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의학과 컴퓨터의 만남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4.06.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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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수록한 CD롬 제작 한약 이용한 신약 개발에 활용



 《동의보감》과 컴퓨터. 얼핏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낱말이다. 수백년 역사의 풍화작용을 느끼게 하는 누런 한지와, 대다수 한글 세대에게는 암호에 다름 아닐 한자의 집합으로 일단 연상되는 한의서가 컴퓨터를 만날 일은 도무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만났고, 그 만남이 더없이 행복한 것임을 증명해 보였다.

 이 만남은 곧《동의보감》의 ‘내용’을 컴퓨터 CD롬이라는 그릇에 담는 작업을 가리킨다. 여기에는《동의보감》에 적힌 6천4백여가지 처방들, 처방 약재의 화학구조식과 각종 분석 정보, 처방에 쓰이는 약용 식물과 그 식물의 약용 부위를 찍은 컬러 사진이 고스란히 실렸다. 물론《동의보감》보다 처방이나 약재를 찾기가 더 쉽다.《생약규격집》《중약대사전》같은 참고 문헌 자료를 적절히 추가해 처방의 정확성과 안정성을 높인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저항성 말라리아 퇴치한 쑥
 지난 6월3~4일 서울대 문화관에서 첫선을 보인《동의보감》CD롬은 이 날 행사의 주제인 ‘전통의약과 현대 과학의 조화’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준 사례였다. ‘TradiMed'라 이름 붙인 이 한의학 데이터베이스는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가 92년부터 추진해 오고 있는 선도기술개발 사업(G7 프로젝트)의 기반 연구사업이다. G7 과제의 일부로 돼 있는 新東醫藥 개발 프로그램에서《동의보감》《의방유취》같은 옛 한의학 서적의 데이터베이스화는 ‘ 필수 기초과목’이 된다.

 신동의약 개발 프로그램은 천연물과학연구소(소장 張日武)를 주관 기관으로 하여 17개 대학, 6개 국 · 공립 연구소, 7개 제약회사가 공동 참여하는 연구 과제이다. 2천여년 동안 동양권에서 이용되어 온 전통 약물의 지혜를 현대 과학기술로 실증하고, 더 나아가 세계인이 사용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응용하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장일무 교수(51)는 “이러한 신약 개발 방향은 이미 그 타당성을 인정받았다”라고 말한다. 기침과 해소 치료에 쓰이는 마황의 에페드린이나, 진통제로 이용되는 양귀비의 모르핀, 말라리아 치료제로 각광받은 기나수의 키니네, 말초혈관 확장제로 쓰이는 은행잎의 징코라이드 성분은 이미 고전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韓藥, 中藥, 和漢藥 들로 불리는 전통 약물의 우수성은 최근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말라리아의 경우에도 이미 입증되었다. 한동안 완전히 퇴치된 줄로 여겨졌던 말라리아는 키니네에 대한 내성까지 갖추어 의학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수많은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환자들에게는 키니네가 아닌 다른 치료제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양약중에서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해답은 뜻밖에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쑥이었다. 모기약이 없던 시절 모기를 쫓는 데 애용되기도 한 이 식물에는 키니네 저항성 말라리아도 꼼짝 못하는 아르테미신 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중국은 그 덕분에 일약 세계 제일의 한의학국으로 떠올랐다.

 한약으로부터 해당 약효 성분을 분리 · 추출해 안전성을 평가한 뒤 신약화하는 작업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국은 산 · 학 · 연 유기체제가 가장 잘 이루어진 곳으로 꼽히는데, 정부가 지원하는 국립공동 약물연구 그룹(NCDDG)을 구성해 항바이러스제 · 항말라리아제 · 항암제 등은 천연 물질로부터 뽑아 내는 작업이 한창이다. 시카고의 일리노이 대학, 민간 기업인 그락소 연구소, 국립암연구소 등이 참여하는 이 작업의 첫 단계는 세계 각국에서 식물을 채집해 분류하는 것이다. 채집 장소의 특이성, 그 나라 특유의 민족의학성격, 전통 약물의 약효 정보, 30여 가지에 이르는 검색방법 등이 분류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서 분류된 약제는 ‘In Bio’ 같은 신약개발 프로그램에 이용된다.

 장교수는 “미국이나 중국에 견주어볼 때, 92년부터 국내외 전통의학 문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기 시작한 우리 작업은 때늦은 감마저 있다”라고 걱정한다. G7 계획에 따라 본격적인 한의학 문헌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을 진행하기 전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8권에 불과했다. 지난해 국내 최초의 소아과 전문의서로 꼽히는《급유방》을 비롯해《마과회통》《고사촬요》등 한의학 서적 11권의 번역이 끝났지만, 국내에 현존하는 한의학 서적 80권을 다 번역하자면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더 필요한 형편이다. 번역한 책을 정보통신 기술에 응용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가 전폭 지원하여 중의약을 신약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 왔다. 중국의 중 · 서 의학 결합 노력은 특히 오랜 연원을 갖는 것이어서,《중서의결합회지(中西醫結合會誌)》 같은 학술지가 나올 만큼 뿌리가 튼실하다. 같은 병증에 대한 한 · 양방의 진료법을 함께 찾는 이같은 작업은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진척되어, 북경 약물연구소 6백여 가지, 상해약물연구소 4백여 가지 등 1천5백여 진료법이 이미 정립된 상태이다.

‘한의학 선진국’인 중국과 협력
 서울대 천연물과학연구소는 이같은 중국의 성과를 국내 신동의약 개발 프로그램에 이용하기로 하고 지난 4월 중국 위생부 소속 중국의약과학기술출판사와 협약을 체결했다. 이 출판사는 한 · 양방 진료법 7백여 가지를 수록한《실용중서의결합진단치료학》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내 한의학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은 더욱 풍부한 내용을 담게 될 전망이다.

 전통 약물로부터 신약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그 약재의 독특한 약효나 성분이 이미 충분히 탐색된 상태이기 때문에 효율성이나 성공률 면에서 매우 희망적이다. 그러나 전통 약물에 대한 한 · 중 · 일의 고전 의약서 정보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데이터베이스화 작업 없이는 체계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 천연물과학연구소의 김시철 특별연구원은 “《의방유취》에 적힌 처방만 1만7천여 가지에 이르고, 중국의《보제방》에 나오는 처방은 무려 6만5천여 가지나 된다. 한 · 중 · 일 3국에 산재한 1만5천여 의약서를 개인이 일일이 찾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한자를 해독하는 일도 지나칠 수 없는 장벽이다.

 천연물과학연구소는 TradiMed 데이터베이스를 올해 안에 국내 전송망을 통해 제공할 계획인데, 의약계 종사자는 물론 관련 연구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으로 보인다. TradiMed 연구실은 이미 일리노이 대학의 천연 약물 정보를 국내 연구자들에게 서비스해 왔다. 일리노이 대학의 데이터베이스에는 10만개 이상의 화합물 정보와 동식물의 생물학적 활성, 독성, 화학 성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장교수는 이와 함께《동의보감》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영역화 작업을 95년부터 시작해 외국 연구자들의 전통 동양의약 연구에도 도움을 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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