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K의 중간평가 겁난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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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대구에 ‘인물난’…‘보선’패하면 당 내분 휘말릴 수도

박철언 의원이 항소심에서도 유죄 판결을 받음에 따라 대구에서 또 다시 보궐선거가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의원이 앞으로 4개월 이내에 있을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도 유죄 선거를 받으면 자동으로 의원 직을 상실하게 되며, 그로부터 3개월 이내에 보궐선거를 해야 한다. 대법원에서 원심을 파기해 송환하는 이변이 없는 한 올해 10월 중순 안으로 보궐 선거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정기국회 회기 중에는 보궐선거를 실시하기 어려우므로 빠르면 오는 6월, 늦으면 8월께 선거가 있을 전망이다.

 대구 보선에는 공석이 된 국회 의석 한 자리를 메운다는 것 이상의 정치적 의미가 담겨있다. 우선 올해의 가장 큰 정치 행사가 될 것이 틀림없다. 올해는 선거도 없고 민자당이나 민주당 모두 전당대회를 치르지 않는다. 정치 실종 상황인 것이다. 대구 보선은 여야 모두가 정치적 에너지를 발산할 유일한 무대가 될 것이다.

 또한 정치관계법을 개정한 뒤 처음 치르는 국회의원 선거이다. 돈은 묶고 말은 풀어놓은 개정 정치관계법이 과연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있는 시험대이다. 정치권과 유권자 모두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는지 함께 치르는 수학능력 시험이 될 것이다.

대통령 정국 구상에도 영향 미칠 듯
 박철언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수성 갑은 지난해 보궐선거를 치른 대구 동 을과는 지역적 특성이 현저하게 다르다. 대구 동 을 지역은 10여 개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역 연고에 의해 선거가 좌우됐으나 수성 갑 지역은 사정이 다르다. 수성 갑은 이른바 TK정서를 제대로 대변할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수성 갑은 대구의 강남이라고 부른다. 새로 개발돼 주거 환경이 쾌적하기 때문에 대구의 지식인층이 주로 몰려 산다. 판사 · 검사 · 변호사 · 언론인 · 고급 공무원 들이 사는 아파트가 밀집해 있다. 대구에서는 정치 의식이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힌다. 말로만 얘기되어 오던 TK정서를 충분히 확인할 만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구 수성 갑의 보선 결과는 김영삼 대통령의 전반적인 정국 구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수성 갑 보선에서 민자당 후보가 참패하면 김대통령은 여권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현재 김대통령의 구상은 개혁 성향이 있는 인물로 민자당 조직책을 대거 교체해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와 총선에서 대승을 거둬 집권 하반기에 정권의 안정을 꾀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구 보선에서 패하면 김대통령의 이런 계획은 상당한 차질을 빚을 것이다.

 민자당도 수성 갑 보선에서 패하면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지난해 동 을 선거 때와는 달리 비민주계, 특히 대구 · 경북 지역 의원들이 크게 동요할 가능성이 높다. 5 · 6공 정치인들의 신당 결성 움직임과 맞물려 당이 균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민주당 처지에서도 수성 갑 보선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동 을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형편없는 표차로 4등을 기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번에도 꼴찌를 기록하면 지역당의 한계를 뛰어넘어 정권 교체를 이룩한다는 민주당의 꿈은 정말로 꿈이 될 수밖에 없다. 공천을 둘러싸고 당 내분이 가속화할 수도 있다. 최근 비주류가 당 지도부 개편을 요구하고 나온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동 을 선거 공천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수성 갑 보궐선거가 가지는 의미가 이렇듯 무겁지만 여야 모두의 고민은 마땅히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박의원이 그의 부인인 현경자씨를 내세워 한풀이를 하려 한다는 얘기가 나돌아 사정은 더욱 복잡하다.

 박의원이 구속돼 있는 10개월여 동안 대신 지역구를 관리해온 현경자씨는 “출마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편이나 국민당에서 출마하라고 권유해도 개인적으로 심사숙고할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박의원도 지역 언론과 가진 옥중 인터뷰에서 “보선이 있다면 야권 단일 후보가 나와야 하지만 그 후보가 집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은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현경자씨 출마 절대 불가”
 그러나 박의원측에서는 현경자씨의 출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 같지는 않다. 현씨는 지난 열 달 동안 1주일에 한번씩 꼭 지역구에 내려와 유권자들에게 얼굴을 알리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현씨가 운영하는 여성대학 졸업자만 해도 5백여 명을 헤아린다. 박의원의 한 측근은 “민자당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현여사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현경자씨가 박의원의 대리인이 돼 국민당 후보로 출마하면 민주당 지도부는 난처해진다. 지난 동 을 선거 때 국민당이 민주당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국민당에서는 민주당측에 현씨가 야권 단일 추보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구할 것이 뻔하다. 이기택 대표는 최근 이와 관련해 현경자씨 지원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서는 ‘절대 불가’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대구의 지역구 위원장들은 ‘그렇게 되면 대구에서 민주당 지역구 간판을 모두 내려버리겠다’고까지 얘기하고 있다. 민주당 지도부가 대구를 포기하면 무엇하러 지역구 위원장 노릇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민주당 대구 동구 갑 위원장 임대윤씨는 “민주당 지도부가 현경자씨를 지원하면 현역 지구당위원장들에게 모두 물러나라는 지시를 한 것으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대구 중구 위원장 이강철씨는 “수구세력의 한풀이에 장단을 맞추는 것은 대구 시민에 대한 모욕이다”라고 얘기한다. 현경자씨는 박의원에 대한 유죄 판결이 나온 뒤 “박의원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감옥에 갔는데 그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해봤느냐”고 묻자 “지금이 훨씬 심한 것 같다”고 대답했는데 이런 부분도 민주당 전체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참신한 인물을 찾아내 야권 단일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나올 뿐이다. 현재 민주당 수성 갑 위원장은 계명대 학생회장 출신 권오선씨(36)가 맡고 있는데, 지난 14대 총선 대 참패했기 때문에 당내에서는 교체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교체 멤버로는 재야 운동권 출신 김부겸 당무기획부실장이 거론되고 있으나 이선실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남아 있어 아직은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다. 권위원장의 경우 그동안 나름대로 지역구 관리에 힘써왔기 때문에 교체할 경우 본인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예상돼 민주당으로서는 이래저래 어려운 형편이다.

 민자당도 대구 정서를 돌파해낼 수 있는 인물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다. 현재 수성 갑 지구당위원장은 11~13대 의원을 지낸 정창화씨가 맡고 있지만 정위원장의 본래 지역구는 경북 의성이다. 정위원장은 14대 때 공천에서 탈락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바 있다. 그는 낙선 뒤 1주일 간에 걸친 민자당 지도부의 설득으로 92년 10월부터 수성 밥 지구당위원장 자리를 맡아왔는데 지역 지명도가 낮아 고전하는 상태이다. 13대 때 농수산위원장을 맡아 농정을 망친 데 상당한 책임이 있는 인물로 지목돼 경북 지역 농민 단체에서 낙선 운동을 벌일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정위원장에게는 큰 부담이다.

 그러나 여당의 당료 출신(민주공화당 공채1기)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3선을 한 저력과 선거를 여러 번 치른 경험이 있어 민자당이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정위원장의 대타로는 국방 대학원 김태우 교수, 문희갑 전 의원, 이치호 수성 을 지구당위원장, 금병태 변호사 등이 거론된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여야는 모두 대구정서에 대해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해왔다. 청와대와 민자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구 시민의 대다수는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에 박수를 보낸다고 주장했으며, 야당은 대구의 민심이 김영삼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얘기해 왔다. 대구 수성 갑 보선은 이같은 정치권의 일방통행식 주장에 대한 대구 시민의 첫 번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땅한 후보조차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으로 보아서 여야 모두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틀린 것 같다.
文正字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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