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택 대표 ‘대권 장정’길 올랐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3.11.0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28 선언’ 등으로 ‘자가 발전’시동…신세대 정치인 이미지 심기 분주

요즘 민주당에서는 9·28 선언이란 생소한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처음 듣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9월28일 무슨 중대한 선언이 있었는지 언뜻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9·28 선언이란 민주당 이기택 대표가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정기국회 운영과 관련해 “과거 청산보다는 민생 등 경제에 더 역점을 두겠다”라고 밝힌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어째서 이대표의 이 발언이 ‘선언’이란 거창한 말로 ‘변질’되었는지 얼핏 이해되지 않는다. 민자당이 과거 청산에는 워낙 미온적이고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민생과 관련한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야당 대표가 국회를 공전시키지 않기 위해 당연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발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과거 청산을 아예 포기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이번 국회에서만큼은 원내활동과 연계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9·28 발언이 왜 선언인지 쉽게 수긍이 간다. 이대표에게 9·28 선언을 하도록 강력하게 진언한 것은 최근 김대중 전 대표가 대권에 도전할 때에 못지 않게 보강된 이대표의 비서진이었다.

 비서실장인 문희상 의원을 정점으로 한 비서진은 이대표에게 이제는 단순히 야당 대표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서 국민에게 다가설 때가 됐음을 역설했다. 얼른 끝날 것 같지 않은 과거 청산 논쟁에 얽매일 게 아니라 이대표 나름의 정책 대안과, 다가오는 21세기의 청사진을 보여줄 시기가 왔음을 강조한 것이다. 9·28 선언은 이대표가 비서진의 제안이 옳다고 판단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9월28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대표는 자기가 다음 정권을 이어받는 정치 지도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국회연설은 새 비서진 첫 작품
 이대표가 진로에 대한 방향을 구체적으로 잡기 시작한 것은 지난 9월초 비서진 인선을 마무리하면서부터였다. 비서진의 구성은 무려 3개월을 끌 만큼 오랜 진통을 겪었다. 중간에 비서진 명단이 언론에 일부 공개돼 관련 비서관이 해임될 뻔한 일이 있을 정도로 보안에도 신경을 썼다.

 비서진 인선을 마무리한 9월 초를 전후해 이대표의 행보는 그 전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사람을 많이 만났다. 과거 이대표는 그저 찾아오는 사람만 만날 뿐 자기가 찾아다니며 만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이대표의 발길이 눈에 띄게 분주해진 것이다. 전경련·중소기업중앙회·노총·전국노동자대표회의·환경운동연합 등 중요한 사회단체는 빠지지 않고 방문해 그들의 의견을 주의깊게 들었다. 이대표는 강화도 냉해지역과 남대문 시장도 찾아가 농민과 상민들의 고충을 들었다. 또 이 기간에 60여 명의 교수를 만났는데, 그 중의 절반은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였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정치인 중 한사람이란 말을 들었던 것도 옛날 얘기이다. 이대표는 요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비서진의 표현을 빌리면 ‘젊은 비서들에게 신간 중에 읽을 만한 책을 권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서실에서 매일 올리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도 빼놓지 않고 줄을 치면서 섭렵한다.

 김대중 전 대표에 대한 자세도 상당히 ‘독립적’으로 변했다. 9·28 선언에서는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자를 증인으로 소환하는 문제에 대해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국정감사에 응할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 지난 10월13일 김 전대표가 동유럽과 미국을 순방하고 돌아왔을 때 김포공항에 나가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공항에 나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숙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이대표의 9·28 선언과 분주해진 발걸음의 의미는 10월27일 국회연설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이대표는 이 연설에서 과거 야당대표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과거를 질타하기보다는 미래를 걱정하고, 비판하기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경제 전쟁이 점점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육성하고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정치가 바로 되려면 무엇보다도 국회가 활성화돼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의회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 내리려면 국회는 매일 밤낮 가릴 것 없이 열려야 하며, 원내의 활동상황은 텔레비전 생중계를 통해 국민에게 빠짐없이 전달돼야 하고, 국회 산하에 한국개발연구원 못지 않은 전문 연구기관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대표는 야당 또한 구태에서 벗어나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인했다. 이대표 비서진은 대표연설 초안을 작성하는 데 한달을 준비하고 1주일간 밤을 새웠다.

 현재 이대표를 보좌하고 있는 비서진은 자택의 개인 비서 4명을 합쳐 모두 25명이다. 그 중에서 가장 중추 역할을 맡고 있는 보좌역은 손태인(부산남을 위원장·이하 모두 주요경력) 홍문표(청양·홍성 위원장) 이희원(대전서·유성 위원장) 배기선(김대중 총재 보좌역) 김희완(송파갑 위원장) 심진택(런던대 정치경제학대학원) 임대윤(대구 동갑 위원장) 씨 등 7명이다. 이 중 학자인 심진택 씨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큰 선거를 한두번씩은 치러본 야권의 알아주는 두뇌로, 대권에 도전해 본 경험이 있는 거물 정치인의 그림자 노릇을 해왔던 사람들이다.

‘김대중 사람’인 배기선씨도 합류
 이대표의 활동을 관리하는 기회보좌역 배기선씨는 김대중 전 대표를 가까이에서 수행하며 대통령선거를 두번 치른 노련한 참모이다. 배씨는 특히 지난 대선때 뉴 DJ 플랜을 기초하기도 했다. 김 전대표의 비서실 차장을 지낸 문희상 실장과 함께 세상이 다 아는 ‘김대중 사람’인 배기선씨가 이대표 진영에 합류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또 정책보좌역인 김희원씨는 민자당의 박종웅 의원과 함께 김영삼 대통령이 민주당대표 시절 공보비서를 지냈으며, 홍보보좌역인 임대윤씨는 야당통합 전 박찬종 의원의 손발 노릇을 해왔던 사람이다. 특히 임씨는 옛 민주당 시절 박찬종 의원의 입이 되어 이대표를 가장 괴롭혔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밖에 손태인·이희원·홍문표 씨는 20여 년간 이대표를 수행해온 ‘이기택의 가신’들이다.

 상근 비서는 모두 14명인데, 고려대 총학생회장과 옛 민주당 양천을 지구당위원장을 지낸 김 용씨가 총괄 차장, 이민우 전 신민당 총재의 핵심 두뇌였던 이준형씨가 공보차장, 옛 민주당 동대문갑 위원장을 지낸 장관근씨가 의전차장, 민주당 정책위원을 지낸 최용식씨가 당무비서를 각각 맡고 있다.

 이들이 이대표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이대표가 아직 대중에게 구세대 정치인의 막내쯤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다. 4·19혁명을 주도해 이 땅에 시민사회의 새벽을 열었는데도 양김씨와 어깨를 나란히하며 야당 정치인 생활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양김씨와 같은 세대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그같은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착안한 것이 바로 이대표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큰 정책을 개발해내겠다는 것이다. ‘이기택 경제론’‘이기택 통일론’‘이기택 교육개혁 지침’등이 그것이다. 이번 이대표의 국회 연설문은 이들의 첫 작품이다. 이들은 특히 이대표 자신이 의욕을 갖고 열심히 공부하며 비서진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멀지 않아 명작이 나오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들은 또 이대표의 기질이 어떤 정치인보다도 민주적이라는 점을 들어 정치 지도자와 비서진이 완벽한 팀워크를 이루어 정권을 창출하는 선례를 남기기를 기대하는 듯하다.

 문희상 비서실장은 “이대표는 현역 정치인 중 가장 오랫동안 정치권에 몸담아 왔는데도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정통 야당의 계승자이다.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듣지만 과거 어느 정치 지도자보다 민주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대표를 도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개발해내고 이대표의 있는 그대로를 제대로 전달한다면 현재 실세 다툼을 벌이고 있는 여권의 어떤 인물보다 국민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대표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는 동시에 당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애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대표는 지난 9월23일부터 1박2일간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사조직인 통일산하회 수련대회를 열고 신임 회장에 강창성 의원을 영입하는 동시에 대폭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신임 회장인 강의원은 보안사령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대표를 거세할 정치인 중 한명으로 분류하자 극구 만류해 이대표를 명단에 빼냈을 정도로 이대표와는 가까운 사이이다. 강의원은 이대표가 국방 정책을 개발하는 데 크게 한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통일산하회에는 민주당 현역 의원 29명과 지구당위원장 1백38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이대표는 이들 외에 회원으로 공개하지 않은 민주당 중진 현역 의원 몇명을 특별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산하회는 올 연말까지 조직을 군단위로 확대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취약한 당내 입지 등 넘어야 할 산 많아
 이대표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확실하게 진로를 설정했지만 그의 앞길이 순탄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일반 대중에게 이대표의 위상은 아직 신세대 정치인의 맏형이라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어쩌면 그저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야당 정치인’ 정도인지도 모른다. 또 당을 끌고 나가는 지도력에서도 ‘원래 품성이 민주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로 들어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게 사실이다. 당내 입지도 김대중 전 대표가 지지를 철회하면 당장 소수 계파로 전락하지 않을까 걱정도리 정도로 취약하다. 김원기·정대철·김상현 의원 등 이대표의 자리를 겨냥한 신세대 정치인들의 기세도 여간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이대표가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뜻이 있다면 이대표의 선택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당내에서의 세불리기 싸움에 진력하지 않고 정책대안을 개발해 국민에게 당당히 심판받겠다는 것은 신세대 정치인의 면모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정쟁으로 날을 지새다가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후에야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4년여 동안 착실히 준비를 하겠다는 자세도 신세대 정치인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만약 이대표가 변화무쌍한 정국의 흐름에 개의치 않고 지금과 같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성공이든 실패하든 얻는 것이 많을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