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실험대에 오른 ‘늦깎이’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2.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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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김씨 효용가치 끝났다”…즉흥적 발언?‘서민용’ 공약 제시로 유동표 겨냥

시사저널 대선주자 초청 패널토론①
정주영 후보 ‘지상 청문회’


참으로 묘한 상황이다. 대통령 선거는 앞으로 6개월이나 남아 있는데 각 당의 대선 후보들은 이미 결정되었다.

 연말의 대선은 그 중요성으로나 후보가 결정된 상황을 감안해서나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안이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한해의 절반을 이 문제에만 매달려 국력을 낭비하는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 우리 언론의 곤혹스러움은 여기에 있다.

 《시사저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즉 국력을 소모시키고 흑색선전이 난무하고 지역 간의 골을 깊게 하는 무한경쟁을 후보나 언론이나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동시에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한다면 남은 기간 동안 정책적 측면과 자질론의 관점에서 차근차근 진지하게 ‘후보 검증작업’을 치러야한다고 믿는다. 후보들 역시 가차없는 검증작업에 임할 각오를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호부터 나가는 ‘《시사저널》대통령 후보 초청 패널토론’은 이런 관점에서 시도되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각계 전문가 5인으로 패널을 구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각 당의 대선후보에 대한 강도 높은 ‘지상청문회’를 벌이도록 했다. 이들의 ‘집중심문’은 비단 언론의 관심에 한정되지 않고 이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관심과 의문을 반영하고 있다. ‘정주영 후보’에 이어 다음호에는 ‘김대중 후보’가 패널 앞에 설 예정이다.<편집자 주>

 

정치 실험대에 오른 ‘늦깎이’

“양 김씨 효용가치 끝났다”…즉흥적 발언?‘서민용’ 공약 제시로 유동표 겨냥

 

 격동의 시대가 또 찾아왔다. 지나간 5년 동안 한반도 국민들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을 경험했다. 전직 대통령의 山寺 유폐가 그랬고, 소위 실세라 불렸던 거물들의 ‘외국행’이 그랬고, 3당 합당이 그랬다. 그리고 또 하나. 국내 최대 재벌 총수였던 鄭周永씨의 돌연한 변신이 그렇다.

 불과 5개월 전만 해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제 통일국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변신해 있다. 일반 국민들은 정대표의 상의 깃에 노란 금배지가 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는 이제 그의 마지막 직업이 되었다.

 만약에 그가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았다면, 통일국민당이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훨씬 재미없는 ‘정치의 계절’을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출현으로 대통령 선거전은 한층 복잡하게 변했다. 변수도 많아지고 구경거리도 많아졌다.

 민자당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선 金泳三씨와 金大中씨가 나란히 서서 경쟁을 다짐하는 모습은 10년 전에도 있었으며, 20년 전에도 있었다. 지난 71년 두 김씨가 야권 대통령 후보를 놓고 경선하던 모습을 지켜본 10내 소년은 이제 30대의 나이가 되었다.

 정주영 후보의 출현은 지난 20년 동안 판박이 사진처럼 반복된 정치 상황의 틀을 깨는 데서 출발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투사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는 사람들이 두 김씨의 효용가치가 끝났다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이는 국민당 선거 전략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열쇠이다.

 정후보는 두 김씨를 지역주의에 의한 지역당의 대통령 후보로 치부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당 후보의 득표력에는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희망사항이다. 그가 투표자의 50% 득표를 장담하는 것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다. 두 김씨가 얻을 수 있는 표는 고정돼 있으며, 각자 25% 정도의 득표력을 가지고 있다고 칠 때 나머지 50%에 승부를 걸면 된다는 것이 정후보의 기본 전략이다. 두 김씨와 달리 정후보의 표는 고정돼 있지 않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풍선처럼 부풀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고정표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리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정후보의 시선은 그 쪽을 외면하고 있다.

 국민당의 으뜸가는 선거전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후보가 실물경제에 능통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정후보는 위기에 처한 국내 경제 상황을 국민당 창당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웠다. 정후보는 지난 총선 지원유세를 통해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는 5백억 달러의 외채 국가로 전락했기 때문에 이를 구하기 위해 국민당을 창당했고, 국민당이 집권당이 되면 일인당 소득 2만달러 국가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을 수백번도 넘게 반복했다. 차기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처럼 돼버린 ‘경제 대통령론’도 이런 생각을 발판으로 해서 나왔다.

 그의 경제정책은 △국내 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내려야 하며 △상호출자와 상호지급보증제도를 없애서 △기업 전문화를 시키고 △중소기업이 경제의 주축을 이루도록 하겠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와 함께 △토지공개념 제도를 확립해서 △비정상적인 아파트나 집값을 조정하고 △금융실명제를 통해 정치의 ‘블랙 머니’를 없애겠다는 점을 선결 과제로 내세운다.

 이와 관련, 상공부 차관보와 특허청장을 지내고 최근 정대표 비서실장이 된 車秀明 의원(울산 남구)은 이렇게 말한다. “국제수지 방어 차원에서 국내 산업을 이끌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수입에 의존하는 자본재를 국산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차관보로 있던 시절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정대표야말로 자본재의 국산화에 가장 앞선 사람이다. 오늘날 무역역조의 6~7할이 자본재 수입에서 비롯되고 있고 또 그것의 8~9할이 일본에서 수입된다. 정대표가 말하는 경제 정책이 선결된다면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는 꿈이 아니라 반드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정대표의 생각과 국민당의 정책이 올바른 것이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다. 국민당은 이를 위해서 대통령 후보끼리 경제문제에 관한 대토론회를 열 것을 주장한다.

 정대표는 경제정책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번 《시사저널》대통령후보 초청 패널 토론에서 “全斗煥씨가 국보위를 만들어 만선 통폐합을 할 때부터 기업인으로서는 한계가 있으니까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의 이 말은 기업인으로서 경제정책을 실행하기에 한계가 있으니까 정치 참여를 생각하게 됐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는 또 “그러니까 대통령 수업한 지는 12년 정도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말은 그가 대단히 치밀한 성격임을 나타낸다. 이 말에 따르면 그는 지난 12년 동안 현실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보고 있었으며,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에 창당을 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도 시인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그의 성격은 대단히 급하다. 따라서 그의 ‘급한 성격’과 ‘끈질긴 인내’와의 조화는 앞으로 눈여겨보아야 할 접이다.

 그의 급한 성격에서 나오는 특징의 하나로 그의 ‘즉흥적 발언’을 들 수 있다.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후 말에 관한한 ‘해빙기의 아침’을 맞았다. 거의 모든 정치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은유와 수사법을 쓰지 않고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내뱉는 그의 말투는 많은 사람들에게 속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반면 대통령 후보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공격 대상이 된다. 심지어 “천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말투나 단어 사용이 좀 더 다듬어지고 정교해져야 한다는 것은 국민당 거의 모든 참모진들이 인정하고 있다. 실무 경험은 뛰어나지만 개념어에 대한 인식이 정립돼 있지 못하거나, 통치 철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점도 그의 약점이다. 한 핵심 당직자는 “정책실에서 용어 구사에서부터 논리의 전개, 비전 제시까지 정대표를 다듬는 실무 작업에 이미 들어갔다. 외교 국방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기초 자료도 마련중이다. 그러나 77년 동안 굳어진 버릇을 고치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국민당의 ‘대선 기획단’은 내주중 대충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기획단장에는 金東吉 최고위원이 내정되었다. 정대표는 50명에서 60명 사이의 인원을 배치하여 기구를 구성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핵심 실무자는 “정대표의 독촉은 그가 빨리 자문을 구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자주 놀라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가로서의 정주영씨가 발휘하는 솜씨는 상당한 주목거리이다. 대표적인 예로 ‘아파트 반값 인하’공약을 들 수 있다. 이 공약은 정책실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정대표 머리에서 직접 나온 것이었다. 본격적인 선거 정국에 접어들면 ‘농어촌 부채의 전면 구제’등 그야말로 획기적인 공약이 쏟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총선중에 정대표가 말한 공약중 첫번째 사업은 오는 9월초에 발표될 예정이다. 또 ‘공약실천위원회’도 곧 만들 계획이다. 국민당은 약 1천억원 가량의 예산을 들여 울산에 병실만 8백개에 달하는 초현대식 종합병원을 건설할 계획이다. 울산과 부산을 잇는 정기여객항로도 신청중이다. 여객선은 현대조선에서 이미 만들고 있다.

 경제 정책분야에서의 개혁적 입장과 달리 정후보의 대북한관은 매우 보수적이다. ‘극우주의’라고도 볼 수 있을 것같다. 그는 “김일성 부자가 살아 있는 한 전쟁의 위험이 있다”며 그래서 미군도 철수해서는 안되며 군비축소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실향민으로서 6?25를 일으킨 장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확정된 4명의 대통령후보 중 유일하게 북한 방문 경험이 있는 그는 그러나 남북협상은 정부주도가 아니라 민간기업에 의해 서로 신뢰를 쌓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강조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출발, 막일꾼과 대재벌의 총수를 거친 정주영씨는 이제 ‘청와대 주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12월 대통령 선거는 그에게는 개인적 성취의 심판무대이지만, 사회적으로는 흥미있는 ‘정치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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