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 위안소 日軍이 관리”
  • 도쿄ㆍ채명석 객원편집위원 ()
  • 승인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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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 ‘인간사냥꾼’ 요시다 세이지씨

 국제관습법상 ‘人道에 관한 죄’라는 것은 “전쟁 전ㆍ전쟁중을 막론하고 일반주민에 대해 저지른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ㆍ인종적ㆍ종교적 이유에 의한 박해행위”를 가리킨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은 이 법규정을 적용받아 모두 심판대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이 끝난 지 46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 ‘인도에 관한 죄’를 심판받게 됐다.

 일제 식민지 통치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죄와 전후 배상을 요구해 왔던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35명은 지난 6일 일본정부를 상대로 1인당 2천만엔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기했다.

 특히 한국인 종군위안부 3명이 전후 처음으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무고한 부녀자들을 마구잡이로 끌어가 ‘황군의 노리개’로 삼은 일본군의 비인도적 행위가 정식으로 일본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이와 함께 일본 국내에서는 당시 종군위안부 강제연행에 관여했던 관계자들의 ‘양심선언’이 잇따르고 있는데, 지바현 아비코시에 거주하는 요시다 세이지씨(78)도 그중 한사람이다.

 야마구치현 勞務報國會동원부장으로 재직할 때 직접 ‘인간 사냥꾼’이 되어 부녀자 1천명을 강제연행했다는 요시다씨는 《시사저널》을 통해 자신이 저질렀던 비인도적 행위를 눈물로써 참회한다고 밝혔다.

언제부터 강제연행에 관여했습니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건설노무자를 각지에서 끌어모으는 일이 제 임무였습니다. 그때 제가 직접 조선반도에서 강제로 끌고온 남자 징용자만 해도 5천명은 될 겁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치열해진 43년경부터 조선인 종군위안부를 끌어오라는 명령도 함께 내려오기 시작하더군요. 울고불고하는 부녀자들을 ‘노예 사냥’하듯 닥치는 대로 붙잡아 1천명 정도를 각 전선의 위안소에 보냈습니다.

어디서 그런 명령이 내려왔습니까?
제가 근무하던 노무보국회는 경찰 조직의 외곽단체였는데 야마구치현 경찰국을 통해 ‘황군위문 조선인여자정신대동원에 관한 건’이라는 군명령이 내려오곤 했습니다. 정신대원 연령은 20세 이상에서 30세 정도까지, 기혼자도 가능하나 임산부는 제외할 것, 성병검사를 실시할 것, 근무기간은 2년으로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린 소녀들까지 끌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마구잡이로 끌어가다보니 마땅한 부녀자들이 없어 어린 소녀고 임산부고 상관없이 몸만 튼튼하게 보이면 강제로 차에 태웠습니다. 저와 제 부하들이 강제 연행한 부녀자들 중에는 오히려 기혼자들이 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조선반도에서는 군대와 노무자로 강제징용 당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자손보존을 위해 조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나이 어린 소녀 중에도 기혼자가 상당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군명령은 어떻게 실행했습니까?
제가 받은 명령서에는 후쿠오카에 주둔하고 있는 서부군 제74부대에 대개 50명 정도를 20일 이내로 집합시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모노세키와 부산 사이를 관부연락선을 타고 왕복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항상 기일이 촉박했습니다. 따라서 명령서를 받은 즉시 조선반도의 도 경찰국에 전화를 걸어 “다시 50명 정도 부탁합니다”라고 미리 통지를 해놓습니다. 2~3일후 부하 10명 정도를 데리고 현지에 도착하면 이미 예정표가 작성되어 있지요. 어느 마을에서는 2~3명, 어느 마을에서는 4~5명하는 식으로 마을 인구를 참고해서 현지 경찰이 지도까지 작성해 자세한 연행계획을 미리 짜놓습니다. 1시간 정도 연행계획을 협의하고 나면 도 경찰국에서 해당 지서에 미리 연락해둡니다. 다음날 아침 7시까지 각지의 지서경찰 30~50명을 어느 지서 앞으로 집합시키라고 말이죠. 

실제로 어떻게 연행했습니까?
연행 당일은 경찰용 호송트럭 7~8대에 대개 50여명의 연행인원이 분승하여 예정된 부락을 급습합니다. 우선 20~30명으로 마을 전체를 포위하여 도망가는 사람을 막는 한편, 나머지는 각 집마다 문짝을 냅다 발로 차고 들어가서 마을 사람 전원을 한곳으로 모이게 합니다. 마을사람 1백~2백명 정도가 전부 모여도 정신대로 끌고갈 만한 부녀자는 네댓명에 불과했습니다. 도망가는 사람들은 지서원들이 사정없이 목검으로 내리쳤지요. 애들을 업고 나온 여자들은 반광란상태였습니다. 그런 걸 애기를 여자로부터 떼어내 노파에게 던져주고 머리채를 질질 끌어 무조건 호송차에 실었습니다. 서너살쯤 되어보이는 어린애가 울면서 호송차를 뒤쫒아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한 마디로 인간사냥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의 반항은 없었습니까?
그 당시가 어떤 때라고 반항하겠습니까. 칼날 같이 시퍼런 경찰 네댓명이 함께 동원돼 눈을 부라리고…. 따지고 보면 반항할 만한 젊은이들은 이미 군대나 노무자로 끌려가 없었고요. 저는 주로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등지를 뒤졌습니다. 제일 많이 연행한 곳은 제주도로 한 2백명 정도 끌어왔을 겁니다.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전선의 위안소에 보냈습니까?
이렇게 끌어모은 여자들은 화물열차에 실어 부산으로 데려가 관부연락선에 태웠습니다. 시모노세키를 거쳐 서부군사령부에 인도하는 것으로 제 임무는 끝났으나, 그들은 중국이나 남방의 위안소로 보내졌습니다. 일본인 정신대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고백한 시로다 시즈코라는 여성는 트루크라는 남양군도의 한 섬에서 패전을 맞았는데 그때 조선인 종군위안부가 40명이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중국 漢口병참사령부에서 위안소 계장(소위)으로 근무했던 야마다 세키치씨는 최근 참의원회관에서 열린 ‘종군위안부문제간담회’에서 자신이 관리한 위안소에 일본인 1백30명, 조선인 1백50명의 종군위안부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선에 끌려간 조선인정신대원이 10만~20만명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저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고 무고한 부녀자를 노예처럼 끌어간 당신이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까?
당시는 아무 망설임없이 군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일본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조선인을 사람취급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패전 이후 조선인들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당연히 보복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가명까지 써가며 이곳저곳을 전전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60세를 넘기면서부터 저의 부끄러운 행위를 스스로 청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0여년 전 《나는 조선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일본인과 조선위안부》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들의 인세로 지난 83년 천안에 있는 ‘망향의 동산’ 한구석에서 사죄비를 세웠는데 비문에 “이 몸이 숨진 다음에도 귀하들의 영혼 앞에서 무릎꿇고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새겼습니다.

그 책이 나오자 일본 국내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나는 조선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라는 책은 상당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출간 이후 저는 여러모로 시달리기도 했지요. 일본군의 치부를 적었다, 전우를 모욕했다는 등 협박전화가 자주 걸려와 한때는 아예 전화를 떼어버린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나치도 프랑스여자들을 위안부로 끌어간 적이 없는데 역사상 일본만이 점령지부녀자를 위안부로 끌어다 헌신짝처럼 버렸다는 사실을 일본인 자신들이 역사의 그늘 속에 숨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도 일본 각지 강연회를 돌며 저 자신과 일본의 비인도적 범죄행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증언과 고백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작년 6월 사회당 의원의 질문에 “종군위안부문제는 민간업자의 소행이었기 때문에 정부와는 무관한 일이다”고 잡아떼었는데….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관련자료는 패전 직후 내무성 차관 통첩으로 전부 소각 처분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정부가 그런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밝혀진 수많은 자료와 제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 보더라도 종군위안부문제는 군 경찰 행정기관이 삼위일체가 되어 저지른 행위입니다. 우선 당시 위안소를 총괄한 곳은 육군성 恩償課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곳의 지시에 따라 각군은 부대안에 위안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위안소 관리자와 군의들은 한결같이 “위안부들의 식량 등은 군이 배급했으며, 1주 한번꼴로 군의가 검진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 국립공문서관에 보관돼 있다가 최근 발견된 문서와 스탠퍼드대학 자료에 의해서도 위안소를 일본군이 직접 관리했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저 역시 경찰조직의 하수인으로서 군과 경찰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이지요. 이 때문에 패전 직후 미점령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한달 가량 경찰서에 불려가 형식적인 조사를 받았습니다만 문제는 패전 직후 열린 ‘도쿄 재판’에 있었다고 봅니다. 미국이 일본의 전범을 재판하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오키나와 등지에서 종군위안부와 관련된 문서를 압수해놓고도 비인도적 범죄행위로서 이를 거론치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인 위안부 3명이 처음으로 공식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전개되리라고 보십니까?
소송이 제기된 지난 6일, 일본정부의 대변인인 가토 관방장관이 “노동성을 중심으로 실태를 조사하고 있으나 정부기관이 관여했다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따라서 일본정부는 이 문제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작년 6월의 참의원 답변에서 한걸음도 진보가 없는 태도입니다. 일본정부는 입만 열면 종군위안부ㆍ군인ㆍ군속에 대한 보상문제는 65년에 체결된 일한 기본조약에 따라 유상ㆍ무상 5억달러로 일괄 처리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독일의 경우를 보더라도 일본의 전후보상은 꼭 시행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똑같은 패전국 독일은 70년 구서독 연방재판소 판결로 “폴란드와 소련 민간인 강제연행은 국제법을 위반한 인권모욕행위”라고 명백하게 인정했습니다. 독일정부는 지난 10월에도 폴란드인 강제연행 노동자를 개별적으로 보상해주기 위해 5억마르크(약 2천3백억원)에 달하는 기금을 적립키로 결정했습니다. 독일이 지금까지 이렇게 보상해준 액수는 배상금을 제외하고도 약 5백억달러에 이르지요. 하지만 일본은 개별적 보상은커녕 지금까지 아시아 각국에 지불한 배상금총액이 20억달러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시아 각국에 대한 전후보상을 기피해온 결과 일본은 경제대국이 되었다는 비난도 전혀 근거없는 소리가 아닙니다.

전승국 미국마저도 전쟁중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보상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진주만 피습 이후부터 44년 말까지 강제 수용된 일본계 미국인은 약 12만명이었지요. 미국의회에서 지난 88년 생존자 1인당 2만달러씩 보상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어 전후보상이 개별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일본 국내의 분위기를 보면 좀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주만 기습 50주년을 맞이하여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반성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요구가 더 큰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요. 물론 미국의 원폭투하가 인도적 견지에서 보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전쟁이 더 지속되었더라면 종군위안부나 강제징용자로 끌려가 희생되었을 조선인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자들에게도 개별적 전후보상을 실시한 미국에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를 요구하고 있는 일본이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이 제기한 공식사죄와 전후보상에 대해 과연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합니다. 그런점에서 이번 재판은 ‘일본의 양식’을 심판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심경입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벌써 제 나이가 일흔 여덟입니다. 앞으로 몇년을 더 살지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이 저질렀던 비인도적 행위가 역사와 그늘 속에 사장되지 않도록 전력을 다할 작정입니다. 끝으로 《시사저널》을 통해 제가 저질렀던 비열한 행동을 마음 속 깊이 사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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