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약한 언론 정치인에겐 무자비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11.0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보’내보낸 뒤 ‘해명’엔 인색… 정치불신 부추겨

“잠롱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열렬한 환대를 보며 부러움과 함께 정치인으로서 자괴감을 느꼈다.”

지난 10월초 《시사저널》의 초청으로 방한한 잠롱 방콕시장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지켜본 한 야당 정치인의 감회다.

자괴감을 느낀 연유인즉, 청백리 잠롱에게 보내는 뜨거운 관심과 성원이 존경할 만한 정치인을 갖지 못한 우리 정치 현실을 꼬집는 ‘역설적인 항의’로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사실 이 땅에서 정치인들이 제대로 존경을 받은 적도 드물지만, 요즈음처럼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적도 없다.  정치권에서는 두 야당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하루아침에 여당으로 변신한 3당 통합으로 ‘정치적 배신감’이 팽배한 데다, 남은 두 야당마저 국민들에게 목청 돋우어 약속한 야권통합을 이뤄내지 못한 데 대한 ‘실망감’이 겹쳐졌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기는커녕 불신의 대상으로 지목되는 원인의 상당 부분은 이렇듯 파행적인 정치행태 탓이며, 이 점 정치인 자신이 자초한 결과라는 점에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만드는 데는 언론의 미확인ㆍ왜곡보도도 일부 거들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노무현 의원 “언론에 한 맺혔다”

5공비리 청문회를 통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  그는 최근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라는 《시사저널》 창간 1주년 기념 여론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정치인 3위로, 또 지난 1년간 활약이 가장 돋보인 정치인 중 5위로 꼽혀 그 인기를 확인시킨 바 있다.

그러나 그 노의원이 최근 보안사 사찰을 규탄하는 ‘확대비상시국회의’ 주최의 ‘10ㆍ13 보라매집회’와 관련, 유권자들의 항의전화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항의전화의 내용은 “청문회 때문에 인기가 좀 좋아졌다고 지나치게 건방지게 군다”는 비판에서부터 “큰 정치인이 되기 위해선 너무 인기에 연연하지 말고 야권 연대에 앞장서라”는 점잖은 충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 비난투의 내용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노의원은 이런 항의소동이 “방송사의 왜곡보도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며, “해당 방송국에 보도경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석명 요청서를 내용증명으로 보냈으며, 언론의 횡포에 맞서 어떤 형태로든 싸우겠다”고 밝히고 있다.

항의소동을 낳은 문제의 보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10월13일 MBC 뉴스데스크의 보라매집회 보도 가운데 노의원 관련부분은 다음과 같다.

“대회 말미 노대통령에게 보내는 질의서를 낭독한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은 주최측에서 합의한 질의서 대신 독자적으로 작성한 질의서를 즉석 연설과 함께 낭독해 뒤이어 등단한 知詵 스님의 노의원에 대한 공개비판과 함께 참석인사들로부터 인기에 집착한다는 빈축을 삼으로써 야권연대의 어려움을 실감케 했습니다.”

노의원이 인기에 연연한 나머지 ‘확대비상시국회의’와 미리 약속된 원고 대신 ‘노정권 퇴진까지 요구하는 독자원고’를 낭독했고, 그 결과 모처럼 조성된 야권공조 분위기를 깨뜨렸다는 게 그 요지다.  이 보도대로라면 노의원은 미땅히 비판받아야 할 ‘위약의 정치인’인 셈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노의원은 “합의된 원고란 애초부터 없었다.  굳이 사전합의라 한다면 팜플렛에 실린 요지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나에게 할당됐던 10분 연설을 위한 요지로 제출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실무를 맡았던 재야의 국민연합측과 통추회의의 실무자들도 ‘사전에 합의한 질의서’가 따로 없었다는 노의원의 말에 동의하고 있다.  통추회의의 여익구씨는 “모든 발언자에게 각자 원고를 작성하도록 위임한 뒤 그 요지를 제출받아 팜플렛에 실었을 뿐, 사전합의된 원고는 없었다”며 “사전합의를 어겼다면 팜플렛 요지 이상의 이야기를 한 그날의 연사 대부분이 다 그에 해당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대표가 ‘나같은 사람’으로 둔갑

노의원의 ‘개인플레이’에 대한 지선 스님(전민련 공동의장)의 ‘공개비판’ 대목 역시 방송보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대회장에서 마지막 순서로 등단해 결의문을 낭독한 지선 스님의 발언 대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내가 오늘 죽 앉아서 지켜보니까 훌륭한 연사분들이 나와 여러가지로 훌륭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그중에는 말을 잘하는 분도 있고 인기가 있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잘하고 인기가 있고 부정부패에 대한 폭로를 잘해도 야권통합을 해내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란 대목이 바로 앞 순서인 노의원에 대한 ‘공개비판’ 보도의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지선스님은 “그날의 발언은 정치인 개개인을 떠나서 모든 야권 정치인들과 민중민주운동권 전체를 향해 야권통합을 실현하라고 맹성을 촉구한 것이다.  따라서 노의원을 향한 공개비판이라는 해석은 오보이거나, 범야권의 내부 분열을 조장하려는 의도적인 왜곡보도다”라고 잘라 말한다.

노의원의 보도 파문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그는 88년 12월 현대중공업 사태 때에도 농성장의 노동자들에게 “나는 대한민국 어디에 출마해도 당선된다” “나 같은 사람 20명만 있으면 국회를 흔들 수 있다” 는 발언을 한 것으로 대부분의 일간지에 보도된 바 있다.  당시 농성 현장에는 기자들이 없었던 탓에 연합통신 기사를 각 일간지들이 받은 것이었다.  이 기사를 근거로 ㄱ일보와 ㅈ일보에서는 ‘過猶不及(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의 정치인이다’,‘원숭이는 높이 오를수록 볼기짝을 보여준다’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첫 보도가 나간 이틀 후 <한겨레신문>과 <국민일보>는 1시간20분짜리 녹음테이프를 풀어 연설내용을 상세히 실었다.  두 신문은 “나는 대한민국 어디서나 당선될 수 있다”는 대목은 원래 “여러분, 바로 여기서도 노동자대표 한번 뽑아주이소.  저는 딴데 어디 가면 또 안되겠습니까”라는 발언내용의 오보이며,  “나같은 사람 20명만 있으면”하는 대목은 원래 “노동자대표 20명만 국회에 있었으면”이라는 내용이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오보’를 내보냈던 모든 신문이 해명기사를 후속게재한 것은 아니었다.

의도적이건, 실수이건 언론의 연쇄적인 왜곡보도를 낳은 데에는 노의원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즉 ‘사퇴서 제출과 번복소동’에서 나타났듯이, 정치권의 생리를 견뎌내지 못하는 감성의 과다노출과 자칫 오해를 낳기 쉬운 직설적인 화법, 그리고 조직생활을 체질화시키지 못하는 적응력의 미숙등이 정치인으로서 문제라는 것이다.

노의원 자신도 “그동안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서툴렀던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권력에 대해서는 약하면서도 개별 정치인, 특히 야당 정치인에 관해서는 미확인·과장보도를 서슴지 않는 언론의 횡포는 바로잡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정치인들에 관한 왜곡ㆍ편파보도의 가능성은 양성우 의원의 경찰관 폭행사건의 보도 (《시사저널》89년 11월19일자), 문희갑 후보 교통사고 진상 (《시사저널》90년 5월11일자)을 통해 지적된 바 있다.

편파ㆍ왜곡보도의 차원은 아니지만 최근 보안사의 정치인 사찰내용을 담은 디스켓이 각 일간지에 요약보도된 데 이어, 각종 월간지들이 경쟁적으로 전재하고 나선 것도 다소무리라는 지적이 있다.  보안사 사찰의 범위와 실상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사찰내용의 공개는 필요하지만, 보안사 자료가 명백한 전과사실이나 현직ㆍ관계인사들의 이름조차 종종 틀리게 기입됐던 만큼 특히 현역 정치인들 (주로 야당 정치인들) 관련사항이 사실과 틀리는 경우에 대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안사 사찰내용 일방적 전재는 무리

장달중 교수(서울대ㆍ정치학)는 “보안사의 사찰 디스켓 내용을 국민들에게 직접 보도하면서 당사자들에게 반론을 제기할 기회를 주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했다” 고 지적한다.  정치평론가 김광식씨 (한신대 강사ㆍ정치학)도 “반대취재가 병행되지 않는 무분별한 경쟁공개는 보안사의 사찰행위에는 분개하면서도, 미행과 도청까지 겸한 사찰의 내용은 믿는 심리 때문에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경계한다.

과거 민주당이었던 서청원 의원(현민자당) 의 경우, 보안사 사찰 디스켓에는 “동작구 본동 일대의 방음벽 설치공사에 개입, 특정업체에 혜택을 주었다”고 되어 있지만, 서의원이 언론사에 제출한 반박 근거자료를 보면 공사일시나 공사금액, 수의계약 과정에서 사찰내용은 사실과 다름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사찰자료를 요약했거나 전재한 언론사 가운데 서의원의 사실 해명 기사를 실음으로써 ‘반론권’을 준 언론은 <한겨레신문>을 비롯, 두어군데에 불과했다.

장교수는 정치인에 대한 불신감을 증폭시키는 언론의 미확인보도나 왜곡ㆍ과장 기사가 생기는 데에는 정치와 언론 양자에 모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즉 폐쇄적인 정책결정 과정과 전반적으로 많은 부패 정치인을 가진 우리 현실이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곤두세우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보의 가능성을 낳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권언유착의 당사자’로서 권력에 대해서는 약하지만 권력과 관계가 소원한 개별 정치인에 대해서는 가혹한 언론의 속성과 언론사간의 과열경쟁이 선정적이고 확인되지 않은 기사를 낳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정치와 언론이‘정도’를 걷지 않는 과정에서 국민들이 잃는 건‘정치에 대한 희망’일 뿐이다.  얻는 것이 있다면 한때 우리 사회에서 유행했던‘민나 도로보데쓰(모두가 도둑놈)’라는 엄청난 정치인 불신풍조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