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 2기, 정치 다음은 경제 개혁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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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사례와 비슷 정책 일관성 중요



 한국 정부의 개혁 엘리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문민 개혁이라는 것을 남미는 우리보다 몇년 앞서 추진해 왔다. 개혁에 이르게 된 과정이나 개혁 방식도 우리와 비슷한 대목이 많다.
 남미 여러 나라는 대개 19세기 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독립은 했지만 지배 계급은 여전히 백인이었고, 그들은 1백여 년간 남미의 풍부한 광물 · 농축산물을 내다 팔고 유럽의 공산품을 수입해 살아왔다. 이같은 분업 구조가 1,2차 대전으로 뒤흔들리자 그들은 ‘우리도 공장을 짓자’며 내수지향형 공업화 전략을 세웠다. 라울 프레비시라는 아르헨티나 경제학자의 공업화론이 중남미 전체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별로 크지도 않은 내수 시장에서 정부의 과보호를 받고 자란 제조업체들은 국제 경쟁력이 전혀 없었다. 정부는 제철소에서 호텔이나 자전거공장까지 국영화하여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보려 했지만 공채를 남발하고 외채까지 끌어다 쓰며 빚잔치만 했다. 이러다 보니 군부 쿠데타가 빈발했다. 그러나 군부는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 오히려 살벌한 공포 정치로 사회 혼란만 키웠다. 국민의 호응도 없었다. 개혁의 과제는 문민 정부에 떠넘겨졌다.

남미, 고도성장 단계로 진입
 남미의 문민 개혁은 70년대 군부 집권기를 거친 뒤 82년께부터 시작됐다. 물론 군사 정권도 나름대로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그 무렵부터 세계 경제학계를 주름잡기 시작한 미국 시카고학파의 자유주의 이론을 도입하여 인플레를 잡고 재정 적자를 줄여보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이런 점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경제 정책과 유사한 면이 있다. 그 역시 임금과 물가를 억제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중시하는 안정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남미와 한국이 다른 점은, 남미가 곧이어 등장한 제1기 문민 정부를 통해 경제 개혁의 기반이 될 정치 개혁을 추진한 반면, 한국에서는 또 한번의 군사 정권을 견뎌야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알폰신, 브라질의 사르메이등 1기 문민 정부는 대체로 군사 정부의 경제 개혁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인권 회복, 부정부패 일소 등 정치 개혁에 주력했다. 아르헨티나의 메넴, 멕시코의 살리나스 등 2기 문민 정부 지도자들은 정치적 과제가 거의 해결된 토대 위에서 경제 문제를 푸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이들은 엄청난 수의 국영기업을 팔아 재정적자를 줄이고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 했다. 영국《이코노미스트》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세계 시장에 매물로 쏟아져 나온 국영 기업 가운데 30% 가량이 남미 기업이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석유공사마저 팔아치우려 하고 있다. 정부의 규제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외국 자본의 국내 투자도 완전 자유화했다. 멕시코 · 볼리비아 · 아르헨티나의 경우 작년에 인플레를 한자리 수로 잡았다. 칠레 · 아르헨티나는 안정화 작업을 마치고 7~8% 수준의 고도성장 단계로 재진입하고 있다. 남미는 문민 정부 1기에서 구시대가 남긴 과제를 청산하여 개혁 기반을 닦고, 2기에서 본격 경제 개혁을 추진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을 한 셈이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 작업을 남미의 사례에 꿰어 맞춘다면, 남미의 문민 1기에서 시행한 정치 개혁을 지난 1년간 추진해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공직자들이 가진 재산을 공개하고 군부의 사조직을 솎아 냈으며, 정치권 물갈이를 추진해온 사실이 그렇다.

 개혁의 큰 줄기도 남미에서와 마찬가지로 80년대 이래 한국의 정치 · 경제 엘리트들의 사고를 지배해 온 ‘자율 경쟁과 개방’ 위에 서 있는 것 같다. 각종 규제를 없애고 작고 강력한 정부를 지향하겠다는 방침이나,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여 자본 · 금융시장 개방에 대비한다는 프로그램이 그렇다.

 그러나 개혁 1차 연도가 지나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남미에서의 문민 1,2기 정권이 해낸 것만큼 정치 · 경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개혁의 후퇴’라는 말로 집약되는 징후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루스벨트의 ‘뉴딜 1백일계획’을 본뜬 것 같은 신경제 1백일계획이나 신경제 5개년계획에서는 안정보다는 경기 부양과 성장 드라이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정부가 경제 통제하면 부패하게 마련”
 한 경제학 교수는 “김영삼 개혁의 특징은 불철저하고 특색이 없다는 점이다. 안정론자인지 성장론자인지, 개방파인지 중상주의자인지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기업인들은 이를 두고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고 표현한다.

 9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시카고 대학의 게리 베커 교수는 최근《비즈니스 위크》에 기고한 글에서 ‘큰 정부가 경제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부패가 나타난다’면서 자율화와 부정부패의 상관관계를 설명했다. 그는 ‘정경유착을 영구히 제거하는 유일한 길은 기업 활동과 정치의 연결 고리를 약화시키는 것, 경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단순화 · 표준화 하거나 아예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 · 한국 · 이탈리아를 탈규제의 모범 사례로 꼽았다. 그러나 청와대와 내각의 수뇌부가 은밀히 만나 은행장 인사를 의논하거나, 국영기업 이사장 자리를 집권자의 충복들이 독차지하는 것은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중남미정보센터 鮮于 鍵 박사는 “한국은 남미보다 훨씬 조건이 좋다. 김영삼 대통령이 남미에서와 같은 정치 · 경제 개혁을 착실히 추진한다면 더 큰 개혁 과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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