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영화, 컬트가 도대체 뭐지
  • 노순동 기자 (soon@sisapress.com)
  • 승인 1998.07.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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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아의 ‘비틀어 보기’ 산물…산업사회에 대한 소비자 반란

‘반갑지만, 너무 늦게 왔다.’ 아쉬움 속에 23년 만에 상륙한 컬트 영화의 고전 <록ㅋ 호러 픽쳐 쇼>(75년)가 의외의 호응을 얻고 있다. 토요일 심야 상영도 명물로 떠올랐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구성한 쇼단 ‘더블 피쳐스’의 활약 덕이다. 번적이는 거들, 가죽 바지와 헷멧, 기과한 외계인 복장. 무분별한 외래 문화 추종이라는 비난도 없지 않지만, 이들의 공연은 극장을 흥겨운 축제 마당으로 이끄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이전에 컬트 영화의 진수라고 소개되었던 <이레이저헤드> <로스트 하이웨이> 등이 쓸쓸히 간판을 내린 것에 비하면 예상치 못한 호응이다.

컬트의 고전이 이제야 한국에 상륙했지만, 정작 컬트라는 용어는 어느새 진부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뭔가 기괴한 것, 혹은 대중적인 인기보다는 소수로부터 숭배를 받은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지난 접두어로 쓰이거나, 컬트 영화라는 딱지으 상품성에 기댄 홍보 문구에 등장할 뿐 진지한 논의 대상에서 밀려난 지 오래인 것이다. 하지만 <록키 호러 픽쳐 쇼>를 빌미로 이 화두를 다시 꺼내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을 듯하다.

컬트의 원조 <록키 호러 픽쳐 쇼>, 뒤늦게 각광
<록키 호러 픽쳐 쇼>이전에도 컬트 현상을 불러일으킨 예는 있었지만 이 영화만큼 전폭적이고 지속적인 호응을 얻은 예는 드물었다. 리처드 오브라이언의 동명 록 뮤지컬을 원전으로 삼은 <록키 호러 픽쳐 쇼>는 뉴욕의 웨이벌리 극장에서 15년 동안 연속 상영되는 기록을 세웠다. 영화를 되풀이해 q는 광적인 숭배자들도 적지 않아서, 셀피로라는 미국 청년은 81년에 5백회 관람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이들은 대사와 노래를 따라할 뿐 아닐, 배우들과 같은 복장을 입고 준비해 온 소품을 던지는 등 제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결혼식 장면에서는 쌀을 던지고, 주인공 브래드와 자넷이 빗속을 걸을때는 물총을 쏘며 환호한다. 이 작품이 <엘 토포>(71년ㆍ연출 알렉산드로 조르도프스키)<핑크 플라멩고>(73년ㆍ존 워터스)등 전작들을 제치고 컬트의 고전으로 불리는 것은 이러한 지속성 때문이다.

컬트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듣게 되는 말은 ‘컬트는 장르가 아니라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컬트 영화의 주체가 감독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지적과 쌍을 이룬다. 위의 지적은 이 용어의 역사적 맥락을 환기시킨다. 심야 상영관을 중심으로 한 광적인 숭배는 70년대부터 널리 퍼졌지만, 이 현상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이다. ‘숭배’를 뜻하는 라틴어 컬츠(cults)에서 유래한 컬트는, 일부 관객이 열광적으로 받드는 영화를 일컫는 용어이다.

이처럼 심야 극장을 중심으로 한 독특한 관람 문화가 번성하자 80년 와이오밍 대학의 마크 시겔 교수는 ‘록키 호러 현상’을 다룬 논문을 내놓았다. 이후 여러 평자들이 이 영화의 매력을 분석했다. 록ㆍ코미디ㆍ호러(horror)등 여러 장르를 뒤섞어 장르 관습에 익숙한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주었으며, 성적 터부를 내던져 해방감을 주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루었다. 록 음악 특유의 친화력과 캠프적 감수성(저급 취향, 즉 중산층의 취향에 반하는 이단적 감성)이 젊은이의 감성과 맞아떨어졌다는 해석도 뒤따랐다.

컬트의 역사는 ‘위반’의 역사
<록키 호러 픽쳐 소>가 컬트 현상의 전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평자마다 컬트의 정의는 조금씩 다르다. 80년대 들어 비디오와 케이블 텔레비전이 대중화하면서, 심야 극장을 중심으로 한 컬트 현상이 사그라든 것도 컬트의 의미가 전화한 중요한 이유다. 평자들은 고전 컬트, 심야 컬트, 패스트 푸드 컬트 등 다양한 용어를 동원해 컬트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심야 극장이 줄어들면서 협의의 컬트 영화 대신 ‘컬트적 영화’가 쏟아진 것은 90년대의 새로운 현싱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데이비드 린치. 그의 작품을 ‘기성 컬트’라고 빈정대는 경우도 있지만, 그를 광적으로 추종하는 팬들이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에도 유독 그의 작품이 많이 소개되어 일반 관객에게 컬트는 <이레이저 헤드><블루 벳벳><로스트 하이웨이> 등의 분위기로 이해되고 있다.

요즘 숭배의 장은 심야 극장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인 것처럼 보인다. 비디오로 영화를 보고, 사이버 공간에서 경험을 공유하는 것으로 그 양상이 바뀐 것이다. 영화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영화 내용에 관한 시시콜콜한 퀴즈를 즐기는 ‘트리비아 게임(trivia game)’이 널리 퍼진 것은, 양상이 변했을 뿐 숭배의 대중적인 텔레비전 드라마까지 광적 숭배의 대상이 된다. <트윈 픽스. <X-파일> 시리즈 등은 인터넷에 수많은 개인 사이트를 거느리고 있다.

이처럼 컬트 현상 자체가 변천을 거듭했기 때문에 일반화가 어렵지만, 컬트 현상을 분석하려는 평자들의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영화 <카사블랑카>에 대한 분석을 통해 컬트 영화의 주요 속성을 뽑아냈다. <카사블랑카>가 예술적 성취도로 볼 때는 시덥잖은 작품인데도 사람들을 끄는 미력이 있다고 본 에코는 ‘어떤 작품을 숭배대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히려 일관된 구성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라고 묻는다.

컬트 영화는 ‘문학이 문학으로부터 나오듯이, 영화도 영화로부터 나온다’는 에코의 유용한 틀거리를 제공한다. 영상 세대는 자신이 축적한 영상 경험을 토대로 영화와 영화가 주고받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재미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컬트 영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장르 뒤섞기는 각 장르의 관습에 익숙한 관객에게 더욱 흥미를 주는데, 패러디와 차용(借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무엇보다 평자들이 컬트를 설명하는 유용한 잣대로 집어드는 것은 ‘위반’의 속상이다. 컬트 현상을 불러일으킨 영화 대부분이 사회의 금기를 위반하고, 논리적 구성의 틀을 위반하며, 기성취향을 비웃고, 나아가 기본 테크닉에 대한 관객의 기대까지 위반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컬트 영화의 역사는 각종 위반의 역사이기도 하다. 컬트영화의 주된 소재인 동성애, 괴기한 복장, 마약, 무분별한 섹스와 과도한 폭력은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것이다.

너무 못 만든 영화도 엄연한 컬트 영화
<이레이저 헤드>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리얼리즈 영화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도 종요한 특징이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악취미를 드러내거나 기량이 부족해 엉망으로 만든 영화조차 관객을 환영을 받는다.

3백kg이 넘어 혐오스러운 여주인공이 개똥을 집어먹는 장면이 등장하는 <핑크 플라멩고>는 너무나 뻔뻔스럽게 나쁜 취향을 드러내 환영을 받았고 9감독 존 워터스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나쁜 취향을 택했다고 말했다).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꼽힌 에드워드 우드 감독의 <글렌인가, 글렌다인가>는 ‘너무 못 만들어서’ 당당히 컬트 영화의 반열에 들었다(그가 얼마나 영화를 졸속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것은 팀 버튼 감독이 만든 <에드우드 2세>에 잘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그 태도는 비웃는다기보다는 애정을 담뿍 담은 것이러서 에드우드 감독에 대한 팀 버튼의 러브 레터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이상의 사례로 볼 때 컬트 영화는 뭔가 심오하고 예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취향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마이너리티의 영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 속성 때문에 컬트 영화는 곧잘 진보성을 띠는 것으로 평가받았고, 평자들은 내용에서 혁명성을 읽어내느라 분주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조지 로메로)을 비롯해 심야 극장의 인기 레퍼토리였던 호러 영화들이 정상적인 것과 괴수적인 것의 관계를 뒤바꾸어 이른바 ‘정상적’이라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들 영화의 진보성이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제프리 스콘은, 젊은 관객이 유혈이 낭자한 호러 영화에 열광하는 것은 작품이 그들의 성적 억압을 대리 표출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도한 폭력이 제공하는 흥분 때문이라고 말한다.

“컬트 현상은 곧 소비자들의 반란”
따라서 컬트의 진보성이 영화의 내용보다는 관객의 역할에 있다는 지적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김흥준 감독은 “컬트 현상은 대중의 문화 취향까지도 조종하려 드는 산업 사회에서 생산자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란이다”라고 말하다. 생산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영화를 비틀어 즐기는 것은 표준 취향에 대한 반란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록키 호러 픽쳐 쇼>가 당초 메이저 제작사인 20세기 폭스사에게 실패작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컬트를 논의할 때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컬트 현상이 빚어질 수 있었던 문화 환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가질 때 컬트 현상은 ‘그들만의 제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의식의 결핍을 절감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홍보 전략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심야상영이 호응을 얻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김흥준 감독은 최근의 현상에 대해, 컬트 현상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공인된 수입 컬트만 감상하던 상황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호러 영화를 중심으로 한 심야 영화제는 수입 영화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고에 틀어박혀 있던 우리의 전통 영화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김인수ㆍ신상옥ㆍ김기영 감독의 작품은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환영받는 단골 레퍼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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