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북한 신경쓸 여유 없다
  • 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0.06.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몇몇 소련 언론은 북한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기한 나라처럼 취급하고 있다.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외국인으로서는 북한 언론기관이 보도한 것 이상을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라며 놀라고 있다. 북한이 새로 생긴 나라도 아니요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달라진 것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외치는 소련이요 소련 언론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은 크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 변화없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북한의 상황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모양이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紙의 A.프라트코프스키 기자는 지난 3월에 쓴 장문의 탐방기사에서 “북한은 매우 이상하다. 북한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노라고 말하고 있다. 통치자들은 바깥 세계에 대해 극소량의 정보만 국민에게 알려준다. 어떤 정보를 알리느냐는 것은 통치자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들은 국민을 그런 식으로 다스려온 것이며, 국민들은 이러한 정보의 제한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묘사이지만, 소련 언론기관들은 대체로 묘사만 하는 데 그침으로써 독자들 스스로 판단을 내리도록 하려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북한이 소련의 글라스노스트와 대조적이어서 그런지, 프라트코프스키 기자는 북한 언론의 보도 내용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즉 쿠바의 군인들, 중국의 모범 청년 영웅이야기 등 통치자의 마음에 드는 소재는 텔레비전으로 보여주지만, 동독·폴란드·체코·소련의 개혁에 관해서는 일절 보도가 없어 북한 사람들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주민들은 호네커 전 동독공산당 서기장에 대한 소련공산당의 태도라든지 변혁 후 호네커의 운명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소련언론, 김일성 개인숭배·권력세습 비판
 이밖에도 《아르구멘티 이 팍티》誌가 김일성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노보이예 브레미야》誌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공박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소련 언론의 북한관련 보도가 정부의 뜻을 반영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한 소련 언론인은 “정부나 당의 권장으로 기사가 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소련 언론이 완전히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에 비하면 정부가 편집인들에게 상당한 재량을 허용하고 있다. 소련과 북한간에는 각 방면의 ‘대표단’의 내왕이 많았으며 지금도 빈번하지만 북한 실정을 이들 대표단이 전하는 일은 없었다. 따라서 소련 사람들은 그동안 북한에 관해서 “거의 무식했다”는 것이 이 언론인의 설명이다.

 동기야 어떻든간에 북한에 관한 비판적인 기사들이 나오고 있는 데 대해서 북한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아르구멘티 이 팍티》誌의 보도에 대해, 북한 대사관은 불만을 표시하고 필자의 이름을 알아내려 했지만 편집 책임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소련 보도기관들이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 비판을 가하고 있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 최근에는 공산 강경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쿠바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중에는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紙의 글도 포함되는데, 기사가 나간 다음 그 신문의 아바나 특파원은 쿠바 자동차 2대가 관련된 교통사고를 당해 척추에 부상을 입었다. 이 교통사고 사건은 《노보이예 브레미야》誌에도 보도되었다. 한편, 〈모스크바 뉴스〉紙는 중국에 관한 매우 비판적인 글을 3월과 4월에 실었다.

對韓 접근은 동아시아경제권 진출 위한 포석
 소련 기자들에 의하면, 소련 언론은 북한측의 항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소련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는 면도 있다고 한 재소교포는 말한 바 있다. 북한 상황을 보면 예전에 소련이 처했던 스탈린 시대의 형편이 생각나는데, 북한을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 바로 소련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련이 적극적으로 북한에 ‘개혁을 하라’고 압력을 가할 것 같지는 않다.

 소련은 우리나라와의 경제관계 개선에 열성을 표시하고 있다. 한·소 협력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한·소 협력의 한가지 이유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소련의 속셈이랄까 진심은 동아시아의 경제권과 하루빨리 인연을 맺고 싶은 것이라는 해석이 소련 학자들간에 유력하다. 한국 경제력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고 소련 사람들에게 아무리 얘기해도 그들은 귓전으로 흘릴 뿐이다. 그들은 한국이 소련에 투자할 수 있으며,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소련은 서유럽과의 경제협력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앞으로 몇십년 동안 서유럽보다도 더 괄목할 만한 발전이 예상되는 아시아경제권에 뒤늦게나마 끼어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한·소관계뿐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곧 추진할 생각인 것이다.

 최근 美중앙정보국(CIA)과 방위정보국(DIA)이 각각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소련은 군사적으로 공격능력은 줄고 방어만 가능한 태세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소련은 북한의 입장이나 의향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이 자기네 경제개혁과 발전에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