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 축구’로는 월드컵 16강 어렵다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7.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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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인 방어·측면 돌파 공격은 유럽 팀에 안 통해…게임 메이커 보강 시급

90분간의 악몽 같은 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지난 1일 월드컵 최종 예선 한국과 일본의 2차전. 5승1무로 조1위가 되어 월드컵 출전이 확정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한국 대표팀은 그동안의 선전에 비추어 볼 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최악의 경기를 선보였다. 이 경기는 월드컵 최종 예선전에서 순항하면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던 한국 축구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명확히 드러냈다. 좋게 보자면, 월드컵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게 해 줄 단서를 제공했다는 얘기도 된다.

 우선 일본과 2차전 전까지 불패 신화를 이룬 바탕부터 냉철히 따져 보자. 운이 좋았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문화방송(MBC) 신문선 축구 해설위원은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하는 데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하늘이 내려준 조편성과 경기 일정이었다”라고 주장한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조직력에 문제”
 B조에 속한 한국은 한국에 전통적으로 강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 등이 A조에 집중 편성됨으로써, 이들을 피할 수 있었다. 경기 일정도 한국 편이었다. 월드컵 본선행의 최대 고비였던 일본과의 1차전. 일본 대표팀은 섭씨 40도가 넘는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에 가서 진을 뺀지 5일 만에 경기를 치른 반면, 한국 팀은 1주일을 더 쉬었다.

 경기에서도 운이 따랐다.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우즈베키스탄과 1차전 당시 비화 한가지. 우즈베키스탄 팀은 ‘도깨비팀’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괴력을 발휘했다. 한국은 1 대 0으로 이기다가 동점골을 허용한 상황에서 경기 종료 3분여를 남기게 되었다.

 이때 차범근 감독은 공격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이상윤을 빼고 노상래를 투입할 계획이었다. 노상래 선수는 육상 트랙에서 몸을 풀면서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경기에 몰입하고 있던 차감독이 그만 선수 교체를 잊어버렸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은 이럴 때 가장 어울릴 것이다. 교체될 뻔했던 이상윤 선수가 경기 종료 직전 극적으로 결승골을 터뜨렸던 것이다.

 일찌감치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했는데도 한국 대표팀이 미덥지 못했던 것은 그동안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이 상대편에 골을 많이 넣고 우리는 덜 허용하는 차범근 감독 축구를 두고 ‘실리축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축구 전문가들은 이것이 한국의 전통 축구 스타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한 축구 지도자는 일본과 2천전을 치르기 전부터 불기한 예측을 드러내놓고 했다. “10개월간 호흡을 맞춘 팀이라고 보기에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조직력에 문제가 있다. 패스가 매끄럽게 이뤄지는 지역이 우리 팀 골키퍼 앞 수비 지역 외에는 없을 정도다.”

세계축구는 지역 방어가 조류
 결국 프랑스행 티켓을 따낸 이번 대표팀도 한국축구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수비에서의 대인 방어와 측면 돌파에 의한 공격밖에 보여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런 한국의 전통적인 축구 스타일은 선수 각자에게 부지런히 뛸 것을 강요한다는 점 때문에 실리 축구보다는 ‘오기, 혹은 근성 축구’로 불려야 마땅하다.

 몰론 이런 스타일은 아시아에서는 곧잘 먹혀든다. 이번 최종 예선전에서도 한국 팀은 철저한 대인 방어 덕을 보았다. 우리가 ‘도쿄 대첩’이라고 부른 일본과의 1차전. 일본 공격의 핵인 미우리와 로페스는 수비수인 최영일과 이민성에게 꽁꽁 묶여, 짜증만 내다 경기를 망쳐 버렸다.

 수비 면에서 세계 축구의 주류는 지역 방어이다. 세계적인 조류와 동떨어진 이런 수비 스타일은 한국 축구의 토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해까지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박종환 감독은 “우리 선수들에게는 어려서 축구를 할 때부터 내가 공을 안칠망정 너는 못 차게 묶겠다는 의식이 몸에 배어 있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일본은 교과서적인 축구의 대명사다. 프로축구인 J리그가 자리잡은 후에는 전통적인 4-4-2전법에 지역 방어가 대세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골이 많이 터지는 화려한 공격 축구 스타일을 터득했다. 일본 프로 축구가 쉽게 자리잡은 반면 한국 프로 축구가 관객에게 외면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인 방어 위주의 수비에 있는지도 모른다.

대인 방어, 이젠 일보에게도 안 통한다.
 그렇다면 일본과의 2차전에서 한국의 수비가 먹혀들지 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경고 누적으로 스토퍼인 홍명보가 결정한 것과 선수들의 정신력 해이를 들 수도 있겠지만, 한번 당했던 수비 스타일에 대해서 대응 전략을 차분히 준비했을 만큼 일본 축구가 급성장한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주장으로 출전해 아르헨티나와 경기에서 첫 골을 터뜨렸던 박창선 경희대 감독은 “대인 방어란 체력이나 개인기가 한 수 위인 상대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는 전술이다”라고 주장한다. 당시 국가대표팀은 ‘축구 신동’ 마라도나가 소속된 아르헨티나와 경기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쉽게 3골을 내주고 말았다. 실제로 이 경기를 연상시켰던 일본과의 2차전에서 우리나라 수비 선수들은 스스로 분을 못삭이고 쓸데없는 반칙만 양산하고 말았다.

 측면 돌파에 이은 센터링과 헤딩슛. 여기서 흘러나오는 공을 때리는 전통적인 공격도 월드컵 무대에서 효과를 발휘할지 의문이다. 물론 이번 최종 예선전에는 통했다. 한국 대표팀이 지금까지 일곱 경기를 치르면서 넣은 16골 가운데 무려 8골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공격 방식은 세계 무대, 특히 유럽 팀과의 경기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명감독 출신으로 95년 프로 축구 부천유공팀에 영입되어, 자타가 공인한 공격 축구전문가로 자리잡은 니폼니시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자. “유럽 팀과 경기할 경우 한국 선수들이 제공권을 장악하기란 무척어렵다. 그렇게 되면 측면 센터링에만 의존하는 한국 축구는 공격을 풀어 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세 번 연속 월드컵에 출전했으면서도 16강은 고사하고 1승도 못올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럽 축구만 만나면 공격의 실마리를 제대로 못찾고 쉽게 경기를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남미의 경우에는 대인 방어와 측면 센터링이 비교적 통하는 편이다. 실제로 축구의 양대 세력인 유럽·남미 팀과 모두 싸워본 선수들의 경험담이 그렇다. 박창선 감독은 “유럽 선수들과 경기를 하고 났을 때가 훨씬 피로도가 더하다”라고 말한다.

유럽 팀들과의 경기 경험 쌓아야
 이런 이유로 한국 축구 선수들 사이에 이미 유럽 팀에 대한 정신적인 콤플렉스가 생겼다는 지적도 있다. 니폼니시 감독은 한국 선수들이 유럽 정상권의 팀들과 싸워볼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 유럽 팀에 대한 자신감 결여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아프리카 국가대표팀들의 경우는 상당수 선수가 유럽의 클럽팀에 소속되어 있어 비교적 자신 있게 경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축구 전문가들은 12월4일 월드컵 본선 조편성이 이루어지고 나면, 남은 기간에 유럽 팀들과의 경기 경험을 쌓게 해주는 데 주력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 한 가지 한국 대표팀이 보강해야 할 점은, 대인 방어와 측면 센터링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경기 운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게임 메이커의 존재다. 특히 수비에서 바로 공격으로 이어지도록 긴패스를 할 수 있는 선수들을 보강해야 한다. 박종환씨는 “측면 센터링에 의한 헤딩슛이 통하지 않을 때 또 다른 공격방식을 시도할 수 있는 선수들을 보강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패스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한국 국가대표팀이 최종 예선전을 통해 숱하게 상대편의 오프사이드 수비 전략에 걸려 들었다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최용수 선수의 골 감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격 라인도 재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최용수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도 통하는 골잡이냐라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일본과의 2차전은 그의 컨디션이 안좋을 때는 팀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경기는 운이 다한 오기 축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한판이었다 한국의 축구팬은 월드컵 무대에서 이런 경기가 재연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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