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파문 /북한 “저작권 보호하라”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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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출판사 무단 복제에 항의 … 정부 태도 ‘어정쩡’

북한은 2월1일 평양방송을 통해 조선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장 김승필 명의로 다음과 같은 항의문(94년 1월31일자)을 발표했다. “아름출판사 앞. 우리는 지난 시기 우리가 번역 출판한《리조실록》번역본을 무단 복제 판매하려다가 물의를 일으켰던 귀 출판사가 최근 또다시 우리가 집필 출판한《팔만대장경 해제》를 무단 복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는 (중략) 저작권을 엄중하게 침해하고 저작권 보호에 관한 국제법과 관례를 난폭하게 유린하는 비도덕적이며 비법적인 행위로 규탄한다.”

 북한이 한국의 한 출판사를 상대로 직접 항의문을 발표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지난해 11월 법원의 결정으로 일단락됐던 북한판《리조실록》무단 복제 및 배포 금지 문제가 책 이름만 바뀌어 되풀이됐다는 점도 기이하다. 더구나 당시 북한과《리조실록》판권 계약을 한 여강출판사가 이미 북한과《팔만대장경 해제》판권 및 수입 계약을 마쳐 2월 말이면 1차 선적분 2천질이 들어오게 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졌다.

 《팔만대장경 해제》는 북한이 묘향산 보현사에 보관하고 있는 대장경의 줄거리를 알기 쉽게 정리하여 열다섯 권으로 묶은 책이다. 한국에서도 동국대 역경원이 팔만대장경 번역 및 해제 작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해제본이 학술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 북한의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미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많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법원이 결정을 통해 북한 출판물에 대한 저작권 보호 의지를 밝혔음에도 무단 복제는 공공연하게 되풀이되었다. 북한 출판물의 저작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법원의 결정은 ‘사법부의 의견’일 뿐 실제 상황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 심지어 정부 일각에서는 여강출판사의 판권 계약이나 사법부의 판결에 심한 불만을 가진 것 같다. 이들은 ‘북한의 저작권을 보호하기 시작하면 북한은 절대 남측과 정부간 저작권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강출판사측은 관계 당국에 분명한 정부 방침을 서면으로 밝혀달라고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부됐다고 말했다. 여강출판사측은 특히 이 대목에서 정부의 전향적인 태도를 바란다. 북한측도 이 점을 물고늘어지는 것 같다. 항의문을 방송한 다음날 북한은 또다시 방송을 통해 ‘불법 복제를 조장하는 남조선 당국의 태도’에는 ‘음흉한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다며 한국 정부를 맹렬히 비난했다.

 아름출판사가 무단 복제 대본으로 사용했을 북한의《팔만대장경 해제》원본을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그리고 북한은 아름출판사의 복제 사실을 도대체 어떻게 알고 방송을 통해 항의문까지 전달하게 됐는지도 알쏭달쏭하다.

 이번 사건은 북한 출판물의 저작권이 보호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더 근본적으로는 북한과의 교류를 어떤 방식으로 진전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가 아직 성숙되어 있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어정쩡한 입론의 대립 사이로 일부 부처의 자의적 판단과 상업주의 그리고 정치 선전이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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