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 직원은 현대판 노비?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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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직자 · 퇴직 1년 미만자’ 스카우트 금지 협약이 ‘족쇄’



 증권사 직원들은 직업 만족도가 낮은 부류에 속한다. 영업을 잘해도, 손에 쥐는 돈 액수는 못한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다. 왜 내 주식 값이 떨어졌느냐고 고객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기가 일쑤이고, 좀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 증권시장은 ‘빛과 그늘’이 뒤엉킨 혼돈의 세계다. 주가는 천 포인트라는 꿈의 고지를 향해 용트림하고 있지만,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다.

 최근 쌍용투자증권에서 교보증권으로 옮긴 ㅎ과장은, 근무는 하고 있지만 매우 어정쩡한 상태다. 그는 전 직장에서 2개월을 끌다가 7월 말에 사표가 수리됐으나, 한달이 넘은 지금도 교보증권로부터 발령을 받지 못했다. 같이 옮긴 동료 7명 가운데 4명은 사표조차 수리되지 않았다. 이들은 쌍용에 적이 있다고 하기도 어렵고 교보 직원도 아닌 채로 3개월 넘게 안방 신세이다.

기본권 해치는 반자본주의적 문건
 이들이 공중에 뜬 것은, 8월25일 쌍용측이 한국증권업협회에 교보를 부당 스카우트 협의로 제소했기 때문이다. 쌍용이 교보를 제소한 근거는 92년 1월 32개 사장단이 자율 결의 형식으로 맺은 ‘회원간 질서 유지에 관한 협약’이다. 증권사 직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협약을 ‘현대판 노비문서’라고 성토한다. 이들은 이 협약이 헌법에 보장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고 자유 경쟁을 해치는 반자본주의적 문건이라고 공격한다.

 쌍용 · 교보 건이 한달 냉각기 안에 화해를 이루지 못하면 협회규율위원회가 ‘재판’을 연다. 형량은 정관 53조에 근거해 위반 정도에 따라 정하게 돼 있지만, 사실상 고소자가 피고소자를 얼마나 꽤씸하게 여기느냐 하는 강도에 달려 있다.

 한국증권업협회 정강현 상무는 협약을 맺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협약은 일종의 신사협정이다. 인력을 무리하게 스카우트하는 데서 오는 폐해를 막고 질서를 유지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회원사는 다른 회원사 직원(현재 재직중이거나 퇴직하여 1년이 경과되지 아니한 자)을 채용하지 아니한다’로 돼 있다. 신설회사나 투자금융사에서 증권사로 전환한 회사에 한해 93년 2월7일까지 한 증권사에 3인 범위 내에서 채용할 수 있다고 예외 규정을 두었으나, 이 규정의 효력도 지금은 사라졌다.

 그러나 그동안 기존 증권사에서 신설 회사로 인력 이동은 끊이지 않았다. 증권사 간에 감정이 격양돼 이 틈새에서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았다. 인력을 많이 뺏긴 쌍용 · 한신 · 동서는 ‘탈취자’인 동부 · 신흥 · 동방페레그린을 ‘용서’할 수 없었고, 마침내 협회가 탈취자들을 징계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이들은 회사채 인수 영업을 한달간 정지당했고 벌과금 천만원씩을 물었다.

 제재를 피하기 위한 편법도 나왔다. 재벌 그룹 소속 증권사들은 증권사에 발령 내지 않고 제조업체에 잠시 있게 한다. 협회는 위반 여부를 감시하는 ‘경찰’로서 실사를 나가기도 하지만 추적에 실패하기 일쑤이다. 다른 회사로 전출시킬 수 없는 증권사는 몇달간 놀리는 고육책을 쓴다.

 증권사에서 스카우트가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영업 비밀이 새나가서가 아니라 ‘잘난 사람’을 뽑아가기 때문이다. 흔히 증권영업은 전화기와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해 영업 직원들의 돈줄이 약정고 경쟁에서 우열을 가른다. 물론 더러는 지점장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야금야금 유능한 직원을 솎아내 쑥대밭으로 만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설 회사들이 공격적 스카우트를 불사한 것은, 유능한 영업 사원을 스카우트하는 것이 기존 대형 회사를 공략하는 데 가장 파괴력이 높은 무기이기 때문이다.

 신설 사에는 대형 사가 갖지 못한 매력이 있다 ㄷ증권 q부장은 “대형 사가 한계효용 체감이라면 신설 사에는 한계효용 체증 원칙이 적용된다”고 말한다. 신설 사들은 대우가 좋고 승진 가능성이 큰 데다가, 잘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것이다. 첫 합작 증권사인 ㄷ증권 ㅇ차장의 연봉은 1억5천만원 가량된다. 급여 5천만원에 한달 평균 접대비가 2백만원, 연말 성과급이 7천만원이다. ㅇ차장은 자기 회사에 연봉의 10배에 달하는 이익을 남겨주므로, 그가 받는 연봉은 적절한 수준이라고 영업 직원들은 말한다.

자존심 지키고 집안 단속하려 ‘제소’
 기존 대형 사에는 약정 실적에 따른 성과급이 거의 없다. 접대비로 1만~2만원을 주는 것도 최근에야 생겼다. 반면 신설 사나 외국 증권사들은 회사에 기여하는 금액의 10% 이상을 보상한다. 3년 전 대신증권에서 베어링증권으로 옮긴 ㅇ부장은 연봉이 억대이다. 그는 높은 위험을 짊어져야 하는 영업 직원에게 타당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려 들겠느냐고 반문한다.

 증권사 영업부 직원들의 꿈은 사장이 아니다. 그들의 꿈은 월가의 6억5천만달러 연봉의 사나이 조지 소로스가 되는 것이다 뉴욕 · 런던 증권시장을 주무르는 연봉 수억달러짜리 월급쟁이들은 길어야 5년 후 증권시장과 작별한다. 일이 잘될 때 거액을 챙겨 산타바바라에 별장을 짓고 여생을 즐긴다. ㄹ증권 ㅅ차장은 “영업 직원들의 수명은 길어야 40대 초반까지이다. 우리에게는 정년 퇴직이라는 개념이 없다. 하루에도 등락이 거듭되고 호황보다 불황이 긴 증권시장에서 감각이 살아 있을 때 벌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국내 증권사들은 그같은 대비책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리랑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 발병 난다’고 원망을 드러냈지만 가시는 님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협약을 근거로 제소하는 증권사들도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점을 안다. 자존심이 걸려있고 집안 단속이라는 목적 때문에 분쟁을 표면화했을 뿐이다.

 증권 영업은 위험이 거의 영에 가까운 자동차나 보험 영업과는 다르다. 높은 수입과 높은 위험이 공존한다. 이들은 투자 위험을 분산하는 데 유용한 이론인 ‘마코위츠-샤프모델’을 신봉한다. ‘예’와 ‘아니오’ 중 하나의 답을 요구하는 단말기 앞에서 먹고 먹히는 게임을 벌여야 하는 이들에게 보상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국내 증권사들도 점점 이 물결을 타고 있다. 증시의 개방 폭이 넓어지고 있고, 유능한 영업 직원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느냐가 증권사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억대 월급쟁이에 대한 곱지 않은 국민 정서 탓에 일부 증권사들은 외무원 · 투자상담사 등이라 부르는 프리랜서를 통해 높은 약정고를 올리고, 이들에게 파격적 대우(약정 수수료의 26%)를 해주고 있다.

 ‘회원간 질서 유지를 위한 협약’은 더 이상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국내 증권사들의 경쟁력 약화를 자초하고 있다, 유능한 사람들이 자기의 몸값을 제대로 쳐주는 외국 증권사로 대거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증권사 영업 직원은 이렇게 항변한다. “스카우트를 막고 싶으면 잘해달라.” 협약은 무한 경쟁 시대에 내몰리고 있는 증권업계에 걸맞지 않는 낡은 틀이다.
張榮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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