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아프리카인의 원혼 서린 곳
  • 도쿄· 채명석 통신원 ()
  • 승인 199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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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시장 엘미나城 현지취재

이끼 낀 어두운 감방에선
흑인 처녀들의 절규 들리는 듯

아프리카 대륙은 아직도 기아와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아프리카는 인류발상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고, 구석기시대는 물론 노예무역이 시작된 15세기말까지만 해도 어느 대륙에 뒤지지 않는 문명을 가꾸어왔다.

가나의 엘미나성은 빈곤한 아프리카의 오늘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열쇠를 준다.  이 요새는 서부 아프리카 해안선에 산재해 있는 노예성의 하나이다.  엘미나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82년 포르투갈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 성의 주인은 서구열강의 패권의 향방에 따라 네덜란드인, 영국인으로 바뀌어갔다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끝없는 초원지대를 지나 서쪽으로 약 1백30km를 달려 바닷가로 접어들면 멀리 야자수 늘어진 해안선 끝에 우뚝 서 있는 엘미나성이 보인다.  길 양편에 유럽풍의 낡고 흰색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는 ‘리버풀거리’를 지나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아프리카 유린’의 현장 앞에 서게 된다.  길이 1백m, 폭50m, 높이 24m 크기의 이 요새는 수백년간의 뜨거운 햇빛과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닷 바람으로 퇴색했지만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벽에는 지금도 노예의 손톱자국 선명

성안의 로비 벽에는 대학노트만한 크기의 동판이 박혀 있는데 “빛나는 거룩한 모리스 공작이 브라질을 통치했던 때, 키노 대령의 지도 아래 1637년 8월 스무 아홉째날 세번째의 공격으로 이 막강한 요새가 접수되었다”고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다.  아랍인들을 물리치고 15세기초부터 아프리카 서해안을 지배하기 시작한 포르투갈은 이 요새를 쌓은 지 1백 50년만에 네덜란드에게 패해 쫓겨갔다.  그 뒤 2백년 뒤인 1872년 요새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게 된 네덜란드는 영국에게 이 성을 팔고 서부아프리카에서 철수했다.  가나가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이 요새는 가나경찰이 접수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약 2백평 남짓한 구내마당이 나왔다.  군복을 입은 경비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방문객을 맞았다.  허름한 옷차림의 동네 아이들이 수줍게 이방인을 바라보았다.  마당 한구석에는 포르투갈인이 사용했던 교회건물이 파손된 채 덩그러니 서 있다.  이 교회는 네덜란드인들이 들어온 뒤에는 노예를 사고파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남자노예의 경우는 60kg 이상이 되어야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고, 여자노예는 젖가슴과 체격이 예뻐야 비싼 값에 팔렸다.  앞마당에서 남서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좁은 통로를 따라 몇발짝 걸어가면 20여평 남짓한 작은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마당의 한쪽에 어둠침침한 빈방이 자리잡고 있다.  이끼 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이 방이 여자노예들을 가두었던 곳이다.  50여평의 방에는 많은 때는 2백여명의 흑인 소녀와 처녀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그들을 싣고갈 배가 들어올 때까지 갇혀 있었다고 한다.  4개월 이상 갇혀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화장실조차 없는 이곳에서 많은 노예들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자유를 절규하다 숨을 거두었다.  밤이면 총독이 수용동 위에 있는 발코니에 나타나 여자노예들을 마당에 모은 뒤 잠자리를 같이 할 노예들을 골라 좁은 사다리를 통해 침실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술에 취한 병사들은 대낮에도 노예를 상대로 성욕을 채우기도 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 나가면 왼쪽에 남자노예들을 가두었던 널찍한 수용소가 나타난다.  바다쪽으로 난 조그만 창문은 사람 손이 닿지않는 높은 곳에 있어 어두운 실내는 더욱 답답하게 느껴졌다.  방 한쪽끝에는 조그만 출구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 통로를 따라가면 한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의 출구가 성벽 밖으로 뚫려 있다.  노예들은 이곳에서 울부짖으며 닻을 내린 노예선으로 옮겨져 돌아올 수 없는 항해길에 올랐다.  항해 도중 반항하는 자는 총살당했고 병에 걸린 노예는 배 밖으로 던져져 상어밥이 되었다.  요새의 안쪽입구에는 반항하는 노예를 가두었던 독방이 있다.  이곳에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벽에는 절망에 빠진 노예들이 남긴 손톱자국이 선명하다.

 

서구의 경제발전은 흑인노예 피의 대가

외국인 방문객수는 하루 10여명 안팎.  남루한 방문록에는 “피비린내 나는 곳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는가 하면 “이국적이고 재미있다”는 어처구니없는 감상을 적어놓은 이들도 있었다.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았다.  15세기 이전에도 노예무역은 있었으나 포르투갈에 의해 시작된 노예사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무자비하고 규모가 컸다.  4세기 동안 미국, 카리브해 등 신천지에 팔려간 노예는 그 이전 13세기 동안 팔려간 노예의 곱절이 넘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황금해안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낸 뒤 이번에는 영국, 프랑스가 속속 아프리카로 진출, 카르브해 제도의 사탕수수 플란데이션 경영에 흑인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노예사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당시 노예무역은 유럽으로부터 총기나 옷감을 싣고 아프리카에 와 상아나 노예를 사들여 그것을 카리브 연안에서 설탕과 바꾸어 본국에 파는 삼각무역의 형태였다.  막대한 이익이 남는 장사였다.

서부 아프리카 연안 중심으로 시작된 흑인사냥은 점차 깊은 내륙으로까지 파고들었다.  유럽인의 노예사냥은 이디오피아,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 일부지역을 제외하고 세네갈에서 시작해 모잠비크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자행됐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1451년에서 1870년까지 미국 등지에 팔려간 노예의 수는 9백56만6천명으로 추산되었다.  중간 사망률을 15%로 볼 때, 적어도 1천1백만명의 노예가 잡혀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없고 이들이 아프리카에서 낳았을 자식까지 고려한다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실제 인력손실은 약 1역1천5백만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시 서구열강은 해외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경제발전을 수많은 노예의 희생의 대가였다.  특히 18세기 중엽 영국인들의 노예무역은 가장 잔악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714년부터 60년간 영국 전체 무역액 가운데 노예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15%에 달했다.  이것이 산업혁명의 자금축적에 한몫을 했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아프리카의 손실은 전통적 수공업의 붕괴, 생산력 저하뿐만이 아니었다.  유럽노예상의 힘에 굴복한 연안부의 아프리카 족장이 스스로 노예사냥에 가담했다.  이들은 노예무역을 통해 입수한 무기를 사용해, 타부족과 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 대륙은 하루아침에 약육강식의 무대로 바뀌어버렸다.  아프리카인의 전통적이고 독자적인 자치능력은 단번에 붕괴되었다.  노예무역이 실질적으로 소멸된 것은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1865년의 일로서 유럽인들에 의해 노예무역이 시작된 지 4백년만의 일이었다.

지난날의 노예무역이 남긴 상처는 지금도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엘미나성밖의 가난한 어민들은 지금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흙과 야자수로 만든 토담집에서 그들의 한많은 조상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다.


동전 몇닢을 구걸하러 모여든 어린이들의 눈동자 위로 5백년 전 산 채로 잡혀 황금해안을 떠나 대서양 너머로 사라졌던 아프리카인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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