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학의 '거대한 마침표'
  • 강원 원주시.이문재 기자 ()
  • 승인 1994.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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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 <토지> 전5부 25년 만에 완결 /소설 끝 장면과 집필 완료 시점 쪽같이 '8월15일'

朴景利씨(68)의 대하소설 〈토지〉가 1994년 8월15일 새벽2시에 끝났다. 25년 동안, 1897년부터 1945년을, 평사리에서 서울과 간도, 일본을 넘나들며 흘러와 하구에 다다른 대하의 저 ‘거대한 마침표’는 소설 속에서도 8월15일(1945년)이었다.
 <토지>의 마지막 붓끝은 평사리에 돌아온 서희를 따라갔다. 강가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딸 양현은, 해당화 옆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는 어머니 서희에게 다급하게 일본의 패망을 전한다. 그러자 ‘서희는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았다. 그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순간 서희는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작가의 소설 끝내기와 소설의 대단원이 8.15에서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지난 8월15일 새벽,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한국 소설문학의 산봉우리인 <토지>의 ‘점안식’을 마친 작가는 ‘무심하게’ 말했다.

 “아무런 감정이 없어요. 끝났는지 실감이 나지 않아요. 배만 살살 좀 아프네요”(50쪽 인터뷰 참조). 작가의 낯빛은 무표정했는데, 온화함이 환하게 번져나왔다. 그리고 ‘끝’이 라고 쓰여진 마지막 원고지를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준다.

 ‘…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끝’. 서희의 몸에서 쇠사슬이 풀려나갔듯이, 그날 작가 박경리씨의 몸에서 <토지>는 ‘끝’자와 함께 풀려나갔다.

잉크병 때문에 혼난 <토지>의 마지막 1주일
 <토지>의 마지막 1주일 동안 작가의 일상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새벽2시에 일어나 원고지 앞에 앉고, 소설이 잘 나가지 않을 때면 무심하게 (그는 이 ‘무심’을 강조한다) 원고지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펜촉을 원고지에 대본다. 그러면 문장이 이어진다. 그래도 막힐 때면 부엌으로 가 그릇들을 닦거나, 텃밭에서 따온 고추를 다듬거나 했다.

 자랑에 인색한 작가는 유독 이 고추에 대해서만은 자랑을 아끼지 않는다. 누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냐고 물어오면 그는 서슴없이 “내가 키운 고추를 잘 말려서 꼭지를 딸 때”라고 답할 정도이다(이때 질문한 이들은 당황한다). 문학보다 삶이 우선이라고 자주 발언하듯이, 그는 고추 농사에서 생명의 존엄함과 모순을 깨닫는 것이다. 작가로 나선이래 그는 늘 일과 글쓰기를 병행했다. 일의 갈피갈피에서 글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아침 6시께 다시 살풋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 많을 때는 18마리나 되는 고양이와 강아지 3마리에게 밥을 해주고, 밥짓기와 빨래, 집안청소와 밭일 등으로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서재에 들어가 펜을 잡는다. 저녁에 잠시 텔레비전 앞에 앉는 것이 유일한 휴식 시간인데, 깜박거리며 졸 때가 많다.

 실감이 나지 않는가는 작가에게도 대단원을 앞두고 초조했던 적이 꼭 한 번 있다. 지난 8월 초순, 작가는 잉크병 뚜껑 때문에 혼이 났다. 연세대 원주분교 국문과에서 선물한 잉크 10병 중에서 8병은 그동안 <토지> 5부를 쓰느라 다 비우고 2병이 남아 있었다. 둘 다 뚜껑이 열리지 않아서 뒤로 미룬 것이었는데 만년필의 잉크가 동이 나려 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궁리 끝에 뚜껑에다 송곳을 대고 망치로 구멍을 뚫어 빈 잉크병에 옮겨 놓았다. 그때서야 안심이 되었다.

가본 적 없는 평사리, 소설과 닮은 점 많아
 “<토지>에는 우연이 참 많았어요.” 평사리가 작품의 무대로 결정된 것부터가 우연이었다. 그가 구상하던 토지는 너른 들판과 대지주, 커다란 산과 강을 요구했다. 하동에 있는 친척  집에 들렀다가 나오는 차 안에서 그는 무릎을 탁 쳤다. “여기다 ! ”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지리산과 하동, 섬진강과 들판. 그리고 집필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평사리에는 조참판댁이 있었고, 연당과 곳간도 그 집에 ‘소설처럼‘ 있었으며 그 댁 안주인도 점잖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평사리에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소설과 소설 쓰기의 마지막이 우연하게도 8월15일에서 끝난 것이었다. 당초에는 8월10일쯤 완결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7월 하순 경주에서 열린 문학인 대회와 지독한 가뭄과 무더위, 그리고 낯선 방문객들(기자들 같은) 때문에 늦어진 것이었다. 굳이 8.15에 맞출 생각은 없었다.

 1969년 〈현대문학〉9월호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25년, 〈토지〉에는 행방불명된 남편의 그늘, 암과의 투병, 시대의 압력과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가족사 등이 감겨 있다. 또 저 25년에는, 운명에서 한의 미학으로, 문명에서 문화로, 거대한 역사에서 민초들의 자잘한 삶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그 모든 것들을 감싸안는 생명론으로 진화를 거듭한 작가의 정신사 또한 고스란히 용해돼 있다.

 외동딸과 함께 생활하던 43세의 작가 박경리는 궁핍했고 외로웠다. 6.25가 나던 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이감되는 도중 행방불명된 남편(김행도씨)의 그늘에서 겨우 빠져나왔나 싶던 시절이었다. 응용화학을 전공한 남편 김씨는 광복 직후 인천 전매국(나트륨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작가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용공으로 몰려 사라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토지〉는 6.25 이전 외할머니가 들려준 거제도의 누런 벼와 호열자(콜레라) 이야기에서 촉발된 것이지만, 56년 김동리씨의 추천으로 작가가 된 이후에도 계속 유예되고 있었다. 개인사와 시대에 대한 불신으로 구분되는 초기 단편들은 물론이고, 장편 〈시장과 전장〉의 도시성과 〈김약국의 딸들〉이 갖고 있는 토속성이 〈토지〉에서 하나로 어우러질 것이었으므로 작가의 의욕과 기대는 컸다.

암과 싸움 끝내자 '시대'가 가로막아
 그러나<토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는 암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시대적 고통이 마무리되는 순간, 개인적 고통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암 선고(유방암)를 받았을 때 '소풍을 가는 기분'이라고 말하리만치 당시의 현실은 그에게 '무거운 바위덩어리'였다. 현실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가슴에 붕대를 동여매고 <토지>를 썼다. 암의 위협으로부터 탈출한 그에게 다시 ‘시대’가 가로막았다. 남편을 형무소에서 잃은 그는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사위를 생각해야 했다. “보이지 않는 압력 앞에서 엎어지듯이” 그 한 시대를 견뎠다.

“문학보다는 삶이 우선이다”
외손자 원보(김지하 시인의 아들)를 업어 키우며, <토지>를 썼다. 그렇게 시대와 팽팽하게 맞섰던 작가는 그러나 당대를 글쓰기의 대상으로 심지 않았다. 더 거슬러서, 동학의 여진이 남아 있던 구한말로 올라갔고, 돌 하나 풀 한 포기의 생명에도 주목하면서 민족사의 모순이 배태되던 일제 강점기를 ‘토지’에 하나하나 파종했다. 글쓰기 자체가 곧 당대와의 대결이었으나 눈 앞의 상대를 무찌르는 1차원적 싸움이 아니었다. 당대 현실의 앞(일제 강점기)과 뒤(생명론의 미래지향성)에서 감싸안으면서 당대를 극복한 것이었다. 문학 비평가들이 말하는 ‘거대한 모성’의 발현이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데뷔 직후 조연현씨의 문학강연회에 갔다가 우연하게 청중들에게 털어놓은 이 말을 박경리씨는 지금도 번복하지 않는다. ‘문학은 불행의 편이고, 문학은 끊임없는 단련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불행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문학보다는 삶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작가.작품의 존엄성도 중요하지만 인간.생명의 존엄성이 더 소중한 까닭이다.

 80년에 그는 원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토지>3부 이후 이완된 마음을 다잡자는 각오였다. 흙과 자연에 적응하면서 혼자 서기란 쉽지 않았다. “정릉 시절에는 문학을 위한 문학을 한 듯했다.”는 그는 원주에서 생활인으로 뒤늦게 성장했다. 원래의 땅, 본질의 대지로 해석되는 원주에서 그는 한의 미학과 생명론을 단단하게 굳혀나갔다.

 80년대 중반, 사위인 김지하 시인도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손주들도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작가는 1930년부터 1938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진주 형평사 운동과 항일운동에 투신하는 지식인과 민초들의 파노라마를 제4부에 담아냈다.

 여기에서 작가는 민족 문화의 핵심을 탐사하는 한편 한과 생명 사상, 도덕적 민족주의 철학을 심화시킴으로써 <토지>의 너비와 깊이를 확장해 나왔다.

 작가가 말하는 ‘한의 미학’은 일본의 ‘원한’과 견줄 때 분명해진다. 우리의 한은 앙갚음이나 보복이 아니다. 한의 정서는 소망이고 그 소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일본 유학파)의 영향으로 우리 한의 건강하고 미래 지향적인 에너지가 일본의 ‘원한’으로 축소.왜곡되고 말았다고 박경리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적했다.

‘자신에 대한 비정함’포기 안해
 그러나 제 4부 3편을 쓰다가 작가는 스스로 제동을 건다. 작가는 산문집<꿈꾸는 자가 창조한다>에서 그때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4부3편 8장의 조찬하가, 유인실이 임명희의 제자인 것을 임명희를 통해 들었는데 그것을 새카맣게 잊었다는 대목은 땜질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은 조찬하가 잊은 것이 아니다. 작가가 잊은 것이다’ 그는 ‘시간과 원고료에 대한 과욕이 저지른 이같은 차질이 참으로 부끄럽다’며 연재를 중단했다. 이 자책과 반성의 결과는 <토지>에 새로운 힘이 되었으리라. 그는 ‘<토지>를 완결하는 것만이 보상하는 길’이라는 각오를 덧붙였다.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편협하다고 말한다. “남의 종이 되기도 싫지만 남의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는 말에, 삶에 임하는 그의 자세가 요약된다. 18세에 자신을 낳은 젊은 아버지와의 불화와 어머니에 대한 애증에서 비롯된 강파른 성격은 전후 혼란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시력으로 변화했고, 그 이후의 고난을 견디게 하는 힘으로 커나갔다. 그러나 절대 자유와 존엄을 지키려는 이같은 성격을 타인들에게는 불편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박경리 선생을 처음 만나면 소화불량에 걸린다”라고 말하리만치 아직도 그에게는 낯선 사람에 대한 껄끄러움이 남아있다.

 ‘타협보다는 죽음을’이라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는 성격에서〈토지〉는 태어났지만, 소설은 작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생명에 대한 연민’을 체득한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정함’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작가 정신을 그는 후배 문인들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생명에 대한 연민과 자기 자신에 대한 비정함이 없다면 문학과 예술은 불가능하다는 엄연함을.

 점안식을 마친 〈토지〉는 오는 8월 말 전5부 16권이 책으로 묶여지면서 완간된다. 이미 그 1부가 쓰여질 당시부터 문단 안팎의 주목을 받아왔지만, 미완이라는 이유로 본격적인 ‘진단’은 완간 이후로 줄곧 연기되어 왔다.

‘끝’에서 다시 태어난 소설
 〈토지〉완간이 갖는 의미는 문학의 울타리를 넘어 문화사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오늘 10월부터 전방위에서 이 작품을 조명하는 학술 세미나와 축하 잔치가 잇따르는 이유는 오로지 〈토지〉와 작가 박경리가 차지하는 비중에서 나오는 것이다(51쪽 기사 참조). 지금까지 나온 한국 대한소설의 뿌리이자 봉우리가 〈토지〉임을 부인할 시각은 그리 많지 않다. 한 작가가 25년에 걸쳐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총체를 모두 16권이라는 방대한 부피로 탐사해낸 유례를 세계 문학사는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지난 7월 프랑스에서 나온 〈토지〉불어판에 대한 현지의 호평은 〈토지〉의 세계적 보편성을 새삼 입증한 것에 다름 아니다.

 〈토지〉완간은, 작가가 희망하고 있듯이 우리 전통문화에 바탕한 새로운 문학이론을 정립하는 계기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 방식의 변화에 대한 중요한 논점을 던져놓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비롯된 서양의 소설 이론으로 〈토지〉의 미학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예컨대 인물과 사건이 하나의 주제에 종속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 〈토지〉는 민족 문화의 정체성과 그 핵심을 건드리면서 성큼 문학의 범주를 넘어선다. 미래지향적인 한의 미학, 모든 생명은 생명으로서 평등하다는 생명론은 한민족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던져놓고 있다.

 박경리씨는 삶과 사물, 가치와 현상을 바라볼 때 “전후좌우에서 살피라”고 자주 말해왔다. 작가의 이와 같은 주문은 이제〈토지〉에게 그대로 돌아간다. 〈토지〉는 문학 연구자와 평론가, 그리고 독자들에 의해 전후좌우에서 평가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토지〉완간에 대한 헌사들도 수북이 쌓일 테지만, 동시에 차가운 비판도 없지 않을 것이다. ‘끝’이라고 쓰는 순간 우뚝 선 〈토지〉가 가야할 길은 우선 저 헌사와 비판의 사이이다. 그러나 〈토지〉는 그 둘을 어느 사이엔가 품에 안고 우리 문화의 한 핵심적인 길을 열어가며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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