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 필 무렵까지 ‘주린 배’가 슬픈 짐승
  • 김훈 부장 ()
  • 승인 199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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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노루



 한라산 노루의 겨울은 곤고하다. 저것들의 평화롭고 천진난만한 표정의 밑바닥에 얼마나 쓰라린 굶주림과 추위가 깔려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가혹한 고난 속에서 저들의 표정은 여전히 평화롭다.

 계곡과 능선마다 눈이 덮이고, 제주 바다를 건너오는 북서풍이 한라산을 때릴 때, 백록담에 쌓인 눈은 바람 속에서 회오리치면서 태초의 화산처럼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그 때 노루의 무리들은 긴 대열을 이루며 먹이를 찾아 하산한다. 노루들은 인간의 마을 가까이 내려와 논밭에 흩어진 푸성귀와 울타리의 나뭇잎을 뜯어 먹는다. 노루들은 인간의 골프장 철조망 밖에 주저앉아서, 막대기를 휘두르는 인간의 모습을 넋 빠진 표정으로 한참을 구경하다가 인간들이 돌아간 빈 골프장 안으로 들어가 골프장 잔디를 뜯어 먹는다. 주린 들개들이 마을 근처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주린 노루를 덮쳐서 포식한다. 그리고 다음날, 노루의 무리들은 죽은 동족의 뼈가 널린 마을로 또다시 내려와서 동족의 뼈 옆에서 푸성귀를 뜯는다.

 노루의 배고픔을 염려하는 인간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을 날면서 넝쿨을 던져주기도 한다지만, 하늘에서 던지는 넝쿨은 모두 밀생하는 나무들의 꼭대기에 걸리게 마련이어서 나무에 올라갈 수 없는 노루는 나무 꼭대기에 걸린 먹이를 다만 올려다 볼 뿐이다.

 노루가 인가 근처에서 먹이를 뜯을 때 구경꾼들이 몰려드는데, 노루는 인간에게 끝없는 경계를 보낸다. 배추를 뜯어 먹다가도 구경꾼의 말 한마디에도 귀를 곤두세우고 사방을 살핀다. 인간에게 진절머리가 난 노루들은 인간 구경을 실컷 한 다음에는 대부분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노루들은 인간이 없는 다른 자리를 찾아가거나 혹은 한 며칠 지난 뒤에 그 자리를 다시 찾아온다.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찾아내는 빈약한 먹이로 수놈들은 겨우내 뿔을 키운다. 수놈의 뿔은 해마다 12월부터 자라나기 시작해서 4월쯤이면 완전한 모습을 갖춘다. 빈약한 먹이로 자라나는 그 뿔은 수놈의 위엄과 영광의 상징이며, 로맨스의 장식품이며, 많은 암놈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의 무기다. 노루는 가장 빈곤한 계절에 가장 큰 영광을 키워가는 것이다.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측은 한라산 일대에서 서식하는 노루를 3천2백 마리쯤으로 추산한다. 초겨울의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노루들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중산간 부락 근처의 숲속으로 모여든다. 큰 눈이 오기 전에, 눈이 내릴 조짐을 미리 알아서 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속을 네 발로 헤집기가 너무도 힘들어서, 노루들은 깊은 눈속을 점프로 이동한다. 한겨울을 나면서, 3백 마리정도가 죽는다. 노루의 죽음은 참혹하다. 들개들에게 잡혀 먹히거나, 정력을 키우려는 인간들의 총에 사살되거나, 먹이를 찾아 산록 도로를 가로지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치여 죽는다.

 산록 도로 아스팔트 위에서 노루의 주검은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아스팔트 위에서 노루의 주검은 증발해 버린 물의 흔적처럼 난해한 무늬를 그리고 있다. 그 무늬 위에 자동차 타이어 자국이 찍혀 있다. 밤중에 산록 도로를 가로지르는 노루들은 어둠을 뚫고 나타나는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을 빤히 바라본다. 노루는 달려오는 죽음의 불빛을 그 맑은 눈으로 신기한 듯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차에 깔린다. 노루는 초식하는 포유류의 운명으로 태어나 겁 많고 예민하고 소심하다. 먹이를 뜯을 때나, 무리를 이루어 이동할 때도 민감하고도 섬세한 사주 경계를 계속한다. 달리다가도 문득 멈추어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뒤를 돌아보면서 귀를 기울인다. 그처럼 섬세한 짐승이, 달려드는 죽음 앞에서 그토록 겁 없고 그토록 무신경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냥꾼의 총에 맞아 다리가 잘리거나 두 눈이 먼 노루들도 있다고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측은 밝혔다. 그것들은 평생을 불구로 살아간다. 눈 먼 노루는 먹이를 찾지 못해 결국은 요절한다. 총에 맞은 노루가 피를 흘리며 숲속으로 피신해 오면 다른 노루들이 쓰러진 노루를 둘러싸고 슬프게 울어댄다고 관리사무소 보호과장 홍창보씨는 전했다. 노루의 울음소리는 개 짖는 소리와 비슷하지만, 개보다 옥타브가 좀 높다고 한다.

 홍과장은 밤중에 노루의 울음소리를 듣고 숲속을 뒤져 쓰러진 노루를 데리고 와서 붕대를 감아준 일도 있다고 한다. 한라산 노루들은 홍과장의 고마움을 아마도 아는 것 같다. 노루들은 인기척만 들리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도망가지만, 홍과장이 “노루야 노루야” 하고 부르면 숲속에서 나타난다. 노루들은 그가 건네주는 배추나 넝쿨을 입으로 받아 먹는다. 인간의 손에서 노루의 입으로 직접 먹이가 건네지는 모습은 야생 동물의 세계에서는 희한한 일이다. 그는 노루와 친밀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오랫동안 노루와의 교감을 시도했다고 한다. 절대적인 선의를 노루에게 확신시키는 일이 어려웠다고 한다. 먹이를 주면서 종을 치거나 “노루야 노루야” 하고 외쳐서 노루에게 인간의 기호를 심어 주었다고 한다.

 노루들은 지금 가혹한 시련의 시절을 통과하고 있다. 그리고 한라산 언저리 유채꽃 밭에 봄은 이미 깃들기 시작했다. 새 잎이 움트고 숲이 무성해지면 그것들은 다시 쉴 만한 물가로 돌아갈 것이다.
 金 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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