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사냥꾼의 비정한 욕망, 그리고 몰락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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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 2월13일자 외신은 엄청난 뉴스를 던져 주었다. 미국의 합병·매수 전문 금융기관인 드럭셀 번햄 램버트사가 파산했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 회사 부사장이었던 마이클 밀켄도 몰락했다. ‘80년대 미국 증권계의 신데렐라’로 불린 밀켄은 시세 조종 등 무려 98가지 죄목으로 연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복역중이다. 그는 10억7천만달러(약 8천6백억원)의 벌금도 물었다.

 밀켄은 정크본드를 합병·매수의 자금 조달원으로 쓰이게 해 미국에서 합병·매수 붐을 조성한 장본인이다. 정크본드는 금리가 높은 만큼 위험도 큰 채권이어서 ‘타락한 천사’로 불렸다. 하지만 정크본드가 합병·매수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음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합병·매수의 본고장이다. 영국에서 수입한 이 전략은 미국에서 더욱 발흥했다. 1890년 셔먼법이 제정된 이래 1백년 동안 합병·매수는 미국에서 반복됐으며 확대 재생산됐다. 미국의 대표적 기업인 제너럴 모터스(GM), 제너럴 일렉트릭(GE), 듀폰, US스틸, IBM, 웨스팅하우스, 코닥, 프록터 앤 갬블(P&G)의 역사는 곧 합병·매수의 연표가 될 정도이다.

 미국은 1백년 동안 다섯번 합병·매수 물결을 탄 것으로 분석된다. 합병·매수의 전성기는 주식시장의 전성기와 같이 움직였다. 1차 물결에서는 석유·담배·철강 산업에서 수직적 결합이 이루어져 거대 기업이 탄생했다. 연간 1천건이 넘는 합병·매수가 시도됐던 1차 물결은 주식 취득에 의한 합병을 금지한 클레이튼법이 제정(1914년)됨으로써 쇠퇴했다. 2차 물결에서는 자산 취득에 의한 합병만이 허용됐고, IBM과 제너럴 푸드가 합병·매수의 단골 손님이었다.

 2차 물결이 대공황(1929년)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인들은 합병·매수에 비판적이 돼 갔다. 미 행정부는 50년 클레이튼법을 개정해 동일 산업 내에서는 합병·매수를 막아 버렸다. 그렇지만 경영자들은 합병·매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업종 합병·매수로 돌파구를 찾아 복합기업 합병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맹활약한 기업은 ITT, LTV, 걸프 앤 웨스턴 등이다. 이들은 수십번에 걸쳐 여러 기업을 합병해 공룡처럼 거대해졌다. 적대적 합병·매수가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큰 것이 아름답다’는 이 시대 지배 논리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과열의 폐해는 진정을 부른다. 다른 업종을 마구 사들였던 기업들은 체중조절을 시작했다. 채산성이 나빠진 부문을 팔아 주력 업종에 전념하는 사업 개편이 활발해졌다. GM은 몸집을 1백50개로 쪼갰고 팔기도 했다. 4차 합병·매수의 기세는 눈에 띄게 꺾였다.

 그러나 확장 욕구는 얼마후 되살아났다. 5차 물결의 도래는 세계 경제가 글로벌화한 데다가 합병·매수를 쉽게 하는 방법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LBO와 정크본드였다.

 LBO는 빚을 얻어 기업을 사는 것으로, 피매수 기업의 자산이 담보가 된다. 투자 은행같은 금융기관이 물주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담보만 견실하면 엄청나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상 최대로 큰 합병·매수는 LBOd로 가능했다. 코홀베르그 크라비스 로버츠(KKR)라는 작은 M&A부티크(전문점)는 RJR 나비스코라는 식품·담배업체를 무려 2백50억달러에 사들였다. 이 가운데 1백90억달러가 부채였다.

미국, LBO·정크본드로 피해 막심
 피매수 기업의 자산 가치가 없을 때 기업 사냥꾼들은 정크본드를 애용한다. 정크본드를 발행해 매수할 돈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경우 거의 다 적대적 합병·매수이므로 피매수측이 손을 쓰기 전에 신속하게 돈을 조달할 수 있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밀켄이 널리 퍼뜨린 정크본드는 LBO와 함께 합병·매수 붐을 조성했지만 이같은 위험함 방법은 끝이 있게 마련이다. 드렉셀사의 파산은 주식과 정크본드의 시세를 떨어뜨렸고, 미국 증권계에 검은 구름을 드리웠다.

 미국의 합병·매수는 기업 사냥꾼이 횡행하면서 타락으로 치달았다. 이들은 낮게 평가된 주식을 사들여 시세 차익을 노리기도 하지만 멀쩡한 기업을 위협해 매수를 포기하는 대가로 엄청난 돈(프리미엄)을 요구하는 ‘그린메일’을 즐겨 쓴다. 대표적인 기업 사냥꾼은 밀켄 외에도 ‘희대의 모략가’라는 별명을 가진 분 피킨스, 칼 아이칸 등이 이 분야에서 거물급이다. 이들은 몇 년에 한번씩 눈독을 들인 기업을 매수하거나 그린메일로 엄청난 이익을 챙겨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다.

 미국과는 달리 유럽과 일본은 합병·매수가 크게 일어나지 못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가족 중심 경영 풍토, 기업과 금융기관간 상호 소유, 주주의 경영권 안정 장치 등이 합병·매수의 생존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 통합으로 합병·매수가 유용해진 유럽의 기업들의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일본도 유럽과 사정은 비슷하지만 외국 기업을 먹어치우는 합병·매수는 활발한 편이다. 89년 소니는 미국의 메이저 영화사인 컬럼비아 픽처스를 48억달러에 매수했다. 그 직후 미국의 격제전문 주간지 《비즈니스 위크》는 표지에 자유의 여신상에 기모노를 입히고 ‘미국의 혼이 팔렸다’고 논평했다. 90년 11월 마쓰다의 61억달러짜리 MCA 매수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인들은 서양의 자국 기업 합병·매수를 마치 구로후네(黑船 : 에도시대 말기의 서양배)처럼 보는데 이 시각도 ‘M&A 쇄국주의’라는 압력이 비등해 오래가지는 못할 처지다.

 현재 미국의 합병·매수 열기는 한풀 꺾인 게 사실이다. 정크본드 몰락 등의 합병·매수 후유증을 말끔히 수습하지 못했다.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합병·매수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도 아직 날카롭다. 하지만 기업가들의 왕성한 확장 욕구와, 돈을 벌려는 기업 사냥꾼들의 비정한 욕망은 새롭게 변모된 합병·매수를 잉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은 합병·매수에도 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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