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창에 빠진 미국 ‘지저분한 타협’
  • 워싱턴 이석열 특파원 ()
  • 승인 199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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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灣 사태 협상국면 … 부시, 자존심 손상 면키 어려워

이라크와의 직접대화를 제의한 조지부시 미국 대통령의 화해 몸짓에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모든 인질을 풀어주겠다고 즉각 화답했다. 따라서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던 페르시아만 사태는 일단 한 고비를 넘기고 협상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부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는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에서 완전히 철군하겠다는 다짐을 받자는 것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나 속마음은 다르다는 것이 외교전문가들의 풀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면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할 뜻이 없음을 밝힘으로써 결정적인 화해 신호를 먼저 보냈다. 그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페르시아만 사태와 팔레스타인 문제를 결부시켜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이라크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은 중동평화회의를 열자는 결의안 표결에서 반대하지 않고 기권했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보아 부시 대통령의 속뜻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도 “협상이란 터무니없는 소리다. 사담과 만나면 최후통첩을 확인하는 것이 내 임무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돌아서서는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철군한다면 전범으로 재판할 생각도 없고, 그가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에도 간섭할 뜻이 없다고 밝혔다. 이라크에 대한 경고를 철회하는 듯한 발언이다.

 직접대화와 인질석방을 두고 ‘장군 멍군’하는 미?이라크 대화가 ‘지저분한 타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전쟁을 벌이면 미국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끝날 수 있지만 타협한다면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부시 행정부가 인정하기 어려운 사안이 하나둘씩 터져나오면서 미국의 체면이 깎이게 되는 경우이다. 그리고 타협의 대가로 인한 희생도 문제라는 것이다.

 유엔이 결의한 중동평화회의를 이스라엘 정부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이 회의를 부추기면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고, 반대로 이스라엘을 감쌀 경우 모처럼 형성된 반이라크 아랍연합체를 버려야 하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가능성을 읽은 샤미르 이스라엘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하여 “이스라엘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대세는 중동평화회의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난번 유럽안전보장이사회가 이라크에 대해 무력행사를 할 수 있다고 결의했을 당시 소련과 프랑스도 미국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바 있다. 따라서 상황은 이스라엘에 불리한 쪽으로 풀려갈 공산이 크다.

 이라크 공보부장관 라티프 자심은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19번째 성이다. 한치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사담 후세인이 인질을 석방한 이유를 캐보면 대충 알 수 있다. 후세인은 인질이 있든 없든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전면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인질을 계속 잡아두면 세계여론만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인질을 풀어준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이길 수 없는 전쟁보다는 협상을 통해 살아남아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군사행동 포기한 것은 아니다”

 후세인은 미국의 CNN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미국 의회나 여론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 부시의 입장을 훤히 알고 있다. 후세인은 의회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역대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들이 ‘군사행동 개시’를 만류하면서 봉쇄정책이 효력이 있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주장한 내용을 모두 알고 있다.

 윌리엄 웹스터 CIA국장은 봉쇄가 이미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라크의 생산성이 40%선으로 떨어졌다”면서 “봉쇄 자체만으로도 이라크 정권에 상당한 충격을 준다”고 말했다.

 전쟁에 돌입할 만큼 국론이 무르익지 못한 것만은 틀림없다. 후세인이 선수를 친다면, 새해 정월 보름으로 기한이 정해진 쿠웨이트로부터의 철수 날짜보다 앞당겨 극적으로 자진해서 물러나는 일을 예상할 수 있다. 이때 그는 이라크와 쿠웨이트 국경의 쿠웨이트 소유 루마일라 유전과 쿠웨이트 영토인 작은 섬 2개를 대가로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미국은 군사력 행사의 명분을 송두리째 잃게 된다. 싫으나 좋으나 협상 테이블에 나가 ‘지저분한 타협’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옹색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지금까지는 당근과 채찍으로 이라크를 요리해온 미국이지만 일단 협상에 나서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내줄 것은 내주어야 하는 ‘너절한 흥정’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

 쿠웨이트에서 철군하는 대신 쿠웨이트 영토의 일부를 할애받는다는 내용을 기초로 한 이라크와 쿠웨이트 망명정부간 비밀협상이 시작됐다는 미확인 보도도 나돈다.

 ‘침략에 대한 대가’를 결코 인정해줄 수 없다면서 무력응징을 주장한 부시 대통령은 갑자기 유화정책으로 돌아서기도 어렵다. 막판까지 군사력을 강화하고 소련을 향해서도 상징적으로나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보면 미국은 군사행동을 아직 완전히 포기한 것 같지는 않다. 부시는 무력침공이라는 배수의진을 치고서 ‘지저분한 타협’의 수렁에 발목이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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