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평등 갈망 서사적 형상화
  • 권영민 (문학평론가. 서울대교수) ()
  • 승인 1991.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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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의 자기발견 다룬 사회소설

정동주의 대하 장편소설 <백정>은 소설사적인 차원에서 검토되어야 할 몇 가지 문제성을 지닌다. 이 소설은 드물게도 백정이라는 집단적 주체의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는 대하소설이다. 대하 장편소설이 흔히 취하는 소설적 구도로서 가족사소설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기법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소설<백정>에서는 한두 사람의 주인공을 골라내기가 힘들다. 이들은 개인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기보다 집단적인 주체로서 한데 묶여 있다.

작가가 끈질기게 추구해나가는 백정이라는 사회집단이 특히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으며, 하나의 사회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백정이라는 하나의 사회계급의 집단적인 존재와 그 역사적인 변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소설<백정>이 개인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해석을 위주로 하는 일반적인 장편소설의 형식과 구별되고 있는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백정>은 1862년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농민항쟁’을 근간으로 하여 엮어진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진주농민항쟁’속에 묻혀 있는 하천민 계층인 백정들의 존재를 찾아냄으로써, ‘진주농민항쟁’의 새로운 성격을 확인하고 있다. 작가 정동주는 ‘진주농민항쟁’과 그 이후 삼남지방 각처에서 계속된 농민항쟁의 전체적인 전개과정을 주목하면서, 이 항쟁의 성격을 탐관오리의 학정에 대한 농민집단의 저항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계급적 평등주의의 요구라는 사회변혁 과정으로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바로 하천민으로 구분되는 백정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고 할 것이다.

<백정>은 하천민으로 낙인 찍혀 사회적으로 냉대를 받아온 백정이라는 계층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은 일종의 사회소설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백정은 고려시대 이후 호적에서도 제외된 천민계급이다. 백정이라는 사회계층이 제도상으로 신분적 평등권을 얻은 것은 갑오경장 이후부터였다. 일제시대에는 진주에서 ‘형평사’라는 결사조직이 생겨 백정의 사회적 신분향상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백정의 특수한 사회적인 위치로 인하여 이들의 존재가 문학 작품에서도 간혹 다루어진 적이 있다. 그러나 대개는 신분적인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백정의 후예를 내세워 그 내면적 갈등을 묘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정동주의 소설<백정>은 백정들을 활동력과 생명력이 강한 하나의 사회계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이 봉건적인 사회제도의 개혁을 통해 인간적 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집단적인 사회소설의 의미를 갖게 만든 중요한 요건이 된다고 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 서사적인 진술 속에 삽입된 집단민요가 서사의 폭을 더욱 증대시키면서 상황인식을 고조시키는 데에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 평민계층의 농민들과 천민계층인 백정들의 상호 유대관계의 정립 과정을 인간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는 대목들,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에 눈뜨면서 하나의 인간적 존재로 자신들의 위치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백정들의 자기발견 등은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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