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음’ 확인한 평양 음악회
  • 글·사진(음악평론가) ()
  • 승인 199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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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족통일음악회’ 참가 방북 열하루 …“분단의 고통보다 아픈 것은 없다”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10월18~23일)에 참가하기 위해 나는 10월14일부터 24일까지 북쪽을 다녀왔다.  이 기간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화창한 날이 계속됐다.  ‘우리들(음악회 참가자)의 방문을 축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정도였다.

나는 이번 ‘음악회’에 음악학자로는 유일하게 참가했다.  남측에서 참가한 사람은 모두 17명이었는데, 황병기(단장ㆍ가야금) 김덕순(여창가곡) 윤인숙(소프라노) 오복녀(판소리) 정철수(대금) 홍종진(대금) 김정수(장구) 김덕수사물놀이패 등 음악인과 취재기자 3명이 그들이었다. 

체류하면서, 돌아오는 길목에서, 연도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금강산 구룡폭포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 개막식이 열린 2ㆍ 8문화회관에서, 그리고 고요한 밤하늘 아래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제 우리 민족은 21세기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말이다.

왜 우리 민족은 이처럼 각각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나 하는 것과,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남이 아니라 한핏줄이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같은 말과 같은 음식과 같은 핏줄 같은 땅 같은 풍속 같은 성격은 물론, 같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같은 역사적 성격을 가지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 ‘같음’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그 해석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즉 우리는 ‘같음’을 지금도 바탕에 두고 있으면서도 남과 북은 각각의 다른 사회체제에서 그 ‘다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로 삼킨 질문 ‘체제는 무엇인가’

예컨대 10월17일 오후 교예극장(서커스 극장)에서 관람한 ‘널뛰기’는 북측이 현대적 교예로 발전시켜 런던 교예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종목이라고 한다.  단원들은 널의 양 끝에서 각각 5m 이상을 굴러 회전하며 내려오거나, 서로 자리를 바꾸는 등의 기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또 10월19일 오전에 방문한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태평소나 피리, 수공후 등 전통악기를 장새납이나 대피리 중피리 소피리 옥류금 등 현대적 악기로 개량하여 독주나 민족관현악을 연주하는 데서 ‘같음과 다름’이 나타났다.

같은 부문은 우리가 서로 민족전통문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부문은 북측은 모든 것을 현재 대중의 미감에 맞게 발전시키고 있다는 ‘역사원리’였다.  따라서 판소리는 과거의 대중에게는 맞았지만 현재의 대중에게는 안 맞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있었다.  전문음악교육기관인 평양음악무용대학이나 전문연구소 같은 곳에서 개인적으로 전수ㆍ보존ㆍ발표하고 있었다.  그곳을 방문했을 때, 그동안 북에서는 사라졌다고 믿었던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반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음악회장에서는 발표하지 않고 개인적 전수나 보존 그리고 녹음테이프나 기록을 남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음악토론에서도 그 같음과 다름이 나타났다.  분단 45년 동안 서로 다른 문화체계로 치달았기 때문에 음악이 민족통일에 이바지하여야 한다는 같은 시각이 있었다.  물론 그 음악의 바탕은 민족전통음악이었다.  그러나 21세기의 문화산업에 공동 대응하는 문제와 세계적 추세인 신과학 질서에 적극 뛰어들면서 어떻게 민족정통정신을 조화시켜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동시적 민족현실로 삼아야 한다”는 나의 의견에 대해 북측 학자들은 “먼저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밝혀 ‘다름’이 표출됐다.

일반대중의 옷도 그러했다.  여성은 거의 한복을 입은 데 비하여 남성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남성이 한복을 입지 않는 이유는 “근로를 비롯하여 일상생활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문득 우리 민족이 서로 다른 체제로 갈라선 지 45년이 흘렀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역사적 사실에 또 한번 몸서리쳤다.

우리가 묵었던 1백40m 높이의 45층짜리 평양고려호텔에서 나는 ‘반성’부터 하면서 10박11일간의 평양생활을 시작하였다.  내가 습관적으로 가져간 치약 치솔 면도기 등 세면도구 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필수품이 남측의 그것에 비해 질이 떨어짐에 가슴이 저려왔다.

끼니 때마다 정성들여 제공하는 입맛나고 질 좋은 전통음식을 먹으며 편안했고, 우리들 방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나 산책하다가 만난 어느 음식점 아가씨가 그들의 공통된 특징대로 순박하고 친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생활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가져간 물건이 은연중 거들먹거리는 자랑으로 보일까봐 가방 속에 집어놓고 북측이 제공한 용구만을 부지런히 썼다.  자주적으로 살려는 북의 태도가 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는 물음을 눈물로 삼켰다.  ‘체제는 무엇이고, 행복이란 무엇인가’‘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정책 입안자와 일반인의 생각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남북의 모든 사람들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와 다퉜던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서로가 분단체제로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은연중에 그 현실을 잊어버린 채, 그동안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서로를 잘 모르며 잘도 살아왔다는 현실 때문에도 살아온 것이 부끄러웠다.  그 어느것도 분단의 고통보다 아픈 것은 없음을 절감했다.  이제는 ‘같음’을 찾아가는 ‘만남의 연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지 않는가.

피바다’공동창작한 이건우 선생과의 만남

 체류기간에 내가 만난 음악인들은 조선음악가동맹위원장 김원균, 부위원장 성동춘, 평론분과위원장 김득청, 평양음악무영대학장 김히준, 국립교향악단장 김정수, 윤이상음악연구소장 정봉석, 조선인민군협주단 인민배우 김옥선, 평양예술학원 교원 한영애, 늘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한시형 선생 등이었다.  모두 잠깐 동안 만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깊은 토론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 몇 사람과의 토론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같음과 다름’이 무엇이고 앞으로의 과제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관심을 가지고 추적한 바 있는 李建雨(72)선생과 安基永 선생의 장녀인 安南植(55) 선생을 만나 개인적인 면담을 할 수 있었던 점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건우 선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해방공간에서의 그의 음악사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김순남, 안기영 등과 함께 민족현실 속에서 민족음악을 실천적으로 이끌었던, 민족음악 역사에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해방 다시 그의 작품인 ‘여명의 노래’와 ‘금잔디’는 너무나 잘 알려진 노래였다.  그는 김순남 선생과 함께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위원과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월북했다.

나는 방북 동안 이선생을 20번 정도 만날 수 있었다.  판문점에서 북측 판문각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내가 리건우요”하며 끌어안고 환영하는 말에 당황스러울 때부터 또다시 남측 판문점으로 오면서 마지막 포옹으로 환송해준 그때까지 그만큼 자주 뵐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개인적으로 깊게 면담할 기회는 두번뿐이었다.  10월14일 옥류관의 환영만찬과 20일 국제문화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음악학자들의 토론 때였다.

내가 미리 준비한 ‘이건우 연보’를 보여주자 선생은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호산리에서 1919년에 태어났다.  건강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1950년 6월 28일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이건우 선생은 음악인으로서 북측 군대를 위문하기 위해 전방으로 떠났다가 후퇴하는 군대를 따라 춘천에서 월북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악보와 사진, 아들 둘과 딸 하나, 부모와 누이동생을 그대로 남측에 남겨두고 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누이동생 이순희는 나중에 월북했다).  그는 월북할 때 알게 된 박복실(나중에 공훈배우가 되었다)과 결혼하였으며 현 부인과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고 한다.  내가 남측에 남은 딸이 건재함을 알리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자,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선생은 일본 동경에 있는 동경고등음악원에서 일본고등음악학교로 전학, 작곡과를 졸업한 뒤 김순남 선생보다 1년 늦은 1943년 귀국했다.  귀국 전 선생은 도쿄에서 1940년과 1942년에 전일본음악콩쿠르 작곡부와 제1회 교향악 현상모집에서 입상했고 모교에서 1년 동안 작곡이론 강사생활도 했다고 한다.

이건우 선생은 귀국 직후, 징집을 피하기 위해 강원도 양양으로 1년간 피신, 1944년부터 개성고등학교와 강릉고등여학교에서 음악 교원 생활을 하던중 강릉에서 해방을 맞이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그러나 일본군이 계속 잔류했기 때문에 양양쪽까지 진출한 소련군과 손잡고 일본군을 강릉에서 몰아냈다고 한다.  바로 그 감격으로 “봄이 왔네 봄이 왔네/무궁화 강산에 봄이 왔네”라는 가사의 ‘여명의 노래’를 작곡했다는 것도 이번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1945년 9월에야 상경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45년에 조직이 결성된 조선음악건설본부 작곡부위원이었다는 자료는 수정해야 한다.

남과 북에서 민족음악 추구한 안기영 선생

미군정과 관계당국이 1947년부터 조선음악가동맹을 남로당 외곽단체로 규정, 규제할 때 이건우 선생은 이 단체 서울시지부 서기장을 지내다 1949년 9월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됐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월북 후 1950년 11월부터 내무성예술단장, 1956년에는 작곡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다 1960년부터는 개인작곡가 생활을 하면서 70년대부터 피바다식 혁명가극 공동창작에 참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작곡한 ‘소년빨치산의 노래’ ‘안해도 전사처럼’ ‘우리의 자랑’ ‘동백꽃’등의 노래는 북측 대중으로부터 널리 사랑받아왔다고 한다.  이밖에 1950~1989년 사이에 성악곡과 가극, 기악곡을 비롯하여 약2백여 편을 작곡했다고 한다.  특히 ‘동백꽃’은 1948년 월북한 시인 박세영의 시에 곡을 붙인 순수 가곡작품이다.  “산이 첩첩 높아서 넘지 못하나/넓은 바다 막히여 내사 못가나/가시덩굴 엉킨 고향이기에/붉게 타는 동백꽃 내 마음인줄 아시리/뒷동산에 동백꽃 피는 내 어머니 사시는 그곳/고향 그리운 마음 향기되어 풍기라”라는 가사가 드러내듯 부모형제와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작곡했다고 한다.

선생은 남에서부터 북에 이르기까지의 창작생활을 회고하는 일기를 탈고하고 있다면서, 아들 이종욱(49세로 기억하고 있다)과 이종은(43) 그리고 딸 이종해(46), 음악가인 전봉초 박용구 김성태 나운영 이호섭 선생들에게 안부를 부탁하기도 했다.

안기영 선생은 1900년 1월 9일 충청남도 청양군 정사면 적곡리에서 출생하여 8순잔치를 마친 1980년 8월2일 노환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남과 북에서 민족음악을 추구했던 또 한명의 음악가였다.  부인인 김현순씨는 현재 80세로 생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남3녀의 자제 모두 월북하여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음도 큰딸 안남식씨에 의해 밝혀졌다.

우리들은 선생의 작품 ‘그리운 강남’을 몰라도 “정이월은 다가고 삼월이라네/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며는/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강남을 넘어가네”(김석송 작시)라는 가사를 누구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선생은 공주의 영명학교와 배재중학 시절에 풍금과 코오넷을 배웠고,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1926년에는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 시에 있는 앨리슨 화이트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이 기간 동안 김인식 김형준 이상준 김영환 등 근대양악 여명기의 제1세대들로부터 음악공부를 한 성악전문 음악가였다.  그는1928년부터 이화여전 음악과에서 성악과 음악사 및 음악이론 교수였으며 이화여전합창단장, 30년대 이후 향토가극으로 알려진 ‘콩쥐팥쥐’ ‘견우직녀’ ‘에밀레종’등의 작곡가, 해방 후에는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지내다가 1950년 6월 18일에 월북했다고 큰딸은 말했다.  월북 후 안기영 선생은 오늘날의 평양음악무용대학 교수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기쁨과 슬픔 교차한 금강산 등정

큰딸인 안남식씨는 만수대예술단 소속 피아니스트이며 공훈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인 안동식(53)은 준박사로 김일성종합대학 과학자로, 셋째 안유식(50)은 바이올린 연주가로, 넷째인 안만식(48)을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그 대학의 연구사로, 막내인 안은식(43)은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 후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가족이 모두 월북한 경위에 대해 안남식씨는 “아버지가 월북하자 어머니가 가족을 모두 데리고 후에 월북했다”고 증언했다.  안남식씨는 아버지 바로 아래 동생인 안신영씨를 만나보고 싶어하며, 통일이 되어 꼭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건우 선생이나 안남식씨를 면담하면서 “음악가로서 사회체제와 개인적 음악생활 사이에 갈등은 없는가”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모든 면담이 공식석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음악회 참가자 일행은 10월 21일 금강산에 오를 수 있었음을 기뻐하면서도, 한반도의 명산을 누구나 오를 수 없는 분단현실 때문에 착잡했다.  지금도 인적이 닿지 않는 듯한 태고적 모습 그대로 눈앞에 나타난 금강산을 오르는 동안 원시적 풋풋한 산냄새와 타는 듯한 단풍, 그리고 분단45년만에 역사적으로 등정한다는 의미들이 교차하면서 우리들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백두산 정기와 한라산 정기가 합쳐져서 꽃을 피운 산 금강산을 두고, 우리는 또다시 분단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주 만나는 연습을 하며, 더 많은 ‘민족의 같음’을 앞세워 21세기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민족이익을 함께할 것인가를 과제로 안은 채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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