구역으로, 그동안 연해주 한인사 연구에서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부분이다. 특히 그의 연구가 주목받고있는 것은, 민족구역의 존재사실을 당시 소련정부의 극비문서 등이 철저하게 입증하고 있다는점과, 이러한 사실이 현재 중앙아시아 한인들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인 자치주 운동에 대한 역사적?법적 근거로 제시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90년 초부터 활발하게 거론되던 독립국가연방내 한인들의 자치주 운동은, 그동안 러시아 정부나 연해주 정부의 경계 움직임으로 인해 현재는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타지크 내전에서 볼 수 있듯 이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이 격화할 경우 위기 의식을 느낀 한인들에 의해 언제든지 다시 활발하게 제기될 수 있다는 여지가 있다. 또 연해주에 한인자치주를 건설하는 문제는, 만약 이것이 실현 가능하다면, 통일 이후 한반도와 연결된 하나의 경제공동체를 형설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여 벌써부터 북방 관련 기업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92년초 모스크바의 '과학'이라는 출판사에서 소책자 형식으로 소량 발간된 남박사의 연구 논문 <고려인 민족구역-한 연구자의 탐색의길>과 그밖의 자료를 통해 연해주 민족구역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연해주 한인들의민족구역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21년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한명세였다. 1922년 11~12월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레닌 생전 마지막 대회라는 코민테른 제4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당시 한국내 공산주의 세력이 일제의 탄압으로 거의 궤멸 지경에 빠짐에 따라 코민테른의 직접 지도를 결정한 대회로도유명하다. 고려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한 한명세는 대회 기간에 당시 러시아공산당 중앙기관 및 정부기관을 상대로 연해주에 한인들의 민족적?문화적 자치단위를 허용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당시 연해주 한인 사회는 복잡한 정세에 놓여 있었다. 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함으로써 러시아혁명에 대한 미?영?일의 간섭을 배제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 혁명정부는 더 안정된 조건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지방단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르 체제 때의 행정구역을소비에트 단위 및 각각의 민족단위로 세분화하는 행정영토 분할개혁이 이 해부터 본격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권력기구 창출을 위한 선거구 획정 등과 서로 맞물리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연해주지역의 경우 한인들이 민족구역 획정이라는 사업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를 극력 반대했던 러시아공산당 극동뷰로와맞서 싸워야 했다. 22년 12월 러시아공산당 극동뷰로는당시 일본 식민지인 조선과 가까운 연해주의 한인들을 통해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고 있다는 이유로 '연해주의 한인을 외국이나 중앙아시아로 추방하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코민테른 대회가끝난 뒤에도 한명세는 모스크바에 계속 남아 러시아공산당 극동뷰로의 결정사항을 맹렬히 반대하고, 그대신 한인자치구역을 설정함으로써 한인들 스스로 일본군의 침입을 차단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한인의 운명을 둘러싼 러시아공산당 극동뷰로와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은, 한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부치크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당시의 행정부격)와 코민테른 고려뷰로의 개입으로 인해 한인의 승리로 돌아갔다.

 한인들의 자치 단위로는 제일 먼저 농촌소비에트 조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농촌소비에트 조직 사업은 러시아 전역에서 24~25년에 예정됐던 제1차 소비에트 선거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는데, 25~26년도 소비에트 사업을 전담했던 극동지방집행위원회 보고에 따르면, 약 69개의 순수 한인 소비에트에 연해주 한인 약 20만 명 중 9만8천1백60명이 가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숫자는 해마다 기하급수적인 증가세를 보이고있는데, 27년 10월에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해삼위?아무르?하바로프스크 등 세 지역에서 순수 한인 소비에트가 1백35개, 다른 민족과의 혼성 소비에트가 35개로 집계되었고, 35년에 이르면 순수 한인 소비에트가 1백52개, 혼성 소비에트는 약 1백여 개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한인 소비에트를포함해 한인의 민족구역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규정한 부cm크의 결정이 내려진 것은 바로 27년 8월29일이었다. 그것은 한인들의 자치조직 확대에 법적인 근거를 부여한 것이었다. 특히 결정사항 제1항은 '농촌소비에트를 작은 단위로 세분하는 사업을 진행할 때, 한인들의 민족적?행정적 단위 (농촌소비에트와 구역집행위원회)를 조성할 필요성을 직시해, 그들의 고유언어로 사무행정을 볼 수 있도록 조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어 2항에서는 '민족이 혼재돼 있는 소비에트나 구역집행위원회에서는 한일들에게 충분한 대표권을 부여할 수 있도록 조처하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밖에도 부치크는 한인에 대한 교육?보건?재정 지원 등 광범위한 문제를 규정하고 있고, 이런 지시하상을 극동지역 구역집행위원회와, 그곳의 모스크바 파견기관, 농업?보건 인민위원회, 인민위원회 평의회 등 5개 실무집행 기관에 하달하고 있다.

27년 8월 부치크 결정으로
 바로 이 27년 부치크 결정 사항이 한인들이 민족구역을 형성하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남박사는 이같은 부치크 결정이 서류상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다는 점을 당시 극동지역 실무지행기관들의 각종 보고서를 인용해 입증하고 있다. 한인들의 민족구역이 구체적으로 형성된 것은 부치크 결정으로부터 1년 후인 28년 8~9월께이다. 이 때 극동지역 구역집행위원회에서 두개의 보고서가중앙 정부에 발송됐다.

 하나는 28년의 '극동지역 고려인사업에 대한 통계보고'이고 또 하나는 27년 10월1일부터 28년 10월1일까지 조사한 '극동지역 소수 민족들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이다. 특히 두번째 보고에 의하면 '극동지방에는 1백55개의 완전한 민족적 소비에트가 있는데 그 중 1백37개가 고려인들의 것이고…3개의 민족구역집행위원회 중 1개가 고려인들의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28년을 기점으로 고려인 민족구역은 정부의 각종 공문서에서 고려인의 행정 단위로서 공식 인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35년 9~10월께 부치크 간부회의에서 발행한 소책자에는 35년 당시 극동 연해주에 존재하고 있는 민족구역 81개 중 2개 구역은 고려인의 민족구역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28년 포시에트 지역에서 형성된 민족구역이고, 또 하나는 35년 7~8월께 수찬 지역에 형성된 민족구역이라고 소개하고있다. 남박사는 결국 27년 부치크 회의의 결정 사항이 35년 2개의 민족구역을 확정함으로써 완전히 실행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35년까지 한인들이 비교적 순탄하게민족적 자치구역을 형성하는 등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인지도자들의 혼신의 노력뿐 아니라, 이 때까지만 해도 소련 중앙 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에서 레닌의 영향력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라고 남박사는 말했다. 그러나 24년 레닌이 사망한 뒤 권력을 장악하기시작한 스탈린 일파가 중앙에서부터 레닌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 30년대 중반쯤 불길한 기운이 극동 지방으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31년의 만주사변 이후 극동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스탈린은 한인들에게 일본군의 첩자 노릇을 하고 있다는 불명예스러운 죄명을 뒤집어씌워 37년 9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명령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결정은 그 이전의 소련 중앙 정부 결정 사항을 완전히 뒤엎은 것으로 그 자체가 위법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독립국가연방의 한인자치주 운동은,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을원상회복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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