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몰고온 ‘세속도시’의 신풍속
  • 김재태 기자 ()
  • 승인 1997.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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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일상에 큰 영향…일부에선 열풍 뒤 허탈감 걱정

단발머리 소녀들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있었다. 오후 들어 급격히 떨어진 기온과 쌀쌀한 늦가을 바람도 그들의 발길을 옮겨 놓지는 못했다. 소녀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맞은편 건물 2층 식당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쩌다 아는 얼굴이 창유리에 비치면 ‘오빠’를 외치며 좋아라 손뼉을 쳤다.

 지난 10월 25일 저녁 한국축구 대표팀이 묵고 있던 울산 다이아몬드 호텔 앞에는 한 무리의 여중고생이 몰려들어 웅성거렸다. 그 중에는 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는 울산 서부운동장에 갔다가 사인을 받지 못한 학생들도 있었다. 몇몇은 계속 저지당하면서도 줄기차게 호텔로 들어가려고 만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오늘 안되면 내일 또 오죠”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울산만의 독특한 풍경이 아니다. 대표팀이 움직이는 곳이면 어디나 여중고생들이 따랐다. 아직 조직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그동안 농구장에서나 볼수 있었던 ‘오빠부대’가 마침내 축구라는 영역에 새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붉은 악마 티’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
 월드컵이 바꿔놓은 풍속은 ‘오빠 부대’ 등장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국팀의 예선 경기 중계 방송이 연이어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리면서 축구 해설자가 스타로 각광받는 색다른 현상마저 나타났다.

 한국팀 응원단인 ‘레드 데블스’도 월드컵 경기가 배출한 또 다른 스타다. 국내 최초로 조직적인 응원을 펼치며 1차 한·일전이 열린 도쿄에서 진가를 드러낸 레드 데블스는 월드컵 열기를 끌어올리며 스스로 범국민적인 스타 대열에 올라섰다. PC통신에는 연일 이들에 관한 글이 끊이지 않고, ‘붉은 악마’라는 응원단 명칭에 대한 타당성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이들이 유니폼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붉은 악마 티’는 한때 없어서 못 팔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레드 데블스는 다른 곳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서울 광화문 거리를 새로운 축구 관전 명소로 떠오르게 하는 데 톡톡히 한몫 했다. 지난 9월28일 도쿄 한·일전 이후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대형 전광판 2대 앞에는 어김없이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곳에서는 매번 경기장의 응원단 못지 않게 조직적이고 질서 정연한 응원이 펼쳐진다. 레드 데블스에서 고교 아마추어 응원단까지 구성원도 다양하다. 지난 11월1일 한·일전 때는 안양고 학생 50여 명이 자발적으로 나서 응원을 주도했다. 이날 모인 인원은 약 3천명. 개중에는 외국인도 30여 명 눈에 띄었다. 한국의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는 캐나다인 로버트 탈봇 씨는 “이곳에 나오면 경기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라며 전광판에서 눈을 뗄 줄 몰랐다.

 월드컵 바람은 국민의 일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일전 같은 빅 게임 티켓이 최고의 선물로 각광받는가 하면, 주말 여행객의 발길이 뜸해졌다. 직장에서는 경기 스코어 맞추기 행사가 유행처럼 번지고, 한 이벤트 회사가 주최한 ‘월드컵 미팅’에도 선남선녀들이 몰렸다.

 광고·마케팅도 온통 월드컵으로 들떴다. 스포츠 상품은 물론 가전·생활용품 광고들도 앞다투어 ‘월드컵 띠’를 머리에 둘렀다. 2차 한·일전 티켓을 퀴즈 상품으로 내거는가 하면, 한·일전에서 한국팀을 응원하는 사람에게만 세일을 한다는 ‘깜찍한 광고’도 등장했다.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업체들은 월드컵이라는 호재를 놓치지 않고 판매 전략에 활용했고, 술집들은 한국팀이 이기는 날 공짜 술을 내놓거나 ‘대형 멀티비전 있음’같은 문구를 내걸어 집으로 향하는 손님의 발길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같은 ‘월드컵 특수’가 전국을 휩쓸면서 축구에 대한 국민의 관심도 한층 높아졌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게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거품론’. 월드컵 예선전이 모두 끝난 뒤에도 월드컵 열기가 이어지겠느냐는 것이다. 열풍이 지나간 뒤에 집단적 허탈감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축구인들은 지금의 열기가 프로 축구에까지 옮겨갈지 의심한다. 문제는 내년부터다. 프랑스 대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월드컵 열기가 싸늘하게 식어 2002년 직전에야 잠을 깰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광화문 관중 속 한 여고생이 “한국 팀이 잘하니까 축구가 좋다. 못하면 응원하러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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