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평화협정’ 수용할 수도 있다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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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핵협상 조기 타결 위해…“한국은 북측 주장 무시 바람직”



  오는 10일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미국과의 전문가 회담과 뒤이어 23일 제네바 고위급 회담 재개를 앞두고 북한이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돌연 들고 나와 그 의도와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북한이 지난 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 북한핵을 둘러싸고 한반도 주변 열강이 서로 제몫 챙기기 외교에 한창인 시점에서 평화협정 문제가 불거져 나와 특히 눈길을 끈다. 더욱이 휴전협정 당사자인 중국마저 북한의 요구대로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심각성을 더해준다. 이는 중국이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으로, 미국도 현실적으로 북한의 주장을 종전처럼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됐다.

“북한의 일괄 타결 노림수”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이 본격화하는 시점에서 평화협정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정치적 속셈이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3월 이후 핵 때문에 줄곧 궁지에 몰려왔던 북한 외교는, 지난달 초순 제네바 회담을 계기로 수세 국면에서 벗어나 공세적 국면에 있다. 이를테면 연락사무소 문제와 경수로 지원 문제를 분리해 다루기로 한 것이나, 전문가 회담을 베를린은 물론 평양에서도 열도록 미국측 동의를 얻어낸 것은, 북한의 공세적 실리 외교가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그 때문에 북한은 현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평화협정을 본격 제기함으로써 이 문제의 일괄 타결을 노리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북한은 91년 가을 한국과 함께 유엔에 가입한 뒤 92년과 지난해 가을 유엔 총회 개막에 앞서 유엔 안보리에 주한 유엔군사령부 해체와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한 문건을 회람시킨 바 있다. 유엔에 가입했으니만큼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여 군사적 제재를 가하려고 설치된 유엔군사령부는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또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될 경우 정전협정도 당연히 평화협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평화협정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지난 5월 군사정진위에서 일방 철수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4월에는 군사정전위 내의 중립국 감독위 북한측 초청국인 옛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를 철수시킨 데 이어 폴란드 대표도 철수토록 했다. 그 때문에 군사정전위는 사실상 기능 마비 사태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북한이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궁극 목적이 주한미군 철수임을 중시하고 이에 적극 반대해 왔다. 특히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만을 협상 상대로 주장해온 북한의 저의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져왔다.

  한국 정부는 그러나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논의가 한창이던 91년 6월, 이상옥 외무부장관을 통해 남북한 유엔 가입후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 보장 장치를 할 것을 전제로 평화협정 문제와 주한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한 정통한 외교 소식통은 “우리 정부는 유엔군사령부 해체 문제는 긍정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유엔군사령관을 한ㆍ미 연합사 사령관인 미군 장성이 맡고 있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돼도 한ㆍ미 전력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미군 철수에도 유연할 듯
  미국측은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무조건 반길 처지가 아니다. 미ㆍ일방위조약 가운데는 주일 미군기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로 주한 유엔군사령부의 활동을 계속 지원한다는 조항이 있다. 따라서 주한 유엔군사령부가 해체되면 문제의 조항에 대해 미ㆍ일 양국이 협상해야 한다.

  현재 평화협정 문제에 관한 해법으로는 △평화협정 주장을 무시하거나 △중국을 중재자로 내세워 해결을 모색하거나 △미ㆍ북한 핵협상에서 일괄 타결하는 등 세 가지 방안이 있을 수 있다. 둘째 안은 중국이 이미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고, 세 번째는 북한이 노리는 것이다. 金容浩 교수(외교안보연구원ㆍ북한정책)는 “북한이 핵개발 의혹을 완전히 해소할 때까지 일체의 평화협정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다만 우리측이 경계해야 할 것은 북한과의 핵협상에서 조기 타결을 위해 다소 서두르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미국의 태도다. 어차피 북한과 수교가 불가피하다면 전쟁 상태는 종결돼야 하고, 그 방식이 평화협정이라면 미국은 굳이 이를 지연하거나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할지 모른다. 또 평화협정 체결 뒤 불가피하게 거론될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서도 미국은 좀더 유연한 태도를 취할 것이 분명하다. 주한미군 철수규모와 시기를 북한의 태도 변화와 연계해온 미국은, 막상 북한과 수교하는 데까지 가게 되면 미군을 언제까지나 한국에 주둔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卞昌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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