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보도 확인 않은 인용 '말썽'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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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공 신문 '분신' 오보 본지 사진기자 현장 잡아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화염에 싸여 있었고 피부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기자들은 셔터만 눌러대고 있었고 아무도 그녀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셔츠를 벗어들고, 상의를 벗어든 또 한사람의 한국인과 함께 그 불을 끄려고 했다. 그때 어떤 사람(대학생으로 생각되는)이 나를 끌어내기 위해 뒤에서 잡아챘다. 그는 이 여인이 또다른 순교자(열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일단 몸이 풀리자 다시 파고들어가면서 의사를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5월22일 홍콩의 유력 영자지<사우드차이나모닝포스트>에 실렸으며, 같은날 <중앙일보>와 <문화방송>이 기민하게 인용 보도한 영국 출신 스트링어(비상근 기자) 브루스 체스먼 기자의 서울발 기사 중 일부이다. 이 기사는 강경대군의 2차 장례식이 열렸던 지난 5월18일 연세대 앞 철길에서 일어났던 이정순씨의 분신 현장 취재기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그날 현장에서 불을 끄려고 했던 사람은 체스먼 기자와 다른 한명의 한국인 밖에 없었으며 ‘대학생인 듯한??사람들은 불을 끄려는 그 두사람 마저 뜯어말렸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시사저널≫ 사진부 김봉규 기자가 철길 위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기사는 사실과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머리가 많이 벗겨지고 안경을 쓴 체스먼 기자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맨 앞쪽으로 나아갔을 때는 이미 여러 사람이 한창 불을 끄고 있는 중이었다. 체스먼 기자가 윗도리를 벗어붙이고 불을 끄려고 뛰어들었을 때는 체스먼 기자가 시신에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불을 끄는 사람들은 훨씬 많이 불어나 있었다. 체스먼 기자의 바로 옆에는 소화기를 들고온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더욱이 체스먼 기자의 뒤쪽에는, 가드레일 너머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을 뿐 체스먼 기자를 잡아챌 만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양복차림의 한 사람이 불을 끄지 않고 촬영에 열중인 사진기자에게 주먹을 불끈 쥐고 금방이라도 한대 때릴 듯이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김기자는 이정순 여인이 병원으로 옮겨지기까지 약 3분 동안 1백여장 정도의 사진을 찍어 당시 상황을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하듯 빠짐없이 기록했다.

  김봉규 기자가 지켜본 당시의 상황은 이렇다. 18일 11시가 조금 넘어서 강경대군의 운구행렬이 세브란스 병원 정문을 나설즈음 김기자는 운구행렬의 전체적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철길 위로 바삐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목청이 찢어지는 듯한 여자들의 비명소리와 "또""또 분신"하며 남자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길 위로 황급히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미 이정순 여인이 몸에 불이 붙은 채 보도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건장한 청년 5~6명이 곧바로 불을 끄기 시작했고 가드레일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빨리 병원에 옮기자" "구급차 불러라" "구급차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들고 뛰는 게 더 낫다"고 소리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여인이 몸에 신나를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 좀처럼 불길이 잡히지 않자 한사람이 소화기를 들고 달려왔고 곧이어 한사람이 근처 가게에서물 한 양동이를 떠가지고 달려오기도 했다.

  잠시 후 불길이 잡혔고 건장한 청년들이 이 여인을 신문지에 싸서 안고 병원쪽으로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사람이 죽어가는데 사진만 찍느냐" "제대로 보도도 하지 못하며 사진은 무엇하러 찍느냐"며 일부 사진기자들을 현장 밖으로 잡아 끌어냈다.

  결국 "아무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의사를 부르라고 외쳤으나 누구도 꼼짝하지 않았다"는 체스먼의 기사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을 구하기 위해 애썼음을 알 수 있다. 또 학생과 시민은 불을 끄려는 사람을 ‘잡아챈'것이 아니라 '불구경'을 하고 있는 사진기자들을 끌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체스먼은 도대체 왜 이런 기사를 썼을까. 한국말을 잘 모르고 한국 실정에 어두워 상황판단을 잘못했을 수도 있다. 분신장면을 처음 봤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기사를 써서 파는 스트링어이기 때문에 흥미있게 쓰려다보니 과장했을 수도 있다. 운동권에서는 배후에 그를 사주한 ‘다른 세력??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같은 엉터리 보도를 우리 언론이 아무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대서특필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문화방송 노조는 24일 노조특보에 분신현장을 취재했던 제2사회부 이진숙 기자의 증언을 싣고"22일의 문화방송 보도는 김기설씨 유서 대필 논란 기사에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검찰의 주장을 옹호하는 편파적 편집이었으며, 재야·민중민주 세력에게 불리한 내용이면 무엇이든 선호하는 데스크의 편향된 시각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것이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체스먼 기자는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모월간지에 모든 것을 밝히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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