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 위기, 발단은 재단 전횡
  • 김당 기자 ()
  • 승인 199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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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족벌체제 시비에서 비롯… 87년 이후 교수 · 학생, 재단이 4명의 총장 내세워

 베트남 내전 또는 10년 전쟁. 문교부로부터 ‘전원 유급’이라는 최후통첩을 받은 세종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세종대 사태를 두고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얽히고설켜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만큼 복잡하다는 뜻이겠다.

 80년 이른바 민주화의 봄이 왔을 때 세종대학생과 교수들이 맨먼저 터뜨린 불만은 ‘족벌체제의 전횡’이었다. 78년 교수로 부임한 설립자(朱永夏 · 崔玉子 부부)의 장남 주명건씨(당시 31살)가 학교운영에 개입하는 등 학원을 파행적인 족벌체제로 운영해왔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반발은 5 · 17과 함께 사라졌고 학원자율화운동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87년의 6월항쟁이었다. 6월10일 시위중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작된 학원자율화 농성투쟁은 9월18일까지 1백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당시 학교당국과 학생들은 농성을 해제하기 전에 학생 요구사항 63개항에 합의, 양쪽 대표 정병선 학장(당시는 단과대학이었음)과 황병렬 총학생회장 이름으로 합의사항을 법률사무소에서 공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뒤로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문교부도 사태악화에 한몫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뒤 88년 2학기 들어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확인작업을 폈으나 공증까지 마친 합의사항은 거의 이행되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그 원인이 재단의 ‘하수인에 불과한 임명총장체제’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88년 9월8일 이른바 학원자율화투쟁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학내의견을 수렴한 결과, 학생들은 ‘元興均총장 퇴진 · 민주적 총장선출방식 채택 · 족벌타도’라는 마스터플랜을 짰다. 10월10일 비학생총회를 소집하여 “어용 · 무능총장 퇴진으로 학원자주화 앞당길 것”을 결의한 학생들은 그날로 총장실을 점거하여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은 43일 동안 계속되었다. 한편 학생들의 투쟁에 힘입은 교수들도 교수협의회를 결성, 학생들쪽에 가세했으며 직원들도 직원노조를 만들어 제목소리를 내는 등 전반적으로 학내 분위기가 재단을 비난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대세에 밀린 주영하 재단이사장은 전체교수회의에서 직선총장제를 약속했으며 주명건교수(당시 경영대학원장)도 모든 보직에서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학교당국과 학생측은 ‘정상화 방안’ 16개항에 합의했는데,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총장선출 여론수렴위와 총장직선제였다. 교수 5인 이상의 추천을 받은 총장후보 중 학생과 노조대표 5인씩으로 구성된 여론수렴위원회에서 동의를 얻은 후보 중 한명을 전체교수회의에서 직선으로 선출하고 재단은 이를 승인하기로 한 이 제도는 “학생이 교수를 심사한다”는 비난과 함께 “대학의 각 구성원들이 학사운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모범적 선례”라는 찬사를 받는 등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실제로 원흥균총장이 물러난 뒤, 여론수렴위의 동의를 얻은 李鍾出 교수협의회장이 11월30일 전체교수회의에서 총장으로 선출됨으로써 이른바 ‘세종대식 총장 선출방법’이 타대학의 ‘연구사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이 타대학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문교부가 총장승인을 요청한 지 두달이 넘은 2월15일에서야 거부방침을 밝혔다. 결국 선출된지 8개월이 넘도록 문교부의 총장승인을 받지 못한 이총장(직무대리)과 보직교수 전원이 재정압박과 교직원 임금체불(세종대는 학교예산 고갈로 7월25일에 교직원 2백80명의 7월분 봉급을 지급하지 못했다) 등을 사유로 89년 8월에 사표를 제출하는 사건이 생겼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부터 세종대 조선대 등 5개 대학 감사에 들어간 문교부가 감사결과를 통보하면서 “정관에 없는 대학발전위 등 자치기구를 해체하고 총장직무대리 등 보직교수를 해임하라”고 처분 명령을 지시했다. 이총장의 사표수리를 한달 동안 보류한 채 눈치만 살피던 재단은 9월16일 문교부 지시대로 사표를 수리하고 사흘만인 9월19일 朴洪球교수를 총장으로 임명, 그날 전격적으로 문교부 승인을 받아냈다.

 교수들은 9월20일 전체교수회의를 소집, 재단이 일방적으로 임명한 박총장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의한 데 이어 10월6일 吳英淑교수(영문과 · 교수협의회장)를 총장으로 선출하여 이른바 ‘1대학 2총장’체제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이 11월7일부터 박총장 해임과 오총장 임명을 요구하면서 총장실과 본관을 점거, 학사업무가 마비되고, 신입생 원서접수를 조직적으로 방해할 움직임을 보이자 학교당국은 11월24일 임시 휴업조처를 내렸다. 합의사항에 대한 일방적 파기가 발단이 된 세종대 사태는 여러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더 이상 후배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재학생들이 입학원서 접수를 방해하는 진풍경이 벌어지는가 하면 총장 취임식에서부터 최근 사퇴할 때까지 학생들의 거부로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채 재단 수익사업체인 세종호텔에서 결재도장을 찍어야 했던 박총장은 ‘호텔총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됐다. 학교측은 4월 14일 단과대 학생회장 등 학생51명을 기물파손 및 업무방해 혐의로 무더기 고발한 데 이어 4월15일 공권력 투입 요청과 함께 “학사일정 마비와 학생들의 극한행동 우려”를 명분으로 무기한 임시휴업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놓았다. 또 학교측은 4월25일 세종호텔에서 열린 징계위에서 직선총장 오영숙교수 해임을 결정하는 등 강경일변도로 나갔다. 그러나 그럴수록 학생들의 대응방법도 강경해져 거의 날마다 집회와 시위가 계속되자 6월2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그 결과 1백16명이 연행되고 홍성수 총학생회장등 5명이 구속됐다. 학원을 ‘평정’한 뒤로도 전경 3개중대가 교내를 지키는 가운데 비로소 학교에 들어온 박총장은 6월8일 홍성수군 등 4명을 제적하고 이수형 자연과학대 학생회장 등 9명을 무기정학시키는 등 학생 20여명을 징계했다.

 그리고 학교측은 6월20일 세종호텔에서 대화분위기조성책의 일환으로 사표를 제출한 박홍구총장 후임에 이중화교수를 선출했다. 지난 6월25일 공권력이 철수하면서 학교측은 휴업 70여일만에 수업정상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정상화될 분위기가 조성되었기에 내린 조처는 아니었다. 예상대로 건국대에서 농성을 하다가 6월25일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은 다시 ‘2대 불법총장’부터 쫓아내고 쇠파이프와 화염병으로 재무장했다. 다시 상황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학교측은 학생들의 수업참여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학생들은 불법총장 퇴진과 민주총장 인정, 총장직선제의 학칙명시와 정관 삽입, 대학발전위원회의 인정과 학칙 및 정관 명시 등을 골자로 한 15개 요구조건을 내걸고 날마다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수차례의 공권력 투입과 징계조처 등 잦은 극한처방으로 오히려 적개심과 내성만 길러온 학생들은 문교부의 ‘전원유급’이라는 최후통첩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고 있다.

 鄭元埴 문교부장관은 6월29일 기자회견에서 “학교측의 수업기간 2주 단축신청을 승인하되 만약 수업단축 최대기한인 7월10일까지 수업정상화가 되지 않으면 전원유급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종대 사태는 백만학도의 대리전”이라고 규정한 전대협과 문교부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소지마저 보이고 있는 이 사태가 그 경고 한마디로 가라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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