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 불꽃 타오른 30년전 그날
  • 박태순 (객원편집위원·작가) ()
  • 승인 1990.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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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4. 19] 4월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아 슬프다. 4월19일이여! 눈물이 앞서고 손은 떨려서 무슨 말부터 써야 좋을는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라도 덜 다쳤으면 하는 마음으로 안절부절 몸을 둘 곳을 모를 지경이다. 그러나 멀리서 아직 총성이 들린다." (60.4.20 <한국일보>칼럼 '지평선')

  "이번에 4·19~4 25에 학생들이 흘린 고귀한 피 살아남은 국민으로서 그 흘린 피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몇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그 피의 값을 이용하려는 자, 왜곡하고 찬탈하려는 자, 심지어 욕되게 하려는 자가 있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60.4.28 위와같음)

  "새로운 환멸과 새로운 비애를 맛보는 날만이 되풀이해오다가 4·19 첫돌을 앞두고 이제 허탈감밖에는 남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거세된 혁명', 또는 '잃어버린 혁명'이라고 해야 되겠다. 부정과 부패를 물리치고 청신한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데는 마음이 없고 부정과 부패에 기대어 권력의 재미를 보는데만 마음이 있으니 혁명이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 (61 4.17)

  "오늘 새벽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국가의 행정 · 입법 사법 3권을 완전히 장악 하였다… 쿠데타에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는데 법치국가 시민들의 양식이 있고 쿠데타 지도자가 곰곰이 생각할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 (61.5.16 <한국일보> 석간 ‘메아리’)

  "어제의 4·19 세 돌 기념행사는 별 사고 없이 지낸 것이 우선 다행스럽다 … 두 개의 某학생단체는 정부의 4·19포상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정이양을 하는 것만이 그들에 대한 포상이 된다고 했다. 그러했지만 3백49명 중 30명 가량만이 포상에 참여 안했을 뿐 그밖엔 거의 다 포상을 받았음은 앞서의 성명들과 하나의 대조이며….“ (63.4, 20 <동아일보> 칼럼 ‘횡설수설')

  4월혁명을 지켜본 언론인들 중에서 고인이 된 홍승면선생의 그 당시 칼럼들을 오늘에 살 펴보면, 그는 남달리 이 혁명에 '사랑과 긍지'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전해오는 일화가 있다고 들린다. 60년 3·15 부정선거를 향해 정국이 치달리고 있을 때, 또는 마산 3·15의거 이후로 정국이 소용돌이를 칠 때 그는 '독자투고시'의 난에 가명으로 그 자신이 쓴 시를 게재하곤 했다는데, 그 시들의 내용이 민중의 편에서 반독재의 필봉을 든 것이였음은 말할 나위없다.

  한 언론인으로서 4월혁명을 만나, 이 혁명에 대한 언론적 소명감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그는 나름대로 기울였던 듯하다. 그는 유독 4·19관계 칼럼을 많이 썼을 뿐 아니라, 그의 유고집으로 나온 칼럼모음 책의 제목 또한《잃어버린 혁명》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염려와 볼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인지 그것은 더 나아가 '빼앗긴' 혁명이 된 것이 아닌가. 시민들이 무관심·무표정으로 맞이한 5·16군부 쿠데타의 발발…. 더욱이 다시 두해를 넘기어 63년 세번째로 맞이하는 4 · 19기념행사에 있어서는 그에 의해 소위 '4 · 19세대'라거니 '4 · 19주체'라거니 하는 이들의 한심한 모습이 포착된다.


'반민주'로 점철된 5 16 이후의 역사

  군사정권의 4 · 19포상에 대해 3백94명 중 30명 가량만이 이를 거부했을 뿐 나머지들은 덥석 이를 받은 데 대한 양식있는 언론인의 관찰이었다. 과연 '非4 · 19적'인 군사정권이주는 4 · 19포상을 받은 그들에 대해서 어찌 생각해야 할지, 앞의 인용에 이어지는 그의 칼럼을 다시 살펴보자.

  "(3백49명 중) 거의 다 포상을 받았음은… 독재주의와 폭정에 죽음을 걸고 싸워 이긴 공훈의 대가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포상을 받고 안받고의 시비는 각자의 판단에 달린 것이니 이 이상 더 말 말기로 하자. 그러나 이번 포상을 계기로 해서 다시금 그립고 아쉬워지는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부활이다… 더욱이 꽃다운 청춘을 초개같이 버린 영혼들은 이날의 포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자기들이 뿌린 피로 이 땅에 어서 자유의 꽃이 피고, 하루바삐 민주주의의 열매가 맺어지라, 하는것이 원혼들의 바라는 것뿐이리라 "

  지난 30년 세월의 한 세대, 그것은 19세 소년이 49세 초로의 늙은이로 '변질'되고 아울러 터무니없이 젊음을 '탕진'케 해버린 '오뇌'의 시간층을 되돌아보게하는 일이지만, 이런 '개인사적 감회'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4 · 19 하나만 잘 건사하면 이 땅에서 살아갈만하다“라고 생각, 얼마나 많은 청춘들이 그‘대의’를 끌어안아 지하실 고문장에서, 감옥 창살 속에서, 민주열사 원혼으로 스러져갔는지, 더더욱 저 대다수의 민중들이 기약없고 하염없는 독재의 세월에 필설로 표현 못할 고초를 겪어갔는가를 돌이켜보는 것마저 ‘감상주의’인 것이라고 접어둘 수만은 없는 일이다.

  4월혁명 30년 ‘세월’을 ‘역사’로 회복케 하는 것은 곧 우리 시대 민족·민주(민민)운동의 올바른 줄기를 어찌 세우고 찾아내느냐하는 것으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과연 지난 30년 동안의 엄청난 사회변동을 어찌 살필까. 대단한 생산력의 확대, 하지만 이와 반비례되는 생산관계 모순의 심화, 순식간에 불어닥친 도시화·산업화·관료화의 문화변동, 그러나 더욱 반민주적이며 반민중적으로 진행된 사회 구성체의 모순과 사회갈등, 무엇보다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문화의 자율을 통한 사회발전이 되지 아니하는 독재(정치)-독점(경제)-종속(문화)의 사회화과정…. 4월혁명은 바로 이 시대와 사회의 성격을 새롭게 규명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월에 탄압을 받은 것은 민중들만은 아니어서 ‘4·19정신’ 또한 억눌림당하고 짓눌려오기만 하였던 것인데, 바로 ‘민주화’ 되어야 할 것은 4·19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4월 혁명은 자연발생적인 반독재운동-학생의거-시민항쟁의 차원을 딛고 올라선 민중 ‘혁명’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4월혁명은 민중의 뜻을 학생들이 나서서 대변하였던 ‘대리혁명'인 것만은 아니었으며, 좌절된 혁명, 실패한 혁명인 것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미완의 혁명’이기보다는 오늘의 사회변혁운동에 그대로 '현재진행형의 혁명'으로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많은 한계와 제약을 이 혁명이 가지고 있지만 더 나은 사회,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룩해나가기 위한 우리의 꿈이 사라지지 않는 한 4 · 19는 바로 오늘의 우리 속에 살아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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