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일깨운 큰 선비 南
  • 산청.박중환 기획특집부장대우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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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더나 배가 움직일 수 없듯이 민심을 떠나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물은 고요할 때도 있지만 사나울 때도 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까닭에 백성들에 의해 한 나라

 지리산 남서쪽 자락에 있는 중산리와 대원사 계곡에서 다투듯 쏟아져내린 물은 옛날 ‘살내’라 불렸던 德川에서 만난다. 덕천의 쏜살같은 물줄기는 남강에 이르러서야 길들여지고, 낙동강에 들어서면 도도함을 보여준다. 진주에서 덕천을 끼고 국도를 따라 지리산 쪽으로 가다보면, 산세가 가파라지면서 협곡을 이룬다. 한여름에도 오후 대여섯시께면 어둑어둑해진다.

 협곡이 깊어지면서 답답함을 느낄 주음 갑자기 탁트인 벌판이 나타나고, 하늘이 닿는 곳에 지리산의 으뜸봉인 천왕영봉이 그 자태를 드러낸다. 행정구역상으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이며, 흔히 덕산동이라고 부른다.

‘백성이 임금보다 먼저’라는 위민사상
 덕산동을 지나치다 보면, 덕천변에 4백30년을 버텨온 맞배지붕 한옥 2채가 수백년 풍상을 겪은 정자나무와 어우러져 있다. 조선조 巨 인 南     선생(1501~1572)이 나이 예순하나에 덕산동을 무릉도원으로 삼고 노년을 보내며 후학을 가르친 山天 이다. 이곳을 지나 중산리 쪽으로 조금 더 가면 덕천서원이 나타난다. 이 서원은 남명이 타계한 뒤 후학들에 의해 세워졌고, 광해조에   서원으로 승격됐다.

 8월18일 오전 이곳에선 남명의 학맥을 지켜오고 있는 유림과 昌   氏 후손, 남명학을 연구해온 하계인사, 그리고 관심을 가져온 몇 안 되는 지역인사들이 모여 제15회 남명추모제를 지냈다(62쪽 큰사진은 다례를 올리는 장면).

 조선중이    李 ,  谷 李 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실천주의적 성리학을 대성하여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고, 우리 근 · 현 대사의 굽이굽이마다 큰 영향을 끼쳐왔다고 평가되는 남명의 추모제 치고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남명 조식이 역사적으로 부각되지 못하고 오히려 폄하된 까닭은 이렇다.

 그는 임금의 무능과 탐관오리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12차례나 임금이 관직을 내려도 조정에 아첨꾼과 모리배들이 득실거리는 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며 평생 벼슬을 멀리했다. 그가 쉰다섯 때, 명종이 조정에서 벼슬을 하기 싫다면 그곳의 단성현감이라도 맡으라고 제수하자 임금에게 사의를 표하며 올린      가 그 유명한 丹城 이다. 그는 이 소를 통해 명종에게 “전하의 국사는 이미 그릇되어 나라의 근본이 없으며, 하늘과 백성의 뜻은 이미 떠났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주색잡기에 히히닥거리며, 높은 관리들은 빈둥거리며 오로지 뇌물을 긁어 모으고 백성을 착취하며 이리떼처럼 날뛰고 있으니…갈갈이 찢긴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라고 도리어 질책했다. 고려대 金忠烈 교수(중국 철학)는 “당시 왕권체제 하에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직언이었다. 선생의 시편 중《민암부》에 잘 나타나 있듯이 백성이 임금보다 먼저라는 철저한 爲民사상을 갖고 있어 이런 소를 올리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소는 조정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켜 참수론까지 나왔으나 선생의 인품과 학덕을 아는 대신들의 간언으로 화를 면한다.

 그는 또 당시 유생들이 기본적인 범절도 지키지 못하면서 四七理氣 논쟁만 일삼자 그들의 스승인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 “선생께서 꾸짖어 금지시킴이 없는 까닭이 아니겠느냐”고 나무란다. 이런 과단한 비판적 실행주의 때문에 그는 온갖 세력들로부터 미움을 사 견제와 모함의 대상이 된다.

 남명의 진가는 그가 죽은 지 2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제자들에 의해 드러난다. 그는 심오한 학문과 뛰어난 문장을 남긴 퇴계나 육곡과는 달리, 제자들에게 이론보다는 올바른 몸가짐(敬)과 당당한 실행(義)을 중히 여기도록 가르쳤다. 또 틈틈이 병법을 가르쳤고 면화재배법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그는 저술을 많이 내지 않았고 이것이 그가 후세 학문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된다.

의병장 · 실학파 등 대거 배출
 그러나 그의 제장 주엥서 임란때 의병을 일으켜 용맹을 떨친 장수가 60여명에 이르고, 그의 제자인   의 문하에서    李  등과 같은 조선조 후기의 실학파가 나올 수 있었다. 특히 의병 출신 가운데 忘 堂   ,    仁弘,   金 은 3대 의병장으로 꼽힌다. 남명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곽재우는 평소 주민들과의 좋은 유대를 바탕으로 게릴라 전법을 탁월하게 구사해 왜군을 떨게 한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남명의 수제자인 정인홍은 곽재우 김면과 함께 낙동강에서 왜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려 영남의병장이라는 호를 받았으며, 왜적이 물러나자 의병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병법을 익히게 했다. 그는 이때 개혁적인 의지로 피폐한 민심을 잘 수습한 능력을 인정받아 광해군 때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정인홍은 급진적인 개혁과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끝내 인조반정 대 역모자로 몰려 참형을 당한다. 정인홍의 몰락은 남명학파 제거로 이어져, 그 이후 남명학은 사실상 ‘역모의 학파’로 몰려 오아조사에서 왜곡되고, 그 때의 잘못된 평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정인홍은 丹    에 의해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된 이후 최근 그의 개혁정치에 관한 재평가가 일각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런 탓으로 숙종조에 대제학을 지냈던    金昌 은 남명을 “학문을 모르고  士기질만 가진 자”라며 “남명의 기질이 잘못되면 정인홍과 같은 역적이 나오기 마련”이라고 싸잡아 폄하했다. 또 남명은 낮은 벼슬에 불만을 품어 임금의 제수를 거부했다는 등 모함도 받았다.

 남명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가를 받지 못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정인홍의 죽음 이후 훈구파의 득세 아래서 숨죽여온 남명학맥은 조선조만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正  운동에 앞장서게 되고, 일제하에서는 三南지방 민족운동의 중심역할을 한다.

 3 · 1운동이 이러난 1919년 남명후학들이 프랑스 파리에 ‘長書’를 보낸 광복운동은 그 실례이다. 3 · 1운동 이후 겪어야 했던 독립의 한계와 좌절감은 부분적으로 사회변혁운동으로 이어지는 한 계기가 된다. 1923년 진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번졌던 백정 계급의 신분평등운동단체인  平社는, 이러한 사회변혁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은 형평사가 노선 분열을 일으키면서 일제하 초기 사회주의운동의 모체가 된 大同社를 탄생케 했다는 점이다.

 남명학풍의 과단한 비판적 실천주의 정신이 그 본거지인 지리산 남서 지방 사람의 기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역사적 사실로 꼬집어 지적하기는 어려우나, 남명 선생의 爲民 治사상이 이 지역 풀뿌리들의 비판 의식을 일찍 깨어나게 했으리라고 향토사학자들은 말한다. 1862년(철종 13년) 진주에서 일어나 삼남지방을 휩쓸었던 농민의 난도 백성의 저항권을 행사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1589년(선조 22년) 전북 전주에서 일어난   立의 난 당시에는 수백명의 남명 제자들이 옥사를 치르거나 죽는 참변을 당한다. 요즘말로 하면 진주의 사림파들이 정여립 일파와 교분하면 서 그들을 ‘의식화시켜’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는 서인들의 모함으로 빚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서인의 영수는  江   이었다.

 남명학맥과 관련되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볼 때, 왕권중심으로 쓰여지는 이른반 正史에서 그에 대해 평가절하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남명이벼슬을 끝까지 마다하고 비판적 자세를 갖게 된 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평민 차림으로 임금 독대
 남명은 열아홉살 때 사림파의 우두머리이자 개혁정치가인  庵 趙光祖(1482~1519)가 훈구파들의 역모로 죽음을 당하자 벼슬에 염증을 느끼고 학문에만 열중한다. 마흔다섯살 때 을사사화로 평소 친분이 있던 많은 인재들이 또다시 화를 입자 “벼슬에 나아가서 뜻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지조를 지키는 것이 대장부가 할 일”이라며 스스로 山林處士라 불렀다. 처사란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남명이 벼슬을 무조건 경원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교수(한문학)는 “명종이 그의 재ㄴ임 말기에 조정을 전횡한 영의정  元  의 관직을삭탈하는 등 정치쇄신 의지를 보이며 남명을 거듭 불렀다. 선생은 그 다음해인 예순여섯 때 혹시나 출사해 뜻을 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고 한양에 가  白衣로 思 에서 임금과 단둘이 만났다. 조선조 사상 평민의 차림으로 임금과 독대한 유일한 분일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治道를 묻는 임금에서 ‘정치제도를 혁신하고 인재 등용에 성의를 보일 것이며, 임금 자신이 학문에 힘써야 한다’고 직언했다. 그는 한양에서 머무르는 동안 조정이 여전히 간신배들로 가득차 있음을 본 뒤 다시 환멸을 느끼고 7일 만에 산천재로 되돌아갔다”는 史實을 지적한 뒤 “선생이 벼슬자리가 낮은 데 불만을 품고 제수를 거부하며 무조건 비판했다는 평가는 왜곡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남면 퇴계 육곡의 학문과 지역기반을 비교하면 오늘날 한국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지역색의 뿌리를 일면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남명과 퇴계는 영남지방의 양대학맥을 이룬다. 남ㅁ명이 합천 사람으로 경상우도(현 경남)를 중심으로 한 士林학파를 이뤘다면, 퇴계는 안동 사람으로 경상좌도(현 경북)를 중심으로 한  南학파의 거봉이다. 두 사람은 모두   ·  學을 신봉하면서 理氣二元論에 대해 氣發理  一 설을 근본으로 한 理 氣 으로 맞서면서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학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스스로 개혁 않으면 스스로 망한다”
 세 사람은 조선 중기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신세계를 지배해 왔고, 정치 사회 문화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퇴계와 高   大  사이에 8년간 벌인 四端七情논쟁에 이어, 퇴계의 영남학파와 육곡의 기호학파 간에 벌인 理氣논쟁은 조정 정치에까지 미쳐 동 · 서의 파쟁을 낳았고, 여기에 사림개혁파인 정인홍이 가세하면서 사색당파가 극으로 치닫느 부작용을 남긴다.

 아무튼 세 학파의 지역적 기반을 요즘 시체말로 빗대면 영남학파는 TK(대구 경북), 서울 경기지방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는 SK(서울 경기)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사림학파는 지역적으로 명확한 구분이 어려우나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경남과 지리산을 낀 호남지역의 비판적 재야세력으로 대별할 수 있을 법하다. 그렇다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 학파에 속했고, 학풍을 이었다는 것은 아니나, 지금도 그 성향이 지역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이 오늘의 정치성향에서 일면 드러나고 있다.

 조선조 초기부터 개혁파로 등장해 끊임없이 화를 입었던 사림파의 맥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가.

 세 학파는 모두 춘추전국시대의 공자와 맹자가 완성한 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따. 그후 빛을 보지 못한 공 · 맹학은 송나라 말  子와 그의 제자인  子에 의해 크게 발전해 정 · 주학을 이룬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중기인 충렬왕 24년(1298) 백이정이 들여와 고려말 3 (      ,    李 , 治  吉 )이 기반을 닦았다. 정 · 주학은  子學 性理學 道學 등으로도 불린다.

 남명 퇴계 육곡 세분 모두 정 · 주학을 기둥으로 해서 굵직한 학파를 형성한 거유이다. 남명은 선현들이 좋은 말을 많이 남겨 놓았기 때문에 후학들은 이를 본받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 반면, 퇴계나 육곡은 학문을 그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계와 육곡의 연구는 많이 이루어졌고, 산간벽지 국민학교 운동장에서도 그들의 동상과 공적을 보고 읽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남명은 그렇지 못하다. 원로 사학자 李   박사의 유작《한국유학사》는 퇴계와 율곡에 비해 남명을 매우 소홀히 다루고 있다.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가 한국사 연구를 총집대성했다는 《한국사 전 25권》을 뒤져봐도 남명 조식이란 이름조차 찾기 어렵다고 허권수 교수는 지적한다. 경상대 남명연구소 張源  교수(한문학)는 “남명에 고나한 연구자료를 전국 언론기관에 보내면 대부분의 중앙지는 조식 선생을 잘 모르는 듯 간단히 취급한다”고 아쉬워한다.

 사림파의 학맥은 고려말 정몽주와 이색에 이어 조선조에 들어 점필재 金 直, 그의 제자인   堂 金  , 김굉필의 제자인  光祖로 이어진다. 남명은 조광조로부터 배운 바는 없으나 개혁정치가이자 도학사상가로 명성이 뛰어났던 그를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이들 사림파 거봉들은 한결같이 역모에 휘말려 숨지거나 아니면 쫓겨나는 수난을 겪는다.

 그는 72세로 일생을 마감하고 산천재 뒷산에 묻혔다. 그의 묘소에 있는 비석에는 동족상잔의 탄흔이 남아 있어 그의 뜻이 무색하다. 이 탄혼은 빨치산들이 사격연습을 하면서 비석을 표적으로 이용해 생긴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동안 소홀히 다뤄졌거나 잘못 전해진 남명학을 바로 세우자는 재평가 운동이 서서히 일고 있다. 지난해 국민학교 6학년 국어 읽기 교과서에 나명의 생애와 뜻이 실렸다. 같은 해 경상대에도 남명학연구소가 설립돼 대만과 일본 학자가 참여하는 국제 남명학술대회가 열렸고, 지난 8월23일에는 부산에 전국규모의 한국남명연구소가 창립됐다. ‘스스로 개혁하지 않으면 스스로 망한다’는 남명의 외침이 더욱 크게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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