監視받는 관료적 지식인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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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민의 감시를 받게 된 언론이 스스로 마멸하지 않으려면 실사구시의 보도를 터득해야 할 것이다.”


언론과 선거의 상관성을 매우 강조하면 공정보도와 공명선거는 동의어가 된다. 공정보도=공명선거라는 등식도 성립한다. 공명선거를 해치고 타락선거를 주관한 건 관료집단이나 정치집단 아니냐고 아직도 반문하는 부류가 있다. 관료적 지식인, 곧 관료적 인텔렉추얼 들이다.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언어라는 상징을 조작하므로 인텔렉추얼이라 특정해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사고력을 동원하는 인텔렉추얼치고는 지나치게 관료적으로 돼버렸다.

 언론기구는 60년대의 기업화, 70년대의 유신화, 80년대의 제도화 과정을 거치면서 기능적 장애나 병적 의식을 드러내는 관료체계를 키웠다. 관료체계는 비능률과 책임전가, 비밀주의 따위를 심화하고 특권을 저만의 것으로 만든다. 이런 체계에 익숙한 관료적 지식인은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90년대를 살면서도 여태까지 회색지대, 석양지대에 서 있다.

 누군가 휴가의 날이라고 익살로 꼬집은 10월28일 휴거의 날이었다. 우리 젊은 기자 하나가 그날 자정에 서울 성산동 다미선교회를 취재하면서 목격한 장면이 있다. 전경대원은 교회 앞을 스크럼으로 통제했다. 외신기자들은 누구나 목에 인식표를 걸어 수월하게 통과하지만 한국 기자들은 한결같이 신분증 제시를 거부하여 시비가 벌어졌다. 한국 기자들은 무단출입의 특권을 누려야 직성이 풀리고, 통제력 하나에 존재가치를 건 전경대는 상대가 누군지 다 알면서도 막무가내였다. 멱살잡이와 오가는 고함에 우리 젊은 기자는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그가 본 것이 바로 성양지대에 머물러 있는 관료적 인텔렉추얼의 모습이다.

 

언론인 출신 장관까지 관료적 언론체계 비난

 관료적 언론체계는 이제 행정부 관료의 신랄한 반격을 받는 처지에 이르렀다. 현직장관이, 그것도 언론기구에 몸담고 있다가 관료기구로 자리를 옮긴 장관이 “진실보도를 하기 위해서는 언론인도 공직자 의식과 자세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언론인 모임(10월 22일 최병우 기념 심포지엄)에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그는 비진실 보도는 첫째 무지에 의한 것, 둘째 확인절차를 성실하게 밟지 않아서 생기는 태만에 의한 것, 셋째 약간만 교정하면 진실 보도가 되는데 굳이 언론인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못고치는 오만에 의한 것 세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비진실 보도가 투쟁의 수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용서받을지 모르겠으나, 언론의 자유가 주어진 상태에서 되풀이되는 비진실 보도는 언론의 자기 마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경고였다.

 언론인 출신 장관이 언론기구가 구조적이고 의도적인 비진실보도를 체질화하고 있다고 비난해도 관료적 인텔렉추얼 체질이 밴 사람은 할말이 없게 되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폐습이나 구체계에 대한 자아각성의 시기에 효험을 보인다. 중국 후한서(後漢書)에서 시작한 이고전적 술어는 조선조 후기 실학자 가운데 특히 秋史 金正喜가중하게 사용하여 조선 실학의 별칭으로 실사구시학이 거론되기도 했다.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 실제 상황에서 출발하여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고 정확히 문제를 처리하는 태도가 실사구시이다.

 중국의 등소평도 개혁노선 투쟁을 개시할 때 “모택동의 말이 진리를 검토하는 유일한 표준은 아니다. 실천이야말로 진리를 시험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고 실사구시의 논거를 동원했었다.

 

스웨덴 신문 ‘42살 먹은 사람’ 기사가 보인 실사구시 태도

 가장 실사구시적인 보도의 실례는 스웨덴 신문의 ‘42살 먹은 사람’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스웨덴 신문들은 올로프 팔메 스웨덴 총리를 암살(86년 2월 28일)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크리스터 페테르손이란 사나이를 ‘42살 먹은 사람’으로만 보도했다. 이는 스웨덴 언론이 범죄용의자 신원을 법원의 유죄판결 선고 전까지는 공개하지 못한다고 자율규제 조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웨덴 신문들은 88년 12월 페테르손이 체포되었을 때는 ‘41살 먹은 사람’으로 보도했고 89년 4월 그가 미결수 감방에서 생일을 맞아 한살 더 먹자 매우 곤혹스런 입장에 빠져 궁여지책으로 ‘42살의 전 41살 먹은 사람’이라는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을 여러주일 동안 썼다. 페테르손은 스톡홀름 지방법원 1심판결(89년 7월27일)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스베아 고등법원 2심판결(89년 11월2일)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되었으니 스웨덴 신문의 실사구시 보도는 효력을 본 것이다.

 공정보도=공명선거의 등식이 논의되는 것은 공정보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탓이다.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라는 이름의 시민운동기구가 출현한 것 역시 공정보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탓이다.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는 모니터위원회에 교육 · 신문 · 텔레비전 · 라디오 · 지역언론 5개분과를 두어 보고서를 작성하고 편파 · 왜곡 보도에 대한 항의운동을 한다고 했다(11월11일 ‘대선보도 모니터 중간보고서’).

 언론기구도 시민의 감시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 스스로 마멸하지 않으려면 실사구시의 보도를 터득해야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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